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6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루가 6,12-19)
Jesus departed to the mountain to pray,
and he spent the night in prayer to God.
When day came, he called his disciples to himself,
and from them he chose Twel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거는 이들을 꾸짖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시어 밤새워 기도하시고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 열둘을 뽑으시고 사도라고 부르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밤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외부에서 강의를 마치고 완전히 녹초가 되어 사제관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낮에 나가 밤에 들어왔으니 모든 불이 꺼져 있어야 하는데, 거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낮에 켜 놓고 나갔나?’라고 생각하면서 방문을 여는데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낯선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황하며 “누구세요?”라고 물었습니다. 대답하지 못하다가, 한참 만에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밤손님인 것 같은데,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힘으로 제압하지도 않았고, 또 신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 나의 공간에 들어와 있으면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낯선 것을 계속 들여놓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바로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 악을 받아들여서 죄를 범하는 우리입니다. 문제는 이 죄를 낯설게 여기지 않기에, 악의 침범에도 전혀 놀라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선의 실천이 낯익어서 전혀 어색하지 않게 될 때, 매 순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대한 일을 구상하면서 먼저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보면, 산에 가셔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서 기도하시지요.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사도직을 부여합니다.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것이 밤을 새우면서 고민하게 할 정도로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을 것, 둘째, 사람들을 가르칠 것, 마지막 세 번째는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열두 사도를 뽑으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을 계속해서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따른 사명은 예수님 시대와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선 기본적인 세 가지 사명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지키지 못했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지도 못했습니다. 또 마귀를 쫓아내는 삶이 아닌 함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요?
보상의 역설: 왜 예수님은 배신자 유다를 검증도 없이 뽑으셨을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tYhz96-OqdY
성당에서 보면 어떤 일을 잘하면 상을 주는 식의 사목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선교를 많이 하면 상을 준다거나, 어떤 단체에 대해 점수를 매겨서 높은 단체에 상을 주는 식입니다. 이런 식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주는 일은 진짜 좋은 성과를 내게 할까요? 같은 예로 만약 아이들에게 성적이 오르면 스마트폰을 바꿔주겠다는 식의 보상을 주는 것은 효과가 있을까요?
수년간 많은 과학자가 행동 활성화의 효과를 입증하는 다수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한 사례에서는 과학자들이 담배를 끊으려는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추적했습니다. 이들은 흡연자를 두 그룹으로 나누고 8주 동안 금연 프로그램을 시행했습니다.
한 그룹에는 금연 프로그램에 참여한 보상으로 머그컵이나 하와이 여행 응모권 등을 주었습니다. 반면 통제 집단에는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선물을 받은 피실험자들은 금연 프로그램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처음에는 보상이 꽤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3개월 후 금연 성과를 확인했을 때 두 그룹 사이에 눈에 띄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1년 뒤에는 보상그룹의 참여자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금연을 포기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다른 연구사례도 있습니다. 버지니아 폴리테크닉대학교의 E. 스콧 갤런은 안전띠 착용과 관련해 스물여덟 건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았습니다. 6년간 25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벌인 다양한 연구 결과를 모두 검토하고 나서 안전띠 착용에 대해 금전적인 보상이나 선물은 주는 방법은 거의 효과가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독서를 한 학생에게 보상하는 여러 프로그램에 관한 다양한 연구 결과를 검토하고 나서도 여러 프로그램에 관한 다양한 연구 결과를 검토하고 나서도 보상에 따른 어떠한 장기적인 효과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흉흉한 마을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같은 마을에 사는 불만 가득한 십 대 몇 명이 모여 그 노인을 곯려주기로 작정했습니다. 아이들은 매일 노인의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어느 날 노인은 마당에 나와 10대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들이 나타나자 노인은 모두에게 5파운드씩 나눠주면서 앞으로도 계속 욕을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아이들은 일단 돈을 받고 욕을 하며 지나갔습니다.
일주일 동안 노인은 매일 아이들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그다음 주는 약간 달랐습니다. 노인은 아이들에게 돈이 별로 없다고 사정을 하고는 1파운드만 주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일주일 동안 돈을 받아 가며 계속 욕을 해댔습니다.
세 번째 주가 되자 또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노인은 아이들에게 상황이 너무 안 좋아 20펜스밖에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너무 적은 금액에 모욕감을 느낀 아이들은 급기야 욕을 중단해버렸습니다.
이것은 누가 지어낸 이야기일 테지만 여기에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 근본적인 동기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즉 행위에 대한 보상을 제안받은 사람들은 행위와 보상을 동일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행위가 보상을 위한 숙제요 부담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아무런 제안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 행위 자체를 보상으로 여겨서 그 행위를 멈추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처: ‘지금 바로 써먹는 심리학’,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행위는 감정의 산물입니다. 행위를 바꾸려면 감정을 바꾸면 됩니다. 그런데 행위에 따라 감정이 변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행위가 감정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웃으니 행복하다는 등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감정은 그렇지 않은데 억지로 하는 행동은 장기적으로 감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웃음 치료와 같은 시도가 있기는 하지만, 계속 불안한데 억지웃음만 웃으면 감정이 좋아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감정을 만들고 감정이 행위를 만듭니다. 믿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배를 타고 있는 나에게 어떤 배가 와서 부딪쳤을 때 화가 났다가도 그 배가 빈 배였다면 화가 사라집니다. 이는 분명 그 배 안에는 멍청한 사람이 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된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를 바꾸려면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는 감정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믿음에서 오기에 그런 감정을 갖게 만드는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만약 모든 것은 은총이라는 믿음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항상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믿음은 내가 에덴동산에 머물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을 믿게 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먼저 성체를 주셨습니다. 성체가 나를 하느님의 자녀로 믿게 하고 또 이미 에덴동산에 머물고 있음을 믿게 만듭니다. 그러면 이 믿음 때문에 좋은 행위가 나오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먼저 그들을 사도로 뽑으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그들이 사도로 선출되었다는 기쁨에 좋은 행동이 나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가리옷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께 사도로 뽑혔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믿음은 선택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에덴동산에 들어가려 했습니다. 이것이 뱀이 하는 일입니다. 바닥에 있다고 믿으면서 하늘을 날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하늘을 날고 있다고 믿으면 모든 뱀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결국 믿음은 내가 그 사람이 되었다고 믿으며 행하는 작은 행동들로 확고해집니다. 세례가 뽑히는 것이라면 견진은 그 믿음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하는 작은 행동들입니다.
제임스 클리어는 『아주 작은 습관의 힘』에서 살을 빼려거든 살을 빼려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정체성을 바꿈 없이 목표를 세워봐야 제자리라는 것입니다. 술과 과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바꾸지 않으면 10kg 감량은 물 건너간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하면 확고해질까요? 걸음마를 통해서입니다. 안 되지만 자꾸 해봄으로써 믿음이 확고해지는 것입니다.
안전장치 하나도 없이 손가락 한두 마디로 버텨야 하는 ‘프리 솔로’ 암벽등반으로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975m에 달하는 바위산 ‘엘 카피탄’을 오른 ‘알렉스 호놀드’는 어떻게 그 산을 오를 수 있는 믿음을 얻었을까요?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계획을 세우고 안전장치를 이용해 50번을 등반하고 나서야 그런 믿음이 생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면허를 따고 운전대를 잡으면 도로에 나가기 두렵습니다. 하지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지나다 보면 그런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나친 자만심만 아니면 초보 때 두려워할 때보다 훨씬 안전하게 운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유태인들이 세상에서 큰 성과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이미 그런 성과를 내도록 뽑혔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노력해서 자신들이 선택된 백성임을 증명하려는 삶이 아닌, 이미 뽑힌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성과를 내는 것입니다. 먼저 되었음을 믿어야 그렇게 되어갑니다.
담배를 끊은 이후의 삶을 기대하며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과 결국엔 누가 담배를 끊을 수 있게 될까요?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끊게 됩니다.
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로 불러주셨음을 자기 행동으로 증명하고 확인받으려고 하는 사람과 그냥 믿어버리고 사는 사람과 누가 잘 살 수 있을까요? 의심 없이 사제로 불림을 받았음을 믿는 사람이 잘 살 것입니다.
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천생연분임을 증명하려는 사람과 하느님께서 천생연분이기 때문에 맺어주셨음을 믿는 사람과 누가 잘 살까요? 이미 주님께서 그렇게 맺어주셨음을 믿는 부부가 잘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미리 사도들을 뽑으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훌륭한 사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면 이미 그런 행동을 할 존재로 불림을 받았음을 믿으십시오. 이미 받았다고 믿으면 꼭 받게 될 것입니다.
악에 물든 세상, 선에 몰두해야 할 인생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DNNcnUeDFgo
-조재형신부-
이민자들은 떠나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같기 때문입니다. 함께 모여 살면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한국인, 중국인,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곤 합니다. 제가 있는 뉴욕의 플러싱은 한국과 중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거리를 걸으면 마치 한국에 있는 것 같습니다. 간판도 한국말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한국 음식점도 많습니다. 성서를 보면 인류의 역사는 이민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어서 정든 땅 에덴동산을 떠나야 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이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고향 땅을 떠나서 낯선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땅과 후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야곱과 가족들은 가뭄을 피해서 이집트로 떠났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이집트에서 성공하여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에서 지내면서 깊이 성찰하였습니다. 땅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면 그곳이 에덴동산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면 그곳이 삭막한 광야여도 좋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면 그곳이 낯선 바빌론 땅이어도 좋습니다.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중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구에서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지난 8월 30일에 119명의 사제들이 새로운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12명의 사도들을 선택하셨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신 것처럼 교구장님께서는 119명의 사제들에게 새로운 곳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겼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해졌다면 그래서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게 되었다면 장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시기하고, 모략한다면 아무리 좋은 땅에 있어도 그곳에서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고, 우리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축복 중의 축복, 참 스승을 만나는 일!
-양승국신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다양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여러 유형의 축복 가운데, 제가 참으로 감사드리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 축복은 내 좁은 안목을 넓혀주신 스승을 만나게 된 축복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디 그런 스승 만나기가 쉬운가요? 아무리 애를 써도, 사방을 둘러봐도, 그런 스승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런 분들께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스승은 사방에 널려있습니다. 비록 시대의 간극으로 인해 그분을 직접 만나지 못한다할지라도, 그분의 말과 생각, 인생 전체가 담긴 책들이 있지 않습니까? 좋은 책 한 권을 만나는 것은 어찌보면 좋은 스승 한 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참 인간의 길, 참삶의 길이 무엇인지 지식이나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온몸으로 보여주신 스승, 부족하고 덜떨어진 나를 더 넓은 바다로, 더 광대한 지평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주신 스승, 인생에 있어서 보다 가치 있는 대상, 보다 소중한 영역들이 무엇인지 일깨워준 스승...
여러 축복 가운데 그런 스승을 만난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친히 제자로 불림 받은 열두 사도들은 행운아 중의 행운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스승 중의 스승,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스스로 찾아가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열두 사도들,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재수좋은 사람들, 가장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제자들의 삶, 한마디로 별 볼 일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무미건조했고 퀴퀴한 냄새가 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답답한 새장 안에 갇혀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 인생, 꼬여도 어찌 이리 꼬였나?’ 하며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기를 쓰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십니다. 그들의 삶을 한바탕 흔들어놓으십니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일종의 혼동상태 앞에서 제자들은 어리둥절했겠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시작된 ‘깊고 심오한 삶의 이동’을 통해 참으로 흥미진진하고 의미 있는 인생의 후반부로 나아가게 됩니다.
인생의 전반전과는 사뭇 양상이 다른 인생의 오후입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 하느님의 정렬 상태가 전반전과는 크게 달라진 인생의 후반부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열두 제자 못지않은 행운아들입니다.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창조주요 구원자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스승 중의 스승, 참 스승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에 깊이 감사드리며, 열두 사도들처럼 그분께서 남기신 어록들, 일거수일투족을 있는 그대로 추종하는 우리가 되고자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2-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부르시어 뽑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누가’ 그들을 뽑았는지가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결정짓습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곧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하며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열둘을 뽑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밤 새워 기도하여 뽑은 이들은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힌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사도로 뽑힐만한 충분한 자격이나 조건들을 갖춘 자들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거룩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혔기에 거룩해지게 된 이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고, 뽑힌 후에도 그다지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도 않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그렇게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면,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단히 겸손하지 않으면 튼튼한 기초가 될 수가 없고, 또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로 뽑혔나 봅니다.
마치 기초가 건물을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듯이, 그들은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은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 나가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겸손한 자 되어, 예수님과 함께 세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고,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는 겸손함을 주소서!
이름 없이도 사랑하고, 드러나지 않아도 당신 뜻을 실행하며,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가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3)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23주 화요일-바다가 돌 하나에 출렁이지 않듯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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