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2. 9. 9. 06:01

2022 9 9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루가 6,39-42)

 

“Can a blind person guide a blind person?
Will not both fall into a p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유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며, 복음을 위하여 이 일을 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인도하는 사람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침묵을 강조하는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수도원에 들어온 수도자들은 평상시에는 말 한마디 할 수 없고, 1년에 한 번 수도원장과의 면담 때에야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께서 수도자로 이 수도원에 들어왔습니다. 침묵을 지키면서 열심히 수도 생활을 했지요. 그리고 드디어 1년이 지났고, 수도원장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침대가 너무 딱딱해서 큰 고생을 했습니다. 침대를 바꿔주세요.”

수도원장은 곧바로 침대를 바꿔주었습니다. 다시 1년이 지나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수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식이 부실해서 식사 때마다 고역입니다. 음식에 신경을 써주세요.”

수도원장은 최대한 그가 원하는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또다시 1년이 지나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제가 지내는 방이 열악합니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방으로 바꿔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장은 그가 원하는 방으로 바꿔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네 번째 면담 시간이 되었습니다. 수도자는 “말 한마디 못 하니 너무 답답하고 바보가 된 느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 당신이 바꿔 달라는 대로 다 바꿔주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바꾸어 보세요.”

우리는 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대가 바뀌길 원합니다. 남편이 바뀌길, 아내가 바뀌길, 자식이 바뀌길, 세상이 바뀌길…. 그러나 여기서 늘 빠지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점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듯이, 자신을 먼저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들보를 빼내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남의 변화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는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외적인 행동과 마음속 생각의 불일치를 이루면서 결국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선자’라는 호칭이 지금을 사는 우리가 계속 듣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남만 바꾸라고 성을 내면서 말하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나 자신이 바뀌면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선의 삶이 아닌, 진실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시간 속에서 나의 주체성을 찾는 최고의 방법은 사랑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한 사랑해라. 행복한 순간은 늘 ‘앙코르’를 원한다(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적질로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7u27lDtOT7Q

 '금쪽같은 내 새끼' 78회 ‘가족 앞에 서면 숨이 턱 막히는 아들’에서는 내가 통제하고 지적하고 잔소리하면 상대가 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십니다. 60년간 오직 자녀교육을 잘 시키려 갖은 고생하신 할머니께는 죄송하지만, 아들조차도 엄마에게 “엄마는 항상 강압적, 지시적, 명령적이었어요, 항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처럼 아들도 자신이 어머니를 비난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금쪽이는 아빠, 할머니의 지나친 통제와 지적질에 숨이 막히고 그래서 가끔은 소변을 지리기도 합니다. 엄마가 이혼한 상태라 빈자리가 큰 금쪽이는 할머니와 아빠를 화해시키려 노력하다가 혼자 방에 들어와 숨죽여 웁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루카 6,40)라고 하십니다. 스승은 제자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성장시켜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방식과 다르게 하려는 제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눈먼 인도자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눈먼 인도자들이 하는 행태를 나무라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루카 6,41-42) 

    

    곧 눈먼 인도자들은 자신들 제자들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해 그들 눈의 티를 빼내려는 이들입니다. 이것은 비난, 지적질, 혹은 나무람, 잔소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것으로 자신을 고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발합니다. 자유가 있어서 통제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이를 오히려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데모가 한창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떠한 이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이슈보다는 감정싸움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전경에게 매 맞고 돌아온 선후배들을 볼 때 화가 나고 전경들은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과 돌에 맞아 상처를 입은 동료를 보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할 때 그 사람은 그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그래서 너는 뭐가 잘났는데?”로 나옵니다. 방어기제가 작동되는 것입니다. 방어기제는 자아가 양심 때문에 알게 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려는 시도입니다. 그렇게 죄는 사라지고 서로 간의 비방만 남습니다. 

 

    미국에서 한 아버지가 아들이 마약을 한다며 상담을 신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의사는 역할극을 시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뭘 못 해줘서 그렇게까지 아이가 망가졌는지 답답해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주눅 들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이제 역할을 바꿔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가 “내가 마약 중독자입니까?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식의 비난을 감당할 수 없었고 감당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 역할을 하면 자기 잘못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진짜 죄가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잘못을 드러내는 방식은 당신이 우리 죄 때문에 칼에 찔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죄를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4)

  

    한 소매치기 청년이 어떤 병원 앞에서 담배만 피우다 지하철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한 여인의 가방에서 돈 냄새를 맡아 소매치기하여 달아납니다. 얼마 뒤 그 소매치기의 남동생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전화가 옵니다. 형은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보려고 병원에 왔었던 것입니다.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동생의 말에 형은 돈 없으면 다 죽어야 하느냐고 분개합니다. 세상이 이 모양이니 자신이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한탄합니다. 동생은 어머니 수술비로 자신의 결혼자금까지 찾아오던 애인이 소매치기만 당하지 않았어도 어머니는 살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소매치기당한 시간과 장소는 정확히 자신이 소매치기 한 시간과 장소와 일치했습니다. 소매치기 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유리조각’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일화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우리 죄의 칼에 찔리심을 통해 우리 죄를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가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고치려 할 때는 그들의 죄를 들추어내고 지적질하고 나무라면서 고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실까요? 하십니다. 그러나 당신 들보, 곧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하십니다. 

    베드로의 예를 봅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적받은 베드로는 변했을까요? 안 변합니다. 언제 변했을까요? 정말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 찌르면서 변합니다. 어떤 죄도 그 죄 때문에 찔려 피를 흘린 누군가를 보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코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스승이 되려면 제자들의 죄 때문에 칼에 찔리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면 들보가 사라집니다. 그제야 그들의 티를 빼내 줄 수 있게 됩니다. 

 리더십과 팔로우십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7YKYgA-u2yo

 -조재형신부-

 

서품 31주년 동창 모임엘 다녀왔습니다원래는 서품 30주년에 만나기로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1년 연기했습니다동창들이 만나서 이야기하고걷고식사하는 것은 즐거움입니다동창 중에 한 명이 서품 10주년을 기념하면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21년 전의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그때는 다들 첫 본당 주임 사제가 되어서 열정과 꿈을 가지고 지냈습니다. 21년이 지난 지금 그때처럼 열정과 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다들 가을에 감이 빨갛게 익어가듯이 여유로워졌고서로에 대한 배려도 깊어졌습니다예전에는 먼가를 해야만 의미가 있고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지금은 그저 머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감사합니다서품 40년이 되면 모두들 사목의 일선에서는 물러나 있을 것입니다그때 누군가 서품 31주년 동창 모임 사진을 보여주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그리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때가 좋았지!’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세상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서품 40주년을 모임에서 동창들 모두가 바오로 사도처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돌아가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사목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였습니다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빵과 포도주를 나눠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이는 너희를 위해서 내어 줄 나의 몸이다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너희와 모든 이를 위해서 흘릴 나의 피다.” 신학교의 도서관 입구에도 모든 이의 모든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이 있었습니다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라는 의미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너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라다음에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높은 관직에 있을수록 더욱 몸가짐을 조심했다고 합니다가족들 또한 아버지의 관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고 합니다우리 신앙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이기적인 사랑에 머물러서는 하느님께로 나가기 어렵습니다먼저 나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루카 6,41)

 

그런데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관점, 태도, 사고방식의 틀(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바라보게 하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루카 6,42)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곧 ‘보여주는 대로’, ‘들려주는 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곧 사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정신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를 ‘위하여’(ùπερ), 그가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위하여 ‘호의와 자애’(헤세드)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주는 빛으로 보는 일, 곧 자신 안에 심어진 사랑의 빛을 밝히는 일입니다.

 

결국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보는 일, 곧 빛으로 보는 일이 ‘들보’를 몰아냅니다.

곧 용서하는 일, 사랑하는 일이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내고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루가 6,37)

 

결국 심판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그것을 '호의로 보는 것, 곧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은총이요 빛입니다.

결국 ‘들보’를 몰아내는 이는 내가 아니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루카 6,42)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 42)

-한상우신부-

우리 민족의
명절 추석이
시작되었다.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하는
기쁜 추석이길
기도드린다.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 삶의
원인을 정확히
찾아야 할 때이다.

정확한 원인을
알아야 정확한
치유책이 따라
나올 수 있다.

하느님 앞에서
철저히 반성하고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치유의 참된
걸음걸이이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가장 중요한 점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다.

먼저
우리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하느님을 드러내는
변화된 우리들 삶이
바로 복음의 삶이다.

내가 먼저
들보를 빼낼 때
내가 보고 있는
세상도 새롭게
따라 변화될 수 있다.

우리 존재의
참된 모습을
보는 것이
들보를 빼내는
아름답고 맑은
모습이다.

들보를 빼내는
본질적인 문제를
빠뜨리고서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강력한 생명력은
우리자신이 먼저
변화되는 건강한
실천력에 있다.

건강한 실천은
우리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신앙인들의 모습이다.

들보 하나를
빼내면
또 하나의
들보가
기다리고 있다.

깨끗해지는 믿음은
우리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들보를 빼내는
믿음이다.

믿음은 그냥
자라지 않는다.

반성과 쇄신
변화와 실천으로
우리는
건강하지 못한
구덩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반복하여 빠져드는
우리 삶의
구덩이에서
이제는 벗어나

건강한 삶을
나누고
건강한 마음을
나누는 우리들이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제대로 보는 것이
바르게
볼 수 있는 것이
겸손한 믿음이다.

겸손은 내가
먼저 올바르게
변화되는 삶이며
실천이다.

이제 해묵은
구덩이와
해묵은 만성
대들보에서
벗어날 때이다.

빼내어야 살 수 있고
벗어나야 제대로
볼 수 있는
삶의 소중한
기쁨을 더는
놓치지 말자.

말씀 나누기 - 연중 23주 금요일-나의 행복을 위해 너에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