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7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루가 6,20-26)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the Kingdom of God is your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며,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며,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하고 선언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하늘 높이 날던 제비가 땅에 가깝게 비행하는 것을 보게 되면, 곧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제비가 날씨를 예측하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재주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곤충 때문이지요.
제비는 곤충을 잡아 먹기 위해 날아다니는데, 비가 오기 전에 습도가 높아지면 곤충의 날개도 습기 때문에 무거워져 높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낮게 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곤충을 잡으려는 제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곤충이 많은 땅에 가깝게 비행해야 할까요? 아니면 곤충이 전혀 없는 하늘 높이 날아야 할까요?
비가 오기 전, 습한 날에 땅 가깝게 비행하는 이유는 이렇게 ‘곤충’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단지 곤충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아서 제비가 날씨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고 착각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는 종종 사람의 능력에 대해 과대평가합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우리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다면 그런 능력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자기의 힘만으로 얻었다는 착각 속에,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행복과 불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4가지 행복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입니다. 뒤이어 오는 불행은 4가지 행복을 뒤집은 것으로,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이를 듣고 어떻게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할까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무조건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 그리고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 것보다 주님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가난할 수 있고, 굶주릴 수 있고, 울 수 있으며, 세상의 반대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능력과 재주보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덕분에 이루어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서 먼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과 판단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주님의 기준과 판단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를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잊는 유일한 행복의 요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oGuqT9md7yk
-조재형신부-
유시화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분의 책 중에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말에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불행해 보이지만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행복해 보이지만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2005년에 ‘ME’ 주말을 다녀왔습니다. 그 뒤로 엠이 모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엠이는 결혼한 부부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대화하며 보다 행복한 부부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모임입니다. 결혼하고 부부가 되어 가정을 꾸미는 것도, 저처럼 사제가 되어 독신으로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모두가 감사할 일입니다.
신학생 때는 사제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보좌신부 때는 본당신부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본당신부 때는 보좌신부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작은 본당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성당에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20년이 지나서 안식년을 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어진 순간을 감사드리고, 그 시간에 충실한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하느님나라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듯이 행복은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행복 역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우리가 늘 추구하지만 그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현실의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마음은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욕심, 욕망, 출세, 성공, 권력, 명예’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불꽃 속으로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모든 것을 불태우려 합니다. 하지만 그 끝은 ‘허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이야기 하십니다. 그것은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과 같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행복은 어떤 조건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물론 행복은 소유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병중에 있을지라도, 시련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졌을지라도, 높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많은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하느님을 떠나 있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라고 권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매사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건강해도 재물이 많아도 능력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노래도 잘 하였고, 말도 잘 하였고, 외모도 잘 생겼습니다. 제게 없는 것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이 많으면 많아서 힘들다고 했습니다. 일이 적으면 무시당한다고 원망 했습니다 상사에게는 대화가 안 된다고 불만이 있었습니다. 젊은 직원에게는 예의가 없다고 불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늘 곁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사람 곁에는 행복이 머물 수 없습니다. 행복 하고 싶다면 감사의 문을 활짝 열면 됩니다. 계속 행복 하고 싶다면 불평의 문은 꼭 잠가 놓으면 됩니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들려 오면 천국에서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양승국신부-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간절히 고대하면서 책을 한 권 손에 들었습니다. 김훈 선생님의 하얼빈(문학동네)! 청년 안중근 토마스 의사님(1879~1910)의 거사와 순국(殉國)의 기획과 과정을 소상히 묘사한 흥미진진한 역사 소설입니다.
참담한 슬픔과 굴욕의 시기, 청년 애국자 안중근의 마음은 늘 찹찹했습니다. 처참히 짓밟히는 조선의 안타까운 현실 앞에 안중근은 기약 없는 떠남을 결심합니다. 황해도 진남포에서 신천으로, 신천에서의 서울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배를 타고 함경북도 연추로, 연추에서 블라디보스콕으로, 그리고 마침내 하얼빈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 늘 미안했던 부인 김아려, 어머니 조마리아를 뒤로 하고 어딘지 모를 머나먼 이국땅으로 떠나가는 청년 안중근, 그 분위기는 참으로 처연했습니다. 아들이 품고 있는 큰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어머니 조마리아는 아들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저 한마디만 하였습니다.
“거기는 춥다던데, 너는 한뎃잠을 좋아하니 견딜만 하겠구나. 네 처가 가엾게 되었구나. 성정이 고우면 속마음이 더 힘들다. 내가 잘 살필 터이니 그리 알아라.”
안중근은 신새벽에 길을 나섰습니다. 짐은 겨울옷 한 벌이 책 몇 권뿐이었습니다. 천주교 기도서도 보따리에 넣었습니다. 아내 김아려는 대문에서 남편과 작별했습니다. 이승에서 더 이상 남편과 해후할 수 없음을 직감한 아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직 대한 독립이라는 사명 하나를 가슴에 간직하고 어딘지도 모르는 물설고 낯선 머나먼 길을 떠나는 안중근의 뒷모습이, 한없이 나약하고 지조 없는 오늘 우리의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마침내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동지 우덕순과 거사를 목전에 두고 하얼빈 시내로 나갔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그들 마음이 얼마나 결연하고 엄숙했던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옷을 사러 가자.”
“옷이라니?”
“지금 입은 옷은 추레하다.”
“돈이 모자랄 텐데.”
“넌 돈 걱정을 하지 마라.”
“왜 갑자기 옷이냐?”
“쏘러 갈 때 입자.”
“머리를 깎자. 잡힐 때 깔끔한 게 좋겠다.”
“그렇겠구나.”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과 러시아 접경 지역인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습니다. 이 의거는 조선 통감으로 재직하면서 한일합방을 추진했던 가장 중요한 인물을 응징한 대사건이었습니다.
저격 30분이 지난 후 이토 히로부미는 6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고, 러시아 경찰대 숙직실에 구금된 상태로 있던 안중근은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벽에 걸려있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사건 다음날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뤼순으로 달려갔습니다. 뤼순에서 돌아온 그는 이토 히로부미 가족에게 위로금 10만원(현 시세 30억원)을 하사하라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고, 순종은 마지못해 재가했습니다.
더없이 나약한 순종 임금은 자칭 천황 메이지에게 위로의 전문을 보냈습니다.
“오늘 이토 공작이 하얼빈에서 흉악한 역도(逆道)에게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삼가 위로를 보냅니다.”
취조 때, 그리고 재판 과정 내내 안중근 의사는 더없이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였습니다.
“그대가 믿는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다.”
사형 집행 며칠 전 안중근 의사는 동생들에게 눈물겨운 유언을 남겼습니다.
“독립 전에는 내 시신을 옮기지 마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들려 오면 천국에서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모국어를 빼앗기고, 존재의 이유마저 빼앗긴 나머지, 혈혈단신 춥고 배고픈 이국땅을 떠돌던 한그루 청청한 소나무 같던 안중근 의사, 그는 비록 이승에서 가난했고, 굶주렸고, 슬퍼 울었지만, 지금은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자비하신 하느님 품에 안겨계시리라 확신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이영근신부-
오늘 여러분은 행복하세요?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라는 두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세속정신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행복 선언은 현실을 넘어있고 현실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고, 삶에 대한 태도의 방향 전환을 요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제자들은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삶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 중에서 마지막 것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루카 6,26)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하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비위맞추며 눈치보고,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좌지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 혹은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단지 인간관계를 개선하여 좋은 관계를 맺거나 단순히 공동선을 위해서 살아가거나, 단지 인간적인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니며, 혹은 그저 오손도손 재미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도, 그저 열심히 사랑하며 미워하지 않고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되 당신이 하신 것처럼,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사람이 아니라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루카 6,22)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루카 6,20)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다 내려놓고, 당신만을 차지할 것입니다.
굶주릴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도 마음을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쁠 것입니다.
진정 저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니, 배척받고 모욕 받으면서도 기뻐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 21)
-한상우신부-
우리가
찾고 있는
행복이 다시금
무엇인지를
묻게된다.
유년시절
가정의 아픔으로
많이 아팠고 많이
힘들었던 눈물의
시간이 하느님을
간절히 찾았던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살아있기에
울음이 있고
살아있기에
웃음이 있다.
우리의
아픈 울음을
기쁜 웃음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사고방식의
반대편에 있는
참된 행복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앎에 갇혀있다.
안다고 하지만
실상 알지 못한다.
삶의 방식을
다시금
바꾸어 놓으시는
참된 웃음이다.
참된 웃음은
우리의 삶이
선물이 되고
축복이 되게한다.
행복은 생각 속에
있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고 체험하는
모든 것이 행복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참된 행복은
행복이라는
지식에 갇혀
있지 않다.
오히려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눈물도 흐르고
세월도 흐르고
행복도 흐르고
기쁨도 흐른다.
모든 것을
맛보며
삶에 감사하게
되는 우리들이다.
우리의 행복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모든 삶이다.
눈물도
울음도
슬픔도
봉헌한다.
하느님을 찾는
모든 순간이
행복이었다.
행복한 사람이게
하시는 하느님께
오늘을 맡겨드린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3주 수요일-어떤 고통과 어떤 행복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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