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9월 27일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2. 9. 27. 06:20

2022 9 27일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1581년 프랑스의 아키타니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도움으로 공부를 한 그는 사제가 되어 파리에서 본당 사목자로 일했다. 빈첸시오 신부는 한때 여행 도중 해적들에게 잡혀 노예 생활을 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고아와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자선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660년에 선종한 빈첸시오 드 폴 신부를 1737년 클레멘스 12세 교황이 시성하였고, 1885년 레오 13세 교황은 모든 자선 단체와 병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의 정신과 활동을 계승하려는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1833년 파리에서 설립되어 현재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 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루가 9,51-56)

 

On the way they entered a Samaritan village
to prepare for his reception there,
but they would not welcome him
because the destination of his journey was Jerusal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욥이 제 생일을 저주하며,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하고 탄식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는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에 타고 있던 닐 암스트롱이 처음으로 달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러면서 달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달은 그저 신비로운 장소일 뿐이었지요.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는 옥토끼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나라에서 달이 가장 큰 보름에 맞춰 농경 사회에 의미 있는 행사(정월대보름, 백중, 추석)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달에 직접 갈 수는 없고, 눈에 보이기만 하니 그냥 신비로운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달 착륙 후 신비로움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나의 이웃과 함께해야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혼자만 살면 그만이라면서 함께하는 자리를 피한다면 사람의 기억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에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자기의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해야지만 구체적으로 서로에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신적 존재가 아니기에 절대로 사람들과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던 예수님께서는 심부름꾼을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보내서 숙박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그 전에 이미 사마리아 지역에서 환영받아 머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환영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다인들이 과월절을 지내는 곳은 시온산, 즉 예루살렘입니다. 그에 반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과월절은 그리짐산에서 지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가는 예수님 일행을 환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전례적인 이유로 거부했던 것이지요.

여기서 제자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상당히 격분해 못 참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자기 스승께 대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홀대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은 누가 내릴 수 있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어떤 불도 내릴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하는 마음 자체가 없으니,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폭력적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든 함께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 누구도 구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이웃들과 함께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신비의 차원이 아닌, 구체적으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물 흐르는 대로 휩쓸러 가지 않고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멈춰 서서 고민하고 사색하는 것. 의구심은 사람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에너지가 된다(야마자키 마지).

 분노는 칼과 같아 쓰는 법에 따라 의사도 되고 강도도 된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umjLW6eVkt0

단편영화 ‘윌리 빙엄의 경우’ (2015)는 형벌 제도가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 여자아이를 살해한 범죄자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합니다. 처음엔 팔 한쪽, 그다음엔 나머지 팔과 한쪽 다리, 그다음엔 신장과 허파 하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잘라가며 자신의 분을 풉니다. 코와 입술, 귀까지 잘린 범죄자는 더 이상 살아봐야 좋을 게 없어서 그냥 망연자실합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아버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처음엔 피해자의 고통과 그것에 비해 약한 처벌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 가서는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마가 되어가는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보복하면 딸이 살아날까요? 그리고 그 보복은 그 사람 전체에 대해 행해져야 하는 것일까요? 이런 식의 분노는 그 사람의 마음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어 나중엔 이런 소리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죄 안 지었냐?”

  

    부모가 화가 많으면 자녀도 화가 많은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방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친절한 금자 씨’에서 감옥에 갇혀있던 금자 씨에 안 좋은 감정을 품고 다가온 목사님에게 금자 씨가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에게 지적할 때 “그러면 너는?”이라고 자동으로 질문합니다. 이것이 본성입니다. 그리고 상대에게도 단점이 있다는 것이 발견될 때는 절대 그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부모가 분노를 터뜨려 자녀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그 분노가 무엇 때문인지 명확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메스를 들었다고 다 의사가 아닙니다. 마구 휘두르면 강도이며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에게 화를 내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마리아 마을을 불살라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들의 분노는 예수님의 분노와 다릅니다. 예수님도 성전을 정화할 때, 그리고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실 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분노는 그들을 고치려는 의사의 분노였습니다. 성전 전체가 아닌 성전을 더럽히는 탐욕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 전체가 아니라 자기만 생각하게 만드는 그 안의 사탄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유다 지도자들도 그들의 위선과 교만에 대해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의사로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 수술을 받아들이면 고쳐지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사의 분노를 터뜨리는지 강도의 분노를 터뜨리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 5,22)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형제에게 성을 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사탄에게는 화를 내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화를 내도 되고 죄에 대해서도 화를 내도 됩니다. 예수님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 전체에 대해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재판에 넘겨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용서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분노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분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살인자에게 분노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그렇게까지 이끈 사탄에게 분노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트레이 알렉산더 랠포드, 나는 당신이 가엾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어서요. 내가 도와주고 싶습니다. 선량한 시민으로 자라도록 아들을 도운 것처럼요. 살라후딘이 여기 있었다면, 살아 있었다면, 당신을 용서했을 겁니다. 그게 아들의 방식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화가 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 아들을 해쳤다고 해서요. 나는 악마에게 화가 납니다. 악마를 탓합니다. 당신을 잘못 이끌어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인도했으니까요. 당신 탓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전혀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걸 꼭 알아주세요.”

  

    우리가 화를 터뜨릴 대상은 사람이 아닌 사람을 그렇게 이끄는 사탄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도시와 같아서 사람 전체에 분노하면 정의롭지 못한 인간이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도 하느님은 그 안에 살던 롯의 가족은 빼내셨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것이 정의입니다. 좋은 것도 분명 들어있는 사람 전체에 분노하지 맙시다. 그러면 의사가 아닌 강도로서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 전하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NysYepghJdA

 -조재형신부-

 

어린 아이에게 엄마가 좋으니아빠가 좋으니?’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엄마가 좋다고 하면 아빠가 마음에 걸립니다아빠가 좋다고 하면 엄마가 마음에 걸립니다그래서 아이들은 둘 다 좋아!’라고 대답하곤 합니다사제 모임에서 강사 신부님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용서와 화해 중에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신부님 한 분이 손을 들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용서와 화해가 둘 다 쉬운 것은 아닙니다그러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용서입니다용서는 상대방의 처지와 상관없이 내가 할 수 있습니다용서는 용서함으로써 내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용서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처지와 상관없이 내 마음에 먹구름이 생기기 마련입니다마음이 평화롭지 않습니다그래서 용서는 혼자서도 할 수 있고용서함으로써 내가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해는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우리 민족이 70년이 넘게 분단된 상태도 있는 것은 용서의 차원이 아닙니다아직도 우리가 진정으로 화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어릴 때입니다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말다툼 끝에 싸우게 되었습니다친구는 저의 목을 잡고 있었고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고 있었습니다저는 숨이 막혀서 울었고친구는 기가 막혀서 울었습니다이렇게 울던 우리는 서로 잡고 있던 손을 놓았습니다저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고친구도 기가 풀려서 편하게 지냈습니다화해는 이렇게 서로가 잡았던 것을 놓아야 시작됩니다어제 욥 성인은 자신에게 닥쳐온 시련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용서함으로써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오늘 독서에서 본 것처럼 화해는 쉽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욥은 시련을 주시는 하느님과 진정으로 화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사필귀정인과응보라는 말을 자주합니다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고옳은 일을 한 사람은 상을 받는 것입니다그것은 당연한 것이고자연의 이치일지 모릅니다그래야 사회가 질서가 잡히고제대로 돌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그것은 바로 용서와 화해입니다분노와 심판은 잠시 평화를 줄 수는 있겠지만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기 위하여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시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배를 저어가는 선원입니다직책이 다를 수 있고하는 일이 다를 수 있지만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배가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권위와 교만은 배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욕심과 분노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배가 방향을 잃게 만듭니다무엇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순탄하게 노를 젓게 할까요? ‘겸손과 사랑입니다. ‘친절과 온유입니다. ‘용서와 화해입니다바로 이와 같은 삶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우리들 역시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형제들이여, 이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짊어지십시오!

 -양승국신부-

 

저는 젊은 사제 시절 주로 아동 보육시설에서 담당자로 일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넘쳐날 때였습니다. 여기저기 아동 입소 문의가 들어오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니다.

  

각 집에는 아이들로 넘쳐나고, 더 이상 안 되지, 하다가도 아이들의 눈망울을 바라보면 또 다시 고민을 하기 시작하고, 사정사정하면서 아이들을 입소시켰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빈첸시오 드 폴 신부님도 비슷한 일, 아니 몇백, 몇천 배 더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부슬비가 내리던 스산한 겨울밤, 가난한 도시의 뒷골목 쓰레기 더미 위에는 수시로 갓난아기들이 버려졌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신부님은 양심상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숱한 밤, 아이들을 챙기러 밤거리를 헤매 다니셨습니다. 아이들 보육을 담당하던 수녀님은 안 그래도 꽉 찼는데, 아무런 대책도 없이 수시로 아이들을 데려오는 신부님이 못마땅해 구박을 드렸습니다.

  

“신부님, 아무런 대책도 없이 또 주워 오시면 어떡해요?”

  

심한 흉년과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던 17세기 초, 신부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셨습니다. 정부 관계 부처를 수시로 찾아가서 대책을 마련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부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양심에 호소를 했습니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던 가난한 형제들을 살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해있던 농민들에게 농기구와 씨앗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집 지을 자재를 구해다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빈첸시오 신부님이 하셨던 수많은 일들을 열거해보면 마치 거짓말 같습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한 인간이 어떻게 이 많은 영혼을 구할 수 있었을까?

  

이토록 훌륭하셨던 빈첸시오 신부님이 하느님 앞에 늘 되풀이하셨던 기도는 바로 이런 기도였습니다.

  

“이 보잘 것 없는 몸을 주님 당신의 심부름꾼으로 써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한번은 빈첸시오 신부님이 노예선의 지도 신부로 사목하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발목과 팔목에 쇠사슬이 채워진 채 정신없이 노를 젓는 죄수들의 모습은 빈첸시오 신부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죄수들의 생활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쇠사슬에 닿은 피부는 벗겨져 항상 피가 흘렀습니다. 그들의 어깨와 등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채찍 자국들이 굵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마에는 죄수임을 표시하는 쇠도장이 찍혀있었습니다.

  

자신도 직접 몸으로 노예 생활을 체험하셨던 빈첸시오 신부님이셨기에 그런 죄수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잔인무도한 간수들을 타일러 매질을 못하게 했었고, 죄수들 앞에 무릎을 꿇어 그들의 상처를 일일이 치료해주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들의 내면에 자비의 목자 빈첸시오 신부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형제들이여, 이 약한 사람들에게 가십시오. 그들과 함께 약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안에서 그들의 연약함을 느끼십시오. 그들의 비참함을 서로 나누십시오. 이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짊어지십시오. 그러면 이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여러분을 짊어지고 하늘나라로 올라갈 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9,5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상경기'는 19장 27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십니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그것은 그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완성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올라간다'(αναλημψεωσ)는 말씀은 승천을 암시하고, '때가 차자'라는 말은 완성(συμπληροω)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요 영광임을 암시해줍니다.

또한 이는 이미 ‘첫 번째 수난예고’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마리아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할 당시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쫓아내고 이방인들을 살게 하였는데, 훗날에 쫓겨난 이스라엘인들이 돌아와 그들과 같이 살게 되어 혼종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멸시하게 되면서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열왕 17,24-41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여기고 있는(신명 12,4-14 참조)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여 가시는데, 사마리아인들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했던 그리짐산의 중앙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루카 9.54)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봅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7)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 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걷는 길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루카 9.54)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소서.

응징이 아니라 끌어안게 하시고, 보복이 아니라 감싸 안게 하소서.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도모하게 하시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선을 더하여 갚게 하소서.

주님, 제 마음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 51)

-한상우신부-

뜨거운 결심은
뜨거운 실천을
낳습니다.

예수님의
굳히신 마음이
십자가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흩어진
우리 마음을
모으는 일이
가장 좋은
사랑입니다.

가장 좋은 사랑은
인생의
참된 가치와
참된 행복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가장 존귀한 일은
가난한 이들을 돕고
사랑하는 봉사입니다.

봉사의 기쁨은
삶의 새로운
안목을 제공합니다.

새로운 안목이란
복음의 기쁨인
새로워진 마음과
하느님 중심의
실천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웃들을
대하고 있는 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을
끝까지 돌보았던
빈첸시오 드 폴
사제의 삶이었습니다.

가장 예수님다운
삶이란 반드시
해야할 일을
피하지 않고
우리가 실천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인식의 전환은
생각 속에
그치지 않는
복음의
실천입니다.

복음의 실천이란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며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의 아픔에
우리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습니다.

생활의 실천이
참된 봉사이며
참된 나눔입니다.

나눌 줄 알 때
만나게 되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맑으신 사랑입니다.

생활의 실천이
십자가이며
부활의 삶임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아름다운
생활의
실천이십니다.

우리의 오늘이
뜨겁고 맑은
생활이길
기도드립니다.

신앙인의 생활은
뜨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여정이
참으로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6주 화요일-섣부른 찬미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