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루가 9,57-62)
No one who sets a hand to the plow
and looks to what was left behind is
fit for the Kingdom of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욥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며 누가 그분과 겨루겠냐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하시며,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짜 고쳐 쓸 수 없을까요? 맞다고 하면 반대의 의견을 내시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인간은 변화 가능하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과학적으로 보면, 고쳐 써서 변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 순간 다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사람 몸은 약 3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세포들은 매우 활발하게 죽어 사라지고, 새로운 세포가 생성됩니다. 하루에 3,300억 개의 세포가 새로 만들어지고 사라집니다. 이는 1초에 380만 개의 세포가 교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포로 교체되는 주기가 약 7년쯤 된다고 하더군요. 지금의 나와 7년 후의 나는 과학적으로 전혀 다른 세포로 구성된 ‘나’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삶은 고쳐 쓰는 삶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삶입니다. 이 점을 인정하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된 변화를 내 안에서 이룰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났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열정적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기존의 것을 모두 간직한 채 따를 수 있을까요? 약간의 변화를 통해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야 제대로 따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제자가 되어 따라다니겠다고 청원합니다. 그는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자기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사제 간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인생을 배우는 사제 간의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따르는 완벽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새롭게 태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는 말에도,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달라는 말을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일에 대해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고 하셨으며, 엘리야 예언자도 허락했었던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에 대해서는 “쟁기에 손을 대가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로지 달려야 할 길만을 꾸준히 달리고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고침으로 충분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욥기의 메시지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F1Z_SO2IstM
-조재형신부-
고려시대 학자인 길재(吉再: 1353∼1419) 이런 시조를 남겼습니다.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원천석도 비슷한 시조를 남겼습니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계워 하노라.” 두 시조의 공통점은 인생의 무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국가도 흥할 때가 있으면 망할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비슷한 감정을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느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정성을 기울여서 세웠던 교회는 이제는 돌무더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스탐불에 있던 성 소피아 성당의 성화는 회칠로 덮여 있었습니다.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성 소피아 성당은 이제 무슬림들의 회당이 되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묵상하는 욥기도 비슷한 감정을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은 헛되고 헛될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사목하던 선배 사제가 시를 한편 보내왔습니다. “상실이 잉태한 것은 다 잃어버릴 수 없어서 남은 것을 헤아려 본다. 일생을 헌신한 하늘 뜻 하나 붙든 삶의 끝에 Natus* Ingressus* Obiit* 세긴 묘비 베고 누운 그대 숫자들 사이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이름자 넘쳐 새 Cemetery로 모여든 사명 마친 이들 수도원은 비워지고 묘지는 넘친다. 슬픔 과해서 은퇴했노라는 파킨슨스 노 사제 간혹 정지된 생각 속에 길 잃어버린 회로 망각 속에는 영혼구령이라는 구호 하나 남았을 것이다. 애썼던 옛 시간에게 묻는다. 그 열정의 열매는 어디에 있는가. 문 닫은 수도원, 비워져 가는 성당, 임종 앞둔 사제들 우리의 수고는 불신의 세대를 낳아 공허한 메아리 차지한 빈 성전을 물려주고 있다. 그래 기쁜 소식은 빈 무덤에서 시작했었지 대답 없는 답변 내일의 그대에게 양도해버린 봉인된 입”(*Natus, *Ingressus, *Obiit 은 태어난 해, 입회한 해, 입적한 해의 라틴어 표기로 수도자들 묘비에 기록된 세 가지이다. 족적 남기신 분들이나 무명의 수도자들 차별 없이 받는 세 가지 숫자이다.) 묘지에 묻힌 형제들은 늘어가고 있는데, 수도원은 비워가고 있음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죽비’와 같습니다. 무상한 인생이라도,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라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참된 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목하시던 시절, 그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뼛속까지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나 이 세상 좋은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눈을 뜨나 감으나 가난한 사람들 생각뿐입니다. 그가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낸다거나 휴가를 가는 것을 결코 본적이 없습니다.”
신학교 학장 시절, 여름 방학이 오면, 동료 교수들이며, 직원들이며, 신학생들이 모두 장기 휴가를 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신학교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조용한 시간을 이용해서 밀린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가장 좋은 휴가라고 했습니다.
3년여 전에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한달 간의 휴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내 성지순례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순간이었지만, 숙소 문제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어떤 날은 고마운 지인 댁에서 신세를 졌습니다. 어떤 날은 텐트를 치고 잤습니다. 어떤 날은 찜질방에서 새우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아주 좋은 장소가 눈에 띄어, 텐트를 치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주인이라는 분이 나타나셔서, 당장 나가라시더군요. 한밤 중에 주섬주섬 텐트를 걷는데 기분이 참 거시기 하더군요. 당시 나만의 공간이 따로 마련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그 작은 공간 마저 포기하라시니, 너무하신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습니다.
사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안정된 주거 조건 속에서 복음 선포활동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떠돌아다니셨습니다.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카파르나움에서 베타니아로, 베타니아에서 예리코로,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렇게 떠돌고 계시던 예수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 복음 9장 57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주 특별한 말씀, 무척이나 알쏭달쏭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씀, 꽤나 슬픈 말씀을 건네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복음 9장 58절)
공생활 기간 내내 펼쳐진 예수님의 행적을 뒤따라가보니, 예수님 말씀은 정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오래 머무신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꼭 붙들 때 마다, 나는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시며, 결연히 팔을 뿌리치며,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곰곰히 따지고 보니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유다 광야의 여우 한 마리, 갈릴래아 호숫가 나무 위에 깃들며 살던 하늘의 새 한 마리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이었더라면, 경치 좋고 기후도 좋은 갈릴래아 호숫가에 커다란 대저택 하나를 짓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고통받은 백성들을 당신의 발로 직접 찾아다니셨습니다. 당신 치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하는 환자들을 일일이 방문하셨습니다. 당신이 극진히 사랑하는 양떼를 찾아가기 위해 떠돌이 생활, 노숙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놀랍게도 공생활 여정의 마지막 순간에도 정확히 이루어졌습니다. 당신 사명의 종착지인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의미심장한 예언은 마무리되었습니다.
통상 임종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던 방에서, 그게 아니라면 병원 침대 위에서 머리를 바닥에 대고 세상을 뜹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공중에서, 그 어디에도, 그 존귀한 당신의 머리를 대지 못한 채, 그렇게 운명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애 내내는 물론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놀라운 청빈과 겸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단히 자신만의 왕국,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포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언제든 어디로든 기꺼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는 대조되는 세 인물과 그에 따른 예수님의 세 가지 태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따라라.” 하는데,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라나서겠다는 사람은 내치는가 하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집에 다녀오겠다는 이는 가지 못하게 하고,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이에게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참된 제자 됨의 가르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사람을 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설익은 고백을 깨우치면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낮고 겸손한 삶에로 부르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도록 허락하지 않은 것’ 역시 당신을 진정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곧 당신의 제자는 죽음의 나라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늘나라를 더 앞세우는 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또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도록 해 달라고 하는 세 번째 사람에게는 ‘대체 무엇을 먼저 앞세워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곧 인간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앞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요, 그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무엇보다도 ‘앞서 먼저’, 자신의 ‘머리 위에’ 그리스도를 두고 사는 일입니다.
이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이임을 말해줍니다.
결국 뒤를 돌아다보지도 말며, 오로지 임을 향하여 진리를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제자 됨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인지, 무엇이 우선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를 잘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입니다.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일이요, 죽음의 나라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게 하늘나라를 앞세우는 일입니다.
거처할 곳이 묻혀 썩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과 더불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대체 어디에 머리를 두고 있는가?”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루카 9,62)
주님!
제 몸이 당신 밭에 머물게 하소서.
제 손이 당신 말씀의 쟁기를 잡고 진리의 밭을 갈게 하소서.
당신은 저의 탯줄, 저의 보금자리, 저의 무덤이오니 제 머리가 항상 당신 가슴에 기대어 있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26주 수요일-침묵의 뜻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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