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9월 10일 한가위

Margaret K 2022. 9. 9. 06:20

2022년 9월 10일 한가위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 12,15-21)

 

‘You fool, this night your life will be demanded of you;

and the things you have prepared,

to whom will they belo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고 한다(제1독서). 요한 사도는,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본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민족의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한가위에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쁨과 형제애를 나누는 것은 큰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과 조상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우리도 당신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라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복음은 아름다운 이론이나 추상적인 방법론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길입니다. 명절에 가족이 함께 모여 나누는 사랑은 신뢰를 쌓고, 소통을 통하여 이해와 깊은 유대를 형성합니다. 하상욱 시인은 가족을 ‘영어’ 같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게 표현이 잘 안 되기” 때문이랍니다. 또 때로는 ‘한국어’ 같다고도 합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참 모르겠기” 때문이랍니다. 우리 가족은 어떠한가요? ‘영어’ 같은가요? ‘한국어’ 같은가요? 우리가 마음으로 대화한다면 우리 가족은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나눔과 희생을 통한 사랑의 언어’와 같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이를 이웃과 나눔으로써,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풍요로운 한가위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의 마지막 날을 생각해 봅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 죽음 앞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하느님 덕분에 살아갑니다. 하느님과 이웃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사랑을 나눈다면 더욱 행복한 한가위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얼마 전에 글을 쓰다가 갑자기 꽉 막히는 기분을 체험했습니다. 이런 적이 이제껏 없었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느낌이었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옛날에 썼던 글들을 펼쳐보았습니다. 거의 20년 전에 썼던 글인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이것도 글이라고 인터넷에 자신 있게 올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글을 봐주신 신자분들에게 너무나 큰 감사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른 살이 막 넘었을 때의 ‘젊은 나’와 쉰 살이 넘은 ‘중년의 나’는 같은 ‘나’일까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전혀 다른 ‘나’입니다. 왜냐하면 외모, 능력, 성격…. 모두가 다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변하는 ‘나’입니다. 언젠가 책에서 보니, 우리의 유전자도 쏵 바뀐다고 하더군요.

과거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종종 만납니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라면서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과거의 나만 바라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며 후회하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나’도 나이지만, 현재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발전하는 ‘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발전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때로는 후퇴하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자신의 노력을 통해 충분히 변화되면서 더 나은 ‘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은 감사의 이유를 많이 찾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변화되었음에 감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이 한가위의 핵심 키워드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가족들이 모여서 먹고 즐기는 날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감사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코로나로 인해서 예전과 같이 명절 때의 만남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가위는 분명히 아래와 같은 감사의 마음을 갖도록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를 드리는 것,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 주기 위해 해마다 온갖 곡식과 과일을 제공해 주는 자연에 감사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하나 감사를 드리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즉, 내 삶의 목표를 똑바로 두고 있으며, 그 올바른 목표를 향해서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많다면 그만큼 자신의 변화를 이루며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일이 없다면 불평불만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으면서 자신의 변화도 이룰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라는 한가위입니다. 이 한가위를 잘 지내기 위해 특히 감사를 많이 외칠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미 죽은 자처럼, 지금까지의 생을 끝낸 사람처럼, 앞으로의 인생을 자연의 순리에 맞게 덤으로 받은 생인 듯 살지 않으면 안 된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중독되지 않기.

전철을 타면 책이나 신문 읽는 사람을 이제는 보기 힘듭니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보고 있지요. 뉴스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고, 재미있는 영상도 또 E-Book도 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시간이 나면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봤었습니다. 문제는 잠깐 보는 것이 아니라 꽤 많은 시간을 이 기계에 쓰게 되더군요.

스마트폰은 우리의 자투리 시간을 가져가는 일종의 시간 흡수기가 아닐까요? 심지어 자기 전에도 ‘무슨 새로운 뉴스가 있나?’라면서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 역시 이런 모습을 보이기에 아예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바꿔 놓고 보지 않았습니다. 괜히 불안한 마음이 밀려들기도 하고, 반드시 봐야 하는 어떤 정보를 놓칠 것만 같은 불안감도 생겼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중요한 정보가 없더군요.

코로나 예방 차원에서 자주 실내 공기 환기를 해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귀찮지만 건강을 위해서 필수입니다. 스마트폰에 매달리지 않는 날도 있어야 합니다.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필수입니다.

몸을 쓰지 않아 건강에 좋지 않고, 사회성도 떨어지고, 진짜의 나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신 건강에 안 좋은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그래서 창문을 자주 열어 공기를 환기하듯이, 자주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날을 자주 만들어 내 정신을 정화해야 합니다.

 한가위는 이렇게 묻는다: "돈 버는 이유가 뭔데?

-전삼용신부-

 

오늘은 한가위 명절입니다.

모든 것이 풍성한 때에 조상에게 감사하고 이웃과 나눌 줄 아는 마음을 키워주기 위해 모든 나라에 존재하는 추수감사절과 같은 명절입니다.    

 

    지금까지 돈을 벌기 위해 살았다면 이날 만큼은 나눔을 위해 살게 만든 조상들의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추석에도 감사하고 나눌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그냥 세상에 속한 사람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한 부자가 많은 수확을 하여 그것을 모아둘 커다란 곳간을 짓지만, 그날 그의 생명이 끝난다는 비유입니다. 탐욕과 생명, 혹은 죽음. 이것이 오늘 주제입니다. 

 

    ‘탐욕’도 하나의 ‘법’(法)입니다. 자신이 그 규칙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탐욕을 법으로 따르는 사람이 사는 곳은 ‘지옥’이란 나라입니다. 모든 나라는 법이 있고, 그래서 내가 어떤 법을 따르는지 알면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지전’(2011)은 백마고지 전투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내내 자신들끼리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싸우는 이유가 뭔데?”    

 

    줄거리는 대충 이렇습니다. 배경은 여러 차례 휴전협정이 결렬되는 시기였습니다. 장교였던 신하균은 높은 분 앞에서 그만 군인에 합당하지 않은 발언을 하여 그 벌로 전방으로 발령이 납니다. 전방의 악어 중대에 북한군과 내통하는 군인이 있으니 조사해 보라는 임무였습니다. 중대장이 죽은 사건이었는데 심지어 그 총이 아군의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신하균은 신임 중대장과 함께 악어 중대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같은 고지를 뺏고 뺏기는 전쟁에 지친 군사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이 전쟁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신하균은 전쟁의 실태를 눈으로 목격합니다. 금지된 약물을 투여하며 약의 기운으로 독하게 죽여대는 임시 중대장. 여자라 살려준 사람이 그 은혜와는 상관없이 한국군을 마구 죽여대는 북한군 저격수. 자기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즉결처분하려는 새로운 중대장. 그리고 휴전이 조인되고 그 휴전이 발휘되는 하루 동안 고지를 다시 점령해야 한다며 마지막 전투를 시키는 고위 간부 등...    

 

    그런데 이들과는 다른 전장에서 만난 친구, 고수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좀 특이했습니다. 알고 보니 북한군과 내통하는 군인이 바로 자기 친구였습니다. 내통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수는 전쟁판에서 유일하게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생명을 존중하는 이였습니다.

    그는 동료들과 후퇴할 때 막사에 땅을 파고 그들을 위한 초콜릿등 음식을 넣어놓습니다. 그리고 다시 탈환해 땅을 파보면 그들이 남한에 있는 자기 가족들에게 전해달라는 편지들이 있고 감사의 표시로 술도 들어있습니다. 전쟁터에서 나눔이 실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다른 사실은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오만한 중대장을 그가 죽인 것입니다.    

 

    고수는 군인으로서 나라의 배신자입니다. 신하균은 자신의 친구가 군법을 어기고 북한군과 먹을 것을 나누어 먹고 편지를 전해주고 심지어 동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아군 장교를 총으로 쏘는 것을 목격하고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러다 자기가 살려준 여자 저격수에게 친구가 살해되자 본인도 도대체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전쟁의 의미에 대해 다시 묻게 됩니다.

     

    이 영화를 보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성탄절을 맞아 그날 하룻밤만 휴전하며 성탄절을 즐기려 했다가 모두가 군법에 따라 처분된 실화가 생각나게 합니다.

     독일군 한 병사가 불렀던 크리스마스 캐럴은 자기 동료들을 죽였던 적군과 비무장 상태로 서로 포옹하고 보급품을 나누며 축제를 즐기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군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고지전’에서 고수는 저격수의 총에 맞아 죽어가며 신하균과 이렇게 대화를 나눕니다.

    “오지 마. 오면 너도 죽어. 가끔 그런 생각해? 난 아주 오래전에 죽었다는 생각. 우리 악어 중대 모두. 아주 오래전에 죽었다고. 그렇게 많이 죽여댔으니까 당연히 지옥에 가야 되는데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 없어서 그냥 여기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은표야, 우리 엄니 얼굴이 기억이 안 나.”

    

    여기서 북한군 간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죽어가는 그 앞에서 신하균은 묻습니다.

    “도대체 싸우는 이유가 뭔데?”

    “확실히 알고 있었어. 근데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어.”

신하균은 그 잔혹한 북한군 간부에게, 어쩌면 전쟁이란 명목으로 살인 기계들을 배출하는 북한과 남한 정부에 말하는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주저립니다.

    “개새끼!”

    

    이 전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지속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잠시 한가위를 맞아 이 전쟁에서 벗어나 어머니 얼굴도 떠올리고 서로 경쟁하던 사람들과 가진 것을 나누고 사랑의 캐롤을 부르며 지냅니다. 이 짧은 행복이 끝나면 다시 전쟁터로 나가 피조물의 법인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싸우겠지요.    

 

    탐욕이라는 법은 피조물 세계에서는 피할 수 없는 법입니다. 이 법은 생명을 경시하게 만들고 그래서 자기 생명도 지키지 못하게 만듭니다. 모두가 이 법의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눔의 법을 알려주러 오신 분이 계십니다.

    사랑의 법은 탐욕의 법과 반대입니다. 탐욕은 모으는 것이고 사랑은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눔의 법을 실천하면 이 세상에서는 군법에 넘겨지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매달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어떤 법을 따르느냐가 어떤 나라에 속하는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싸울까요? 그건 그 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속한다면 이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도 날마다 한가위처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피조물은 사라지지만 천국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탐욕은 피조물의 법이지만 사랑은 창조자의 법입니다. 생명을 창조한 분이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죽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매일 한가위처럼 나누는 사랑의 법을 실천하여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에 속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짧은 행복을 알게 하려고 나눔의 한가위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뉴욕에서 3번째 맞이하는 한가위입니다본당에 있을 때는 추석합동위령미사를 봉헌했습니다한지에 미사지향을 적어서 제대 앞에 놓았습니다조상들에게 드릴 음식도 차려놓았습니다향을 드리며 조상들에게 예를 올렸습니다강론은 본당에서 존경받는 어르신이 덕담을 해 주었습니다. ‘더도 말고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한 한가위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뉴욕의 둥근 달도한국의 둥근 달도 모두 같은 달이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온 세상에 가득하기에 이곳 뉴욕에서도 기쁨이 가득한 한가위를 보내려 합니다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고 안전하게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뉴스가 많았습니다역사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제국의 무덤이라고 불렸습니다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제국은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페르시아영국소련미국은 모두 막강한 힘을 가진 제국이었습니다그 나라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지만 결국은 물러나고 말았습니다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이 험준하고국민들의 저항이 컸기 때문입니다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서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은 19억 명이라고 합니다여성들에 대한 인권탄압과 성전이라는 이름의 테러는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주었습니다그러나 대부분의 이슬람은 평화를 사랑하고경건하게 기도하며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오늘 저는 1400년 전부터 우리 민족과 인연을 맺은 이슬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라비아나이트의 한국 편입니다.

 

이슬람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페르시아는 침략을 당하였습니다당시 페르시아의 왕자는 중국의 당나라로 피난을 갔습니다그러나 이슬람제국과 당나라가 외교를 맺으면서 페르시아 왕자는 당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결국 도착한 곳은 신라였습니다이 왕자는 신라의 공주와 결혼하였고페르시아의 군사적인 전략과 기술을 알려주었습니다신라는 이런 도움으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시간이 지나면서 페르시아 왕자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다시금 페르시아로 갔지만 더욱 막강해진 이슬람제국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어쩔 수 없이 낯선 땅에 정착하여 작은 나라를 세웠습니다페르시아의 왕자는 신라의 공주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고그 아들에게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었습니다그리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었습니다그 책이 최근에 발견되었다고 합니다그 책의 상당부분은 신라에 관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고려사절요에 쌍화점이라는 가요가 나옵니다여기서 쌍화점은 이슬람식 만두가게라고 합니다고려시대에 이슬람식 만두가게가 있을 정도로 이슬람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그런 이슬람이 조선시대에도 많았다고 합니다세종대왕이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이슬람의 문화를 우리의 것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세종대왕은 우리의 역법과 중국의 역법이 달라서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때 어려움이 많은 것을 알고신하들에게 조선의 상황에 맞는 역법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이에 집현전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역법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칠정산 외편입니다당시 집현전의 학자인 정인지가 중국으로 가서 이슬람역법을 연구하였습니다중국의 역법 또한 이슬람의 역법을 중국의 상황에 맞게 적용한 것이었다고 합니다문화와 문화가 만나서 조화를 이루면 새로운 문화의 꽃이 피게 됩니다그것이 세종대왕이 이룩한 문화의 꽃입니다.

 

한국의 지하철에는 대부분 한국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하지만 뉴욕의 지하철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습니다피부색도 다르고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합니다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곳뉴욕에서 첨단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한가위의 둥근 달이 모든 곳을 비추듯이우리가 서로를 인정하고받아들이면 그곳에서 사랑이 꽃 피울 것입니다사랑이 가득한 한가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느님께 삶의 최 우선권을 두는 사람입니다!

 -양승국신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 추석입니다. 나도 어렵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돌아봐야 하는 절기입니다. 시의적절하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관대한 나눔을 강조하십니다.

  

어리석음의 반의어는 지혜로움입니다. 학식을 갖춰 다방면에 걸쳐 유식한 것, 식별력이나 판단력이 출중한 사람도 지혜롭다고 하지만, 진정한 지혜는 좀 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인생에 있어서 보다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 무엇이 영원불변한 것이고, 무엇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인지를 잘 파악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느님께 삶의 최 우선권을 두는 사람입니다. 결국 지혜로운 사람은 재물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 재물을 하느님 위에 올려놓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여유 있는 재물을 주인이신 주님께로 돌려드리는 사람, 가난한 이웃들과 기쁘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서의 저자 솔로몬은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혜는 다정한 영, 사람에게 우호적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영입니다. 결국 지혜는 하느님의 영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에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조금 더 깊이 있게 다섯 가지 측면에 걸쳐 지혜를 소개합니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입니다. 지혜는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입니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입니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입니다. 지혜는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입니다. 

 

솔로몬은 살아생전 언제나 지혜를 추구했고 그리워했습니다. 지혜를 사랑했고 존중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지혜를 찬미했고, 지혜를 얻기 위해 간절히 하느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평생의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또한 솔로몬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지혜를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라고, 그래야 자신의 손에 맡겨진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고, 구원에로 이끌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서 7장에서 장엄한 어조로 지혜의 본성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솔로몬의 지혜 찬미’입니다. 그는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 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 없이 맑습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남은 인생 여정을 좀 더 지혜로운 사람,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명절의 의미를 기억하자                             

 -반영억신부-

 

[동양일보]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이 다가왔다.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날이 되어야 하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비대면 추석’을 권장하고 있다. 온 가족이 모이기 어려운 만큼 직접 벌초를 하는 이도 줄었고 벌초 대행 서비스를 이용하는 이가 늘었다. 지방자치단체가 추모공원을 폐쇄하고 성묘 등 방문을 제한함으로 온라인 차례상을 차리는 등 비대면 거리두기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느 지역에는 “아들, 딸, 며느리야! 이번 추석에는 고향에 안 와도 된다.” "불효자는 옵니다." 는 현수막이 붙기도 했다. 그래도 명절의 의미는 살아 있어야 한다.

명절은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날이다. 부모와 조상님들을 기억하고 이웃과의 나눔을 기억하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날이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부모와 이웃에 감사하고 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명절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은에 남다른 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부모에 대한 효의 실천은 세 가지 양상으로 생각하였다. 첫째가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잘 보전하여 후손에게 길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벼슬길에 올라서 부모의 이름을 드높여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고 공경하는 것이다. 특별히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고 효도함은 돌아가신 후에도 제사를 통해서 계속되었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생이 계속됨을 믿었고 살아계실 때와 같이 가족공동체와 계속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한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사는 죽은 이들을 계속 공경함으로써 효도를 이어가는 방법이며 결국 제사의 의의는 은혜를 갚음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톨릭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느님의 계명과 아무 마찰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부모님이나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고 예를 드리는 것은 신앙에 위배 되지 않는다. 이는 죄나 우상숭배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부모는 항상 가슴에 살아 계시다. 평상시 존경하는 분도 마찬가지다. 그분께 다양한 방법으로 예를 갖추는 것이 무슨 잘못이라는 말인가?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께서 ‘성균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게 되셨는데 매스컴은 추기경께서 과연 성균관의 예법에 따라 절을 할 것인가? 에 관심을 두었다. 그런데 추기경께서는 서슴없이 절을 하셨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갖추었다면 그게 우상숭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천주교는 제사문제로 박해를 받았다. 조상공경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우상숭배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조상제사를 철폐하였고, 이는 부모의 은덕을 망각하는 인륜을 저버린 짐승만도 못한 무리라고 하여 천주교신자는 죽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1939년 12월 8일에 이르러서야 교황청은 “조상의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닌 조상에게 효성을 표시하는 미풍양속이며 민족의 훌륭한 유산이므로 수용해야 하고 토착화해야 한다.”는 평가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아픔이 컸다.

조상과 부모, 이웃과 감사의 만남을 이뤄야 함에도 코로나19의 장기화는 만남을 단절시키고 있다. 씁쓸한 것은, 한 설문 조사의 결과인데 응답자의 77.3%가 “코로나19로 명절 스트레스 줄었다”고 답한 것이다. ‘안 봐도 될 이유가 생겨서 스트레스가 줄었단다.’ 가족, 친지의 잔소리, 개인사에 대한 지나친 관심, 용돈, 선물 등 경제적 지출의 부담도 있는 게 사실이다. ‘결혼은 언제 하니? 취업은 했니? 연봉은 얼마야? 스트레스를 주는 이는 가까운 가족이 되었다. 화목하고 평화로운 만남을 이뤄야 하는 명절에 스트레스가 많이 생기고 명절증후군이 생겼다는데 코로나가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니 아이러니하다. 그래도 코로나가 하루속히 종식되어 얼굴을 마주하고 감사의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감사할 것은 너무도 많다.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송영진신부-

 

집회서 저자는 인간의 허무함과 하느님의 자비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수명은 기껏 백 년이지만 영면의 시간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

바다의 물 한 방울과 모래 한 알처럼 인간의 수명은 영원의 날수 안에서

불과 몇 해일 뿐이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인내심을 보이시고

그들에게 당신 자비를 쏟으신다(집회 18,9-11).”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을 허무하지 않은 존재로 만들어 주는 힘입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쓸어 내시면’ 우리는 먼지처럼 사라질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면,

우리도 하느님처럼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저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마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잠언 27,1).”

“사람의 마음속에 많은 계획이 들어 있어도

이루어지는 것은 주님의 뜻뿐이다(잠언 19,21).”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잘난 체 하지 말고 ‘좋은 일’(주님의 일)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3-17).”

(여기서 ‘주님께서 원하시면’은, 뜻으로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또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허무한 존재라고 해서,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내일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단, 모든 것은, 즉 우리의 모든 계획들과 노력들은 주님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겸손하게 주님께 결과를 맡겨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계획하고 바란 대로 될 것이고,

허락하시지 않으면 일을 마치지 못하거나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을 감사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21).”

 

1) 하느님과 이웃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첫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2) 그의 마음속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없으니,

그는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또 이웃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없으니 이웃과 나누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재물을 혼자서 차지하고 있는 것이,

즉 ‘탐욕’이 그 부자의 두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3) 그는 ‘여러 해 동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오늘 밤에’ 그의 목숨을 되찾아 가시겠다고 예고하십니다.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의 세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지혜는,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4) 영혼 구원은 생각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은 그의 네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5) 하느님께서는 그의 목숨을 ‘되찾아’ 가시겠다고 표현하셨습니다.

되찾아 가신다는 표현은 하느님이 그의 목숨의 주인이시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잠시 그에게 맡겨 주신 목숨일 뿐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목숨을 포함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전부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그의 다섯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말씀의 뜻은, “아무도 차지하지 못한다.”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6)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시간은 몇 시간입니다.

그 몇 시간은 회개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말로만, 또는 생각으로만 하는 회개가 아니라,

사랑과 나눔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만일에 그가 회개하지 않고 그 몇 시간을 그냥 허비한다면,

그것은 그의 여섯 번째 어리석음이 될 것입니다.

 

7)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모으는 일에만 집착하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

그래서 결국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나는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다르다.” 라고 큰소리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특정인들만을 겨냥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어리석음을 성찰해야 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들’을 깨닫고 바로잡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복음: 루카 12,15-21: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조욱현신부-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일 년 동안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또한 우리에게 생명을 얻고, 생명의 길을 가도록 신앙을 전해주시고, 이 땅을 물려주신 조상들의, 또 친지들의 영혼들을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다.

 

우리 조상들은 오늘 추석을 지내면서 일 년 동안 제 때에 비를 주시고, 태양을 비추어주시어 오곡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주심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또 조상들의 은덕을 기억하면서 제사를 지내온 분들이다. 그리하여 이날은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술과 음식을 서로 나누며 지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고향을 찾아 부모님께로 많은 분이 가기도 했지만, 또한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이때를 기해서 자리를 함께 한 가족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그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더욱 가족들 간에 화목한 사랑의 성가정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이렇게 서로 가족들이 만나는 것은 기쁘고도 감사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도 언제나 감사드리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하루 동안의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고, 한 주간을 마치면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면서 감사드리고, 한 달을 감사하면서 지난날 모두를 감사드릴 수 있는, 그래서 오늘 추석,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더 잘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드리면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형제들, 은인들과 친척들 모두를 기억해 드릴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신앙 안에 우리의 모든 형제였던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일에 있어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고,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기로 하여야 하겠다.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바칠 수 있을 때,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면서 그 외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더불어 주실 것을 믿으며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모두 우리가 가진 바를 이웃과 나누며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다짐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쁨이 넘치는 한가위가 되도록 하자.

 

오늘 복음에서 이 부자가 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는가? 세상의 재물이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이다. 자기의 재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 그 순간에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영적으로 파산을 했다고 하셨으며, 하느님의 눈에는 그가 전혀 부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비극은 육체적 죽음보다도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재산은 무엇이건 좋은 것이다. 주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옛 성인은 재물이란 것이 ‘사용하는’데 있는 것이지, ‘소유하는’데 있지 않다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주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신 조상들과 부모 형제 친척 은인들이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시도록 기도하자. 또한, 지난 1년간의 모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지금 우리와 함께 제사를 봉헌하지 못하며, 이 기쁨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면 잠깐 머리 숙여 눈을 감고, 우리 공동체를 위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각자 기도드리면 좋겠다.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한상우신부-


가장
풍요로운
생명의
때이다.

우리의
가을은
봄과
여름 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생명의
질서이다.

처음으로
수확하는
햇곡식과
햇과일의
정성어린
계절이다.

마음의 고향은
언제나 은총의
하느님이시다.

은총은
따뜻한
인간미를
동반한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가르쳐주는
한가위의
명절이다.

힘든
현실안에서
맞이하는
한가위의
마음이다.

대자연의
신비를
바라본다.

자연의 선물은
거짓을 나누지
않는다.

진실된 나눔은
언제나
욕심을 배제한다.

탐욕을
경계한다.

생명에
감사하는
감사의
시간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한가위의
넉넉한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이다.

하느님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을
향한다.

사람의 마음은
인정이 넘치는
나눔의 마음이다.

나눔의 마음은
잘 익은
차례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한다.

하느님의
질서 안에
사람의 마음도
있다.

마음의 질서를
회복하는 넉넉한
한가위가 되길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
기도드린다.

마음이
생명이다.

마음을
나누기에
가장 좋은
한가위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들마다 각각의 수확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풍성한 결실을 선사하십니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
주님께서 "정의에 따라" 때에 맞춰 내려 주시는 가을비와 봄비로 세상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넘쳐흐릅니다. 그저 듣기만 해도 행복한 광경이 그려지네요.

이 세상에서 맺어지는 모든 결실은 인간의 손과 발품과 수고를 빌리기는 하나 결국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굶주리는 이 없이 모든 이가 영육으로 충만하고 흡족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 앞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이르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드릴 건 감사와 찬양입니다.

복음은 비유 속 부자의 수확 이야기입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루카 12,17)
예수님의 비유 속 어떤 부자는 그해에 원래 소유했던 곳간이 모자랄 정도의 엄청난 소출을 거둡니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수확에 놀란 그에게서 만물의 지배자이신 분을 향한 감사나 찬양은 드리지 않습니다. 그저 그는 이 많은 소출을 어떻게 저장하고 어떻게 누릴지에만 관심이 있지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
생명의 주인이신 분께서 당장 오늘 밤에 목숨을 거두어가실 줄도 모르는 그는, 마냥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에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재화를 온전히 자신의 힘이나 노력, 행운의 결과로 여기는 이들은 자신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도, 생명과 죽음의 인간 실존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이 없지요. 잠시 지날 이 지상에서 물질적으로는 두 손 가득 뭔가를 움켜쥐고 있지만, 어쩌면 그들의 하늘 나라 통장 잔고는 거의 0원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제2독서의 추수는 우리에 대한 주님의 수확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여기서 땅은 이 세상을, 한창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된 곡식은 우리 인류를 가리킵니다. 이 수확은 종말인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의 표상입니다.

농부가 잘 여물고 튼실하게 자란 열매들을 수확하며 기뻐하듯 주님도 이 지상에서 달릴 길을 다 달린 우리의 무르익은 영혼을 보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최대한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건만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이들의 쭉정이 같은 상태에 가슴 아파하실 테지요.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처럼, 그날에는 다 자라 구별이 확실하게 된 상태에서 가라지는 따로 거두어 불에 태우고, 밀은 주님의 곳간으로 모아들이게 될 겁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베푸신 풍성한 수확에 기뻐하고 감사하듯 우리를 수확하실 그분께도 그런 기쁨을 안겨드릴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비록 세상 재물은 그리 풍족히 누리지 못해도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이들, 그분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 사는 이들이라면 그분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세상을 떠난 조상들과, 서로서로를 성장시켜주는 부모, 형제자매, 친지, 지인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이 한가위는, 주님께서 맺어 주신 모든 영적 물적 결실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축복의 날입니다. 유한하고 나약한 인간인 우리 자신의 시작과 끝을 관상하며, 부족함 없이 돌봐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도 그분 때문에 흡족하고 그분도 우리 때문에 흡족해하시니, 함께 행복하고 충만한 명절 되시길 기도합니다.

  쌀 창고가 아니라 사랑 창고를 짓고 채우는 」

 -김찬선신부-

 

저는 지난 일을 잘 기억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제가 앞일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에

지난 일은 금세 잊어버리게 되는 현상이지요.

 

그런 저인데도 저도 나이를 먹는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줄어들고

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들과의 만남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래 영화를 잘 보지 않고, 새로운 영화는 더더욱 보지 않는데

가끔 지난 영화가 TV에 나오면 이 또한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보곤 합니다.

 

그래서 벤허도 봤고, 그저께는 쿼바디스도 봤는데

쿼바디스 장면 중에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의 뒤에서

"메멘또 모리/Memento Mori"를 외치는 장면이 눈에 탁 들어왔습니다.

 

지금 성취한 승리에 도취하지 말고 죽을 때를 기억하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보통 과거를 기억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미래 그것도 죽을 때가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즘 저에게는 큰 관건입니다.

제가 비록 미래지향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나이 먹을수록 미래보다는 과거를 먹고 살게 되는데

과거적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적 현재를 살아가야겠지요.

 

그런데 미래라는 것도 전처럼 새로운 일을 많이 벌이는 그런

가까운 의미에서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벌였던 일도 갈무리하는

그런 먼 의미에서 또는 제 인생의 끝으로서의 미래를 생각해야겠지요.

 

나바호족에게 이런 가르침이 있다고 합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한가위 명절에 왜 이런 얘기를 제가 할까요?

설 명절이 한 해의 시작에 우리 인생의 시작, 근원을 생각하는 명절이라면

한가위 명절은 한 해의 수확을 갈무리하는 시점에 단지 한 해의 갈무리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갈무리를 잘해야 함을 생각하는 명절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부자는 한 해 농사를 잘 지은 것 때문에

크게 만족하며 창고를 더 늘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쌀 창고가 아니라 사랑 창고를 짓고 채워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제가 그제도 얘기했지만, 우리의 최후가 단지 이 세상에서 끝나고 마는

끝이 아니라 천국에 닻을 내려야 하는 끝이라면 쌀 창고는

천국에서 아무 쓸모가 없고 사랑 창고만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쌀 수확이 아니라 인생 수확을 추구해야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곧, 인생의 끝이 가까울수록 내 인생의 끝에

나는 무엇을 많이 수확해야 하는지 성찰하며 살아야 하겠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망가지고 도난도 당하는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이것을 뒤집어 이해하면 쌀을 이 세상 창고에 쌓으면 똥이 되지만

하늘에 쌓으면 주님과 이웃을 위한 진정한 보물 곧 사랑이 되지요.

 

한가위 명절에 이런 얘기를 한 것은 어제 제가 아는 삼회원 한 분이

이 명절에 교통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 것 때문이었는데

그 교통 사고가 명절이면 오히려 외로운 그 지역분들에게

떡을 나누는 일을 하러 가다가 일어난 것이었다고 합니다.

 

제게도 충격이었으니 가족분들에게는 얼마나 충격일지 같이 마음 아프지만

돌아가신 분에게는 천국의 사랑 창고에 사랑 쌓는 일을 마지막까지 하다가

돌아가신 것이니 복된 죽음이라는 묵상도 하는 이번 한가위 명절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0월 1일 목요일 한가위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