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53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LK 6:1-5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가 6:1.5)
“Why are you doing what is unlawful on the sabbath?”
“The Son of Man is lord of the sabbat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에게,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받았으면서도 자신의 것인 양 자랑하는 모습을 반성하라고 훈계한다(제1독서).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몇 년 동안 사람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바로 마스크 때문입니다. 얼굴의 거의 절반을 가리다 보니 누구인지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읍내에 있는 빵집에 갔다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식빵을 사기 위해 이 집을 가끔 들리는데 사장님께서 “신부님이시죠?”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사제임을 쉽게 알 수 있는 로만칼라를 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반바지에 흰색 면티를 입고 있어서 겉모습만 보면 그냥 동네 아저씨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신부인지를 아셨는지, 혹시 성당에 다니시냐고 여쭈었습니다.
신자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지난번에 한번 로만칼라를 하고서 빵집에 왔던 것을 기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스크도 쓰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신부님 눈이 많이 처져 있어서 기억났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눈 하나만으로 저를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을 잘 기억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특징적인 것을 잘 관찰하고 기억한다고 합니다. 이 사장님께서 그런 분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의 전부를 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특징인 사랑으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주님을 알려고 합니다.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한 충돌이 일어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율법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때를 가리어 지켜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즉, 율법 자체가 절대적이 아니라, 특별한 상황이 있다면 관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손을 비벼 먹은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밀 두 이삭 이상을 따면 그것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추수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또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은 곡식을 타작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하긴 안식일에 떨어진 과일을 먹어서는 안 되었고, 과일이 떨어질 수 있으니 안식일에 나무에 올라가서도 안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난 계란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제자들의 행동에 대한 고발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잊어버린 것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법으로 사람을 잘 살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을 율법으로 얽어매서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알려면, 주님의 사랑만을 봐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을 보고서 주님을 알려고 한다면 잘못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예수님을 반대했던 종교 지도자들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죽을 때까지 속 좁은 노인이란 소리 안 듣는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wwSMv6hPcSE
“라떼는 말이야….” “요즘 애들 이해를 못 하겠어!” 등의 이런 말을 자주 한다면 그 사람은 속 좁은 노인일 확률이 다분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런 노인을 ‘꼰대’라는 용어로 비하합니다. 꼰대는 자신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만약 자녀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은 또 어린 꼰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자기 생각만이 다 맞는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그때그때 받아들여야 할 시대의 표징, 혹은 하느님의 뜻에 귀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꽉 막힌 어른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모가 되어보아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유튜브 채널 ‘달빛 부부’의 ‘12년 동안 가면을 쓰고 생활한 스티븐 연’의 내용입니다. 스티븐 연은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까지 오른 미국 영화계의 큰 인물이 된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하지만 그도 삶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너는 한국인답지 않다”라는 말을 듣고, 나가서는 미국인들에게 “너는 미국인답지 않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 동양인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 좋을 때여서 어쩔 수 없이 그는 밖에서는 미국인답게, 집에서는 한국인답게 생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워킹 데드’라고 하는 시리즈에 거의 주연급으로 많은 인기를 얻기까지는 동양인으로서 많은 차별을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나리’를 찍으면서 당시 이민 1세대의 고통을 그대로 연기에 녹아내며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되었습니다. 왜 그리 힘들게 일해야 했는지, 싸워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영화 시사회를 마치고 아버지는 스티브 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아들은 그동안 아버지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버지 품에 안겨 흐느꼈습니다. 아버지도 그러한 아들을 안고 울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꽉 막힌 근성을 나무라십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틀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맞추려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 5,33)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으면 부대가 터져서 헌 부대인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치 않는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8-39)
그렇다면 옛것은 다 나쁘다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것도 있고 변해야 할 것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변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은 변해야 하는지 아는 지혜입니다.
수십조 개에 이르는 인간의 세포는 7년이면 모두 새것으로 교체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이 변하면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죽어야 하는 세포가 죽지 않으면 암 덩이가 되어 인간이 죽습니다. 변할 것은 변해야 하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고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변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현재 지옥에 관하여, 혹은 십일조에 관하여 말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선악과는 꼭 바쳐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런 것들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변하고 있습니다. 성당에서 장궤틀도 사라지고 십자가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반면 너무 엄숙한 분위기의 미사는 변해야 합니다. 미사는 하느님을 만나는 혼인 잔치입니다. 그런데 너무 제사 분위기이고 형식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으로 돌아가는 느낌입니다. 형식은 철저히 지켜지지만 실상 미사 안에서 얻어야 하는 열매, 곧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믿음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가 죽어갑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임은 스티브 연처럼 그 역할을 수행해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입니다. 이 캐릭터를 소화하면 모든 인간을 이해해서 꼰대라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배역을 있는 그대로 연기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새로운 포도주이십니다. 그분은 유연성 없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 인류의 모델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삶이 그분 안에 스며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안은 성모 마리아께서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 아드님을 팔아넘긴 가리옷 유다도 이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안으신 십자가의 예수님 안에는 가리옷 유다의 수많은 죄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은 곧 모든 인류를 받아들임이고 이해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살게 됨으로써 우리는 내가 만날 모든 이들의 모습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누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루한 어른이 아닌 익어가는 어른이 됩니다.
섬김의 리더십, 섬김의 영성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rjY5nZtOw-Q
-조재형신부-
교통신호는 신호등과 수신호 중에 수신호가 우선권이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있거나, 공사 중인 경우에는 교통경찰이 수신호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교통신호등은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 대중교통을 검색했습니다. 차로 가면 주차료도 비싸고 워낙 교통이 막히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검색했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환승하는 역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지하철을 타니 환승하는 역이 한 정거장 차이가 났습니다. 인터넷을 믿고 내렸더니 환승하는 지하철이 없었습니다. 지금 지하철에서 안내하는 노선을 따라야 했습니다. 인터넷을 너무 믿었기 때문에 잘못 내리는 혼동이 있었습니다. 삶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긴급한 상황에서는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는 하인처럼 늘 깨어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슬기로운 처녀가 기름을 준비해서 신랑을 맞이했던 것처럼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깨어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22년 9월은 어떤 상황인가?’ 먼저 지구의 환경을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위기의 상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황님은 ‘하느님은 언제나 용서하시고,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 용서하지만 자연은 결코 용서하는 법이 없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지금처럼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면 지구는 곧 ‘임계점’에 다다를 것이라고 합니다. 지구는 계속 우리에게 더 이상의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을 하지 말라고 경고를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북극의 얼음이 녹고, 만년설이 녹으면 엄청난 자연재해가 발생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지금 북극의 얼음은 녹고 있습니다. 만년설도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유례가 없는 가뭄, 홍수, 무더위, 태풍을 겪고 있습니다.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지구의 기온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면 많은 대도시들이 물에 잠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지구에 머물며 잠시 지내고 가는 손님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생각합니다. 신앙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박해와 시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로 개종을 강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내적인 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소자의 감소입니다. 제가 있는 미국은 교회를 통합하고, 줄여야 하는 곳이 생기고 있습니다. 빈 교회가 늘어나고 있으며, 매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둘째는 급격한 고령화입니다. 저 출산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의 팬데믹을 겪으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 익숙해진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큰 교회는 유지가 되지만 작은 교회는 교회 운영에 어려움을 격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는 1990년도에 2000년대 복음화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복음화가 무엇인지 설명하였습니다. ‘소공동체 운동’을 도입하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교회는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매년 신축성당이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예비자들도 늘고 있었습니다. 교구에서 주도하는 2000년대 복음화 운동과 소공동체 운동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인이 된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1993년에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식으로 혁신을 강조한 ‘신경영 선언’, 2003년에는 ‘천재경영론’, 2010년에는 ‘위기론’, 취임 25주년인 2012년에는 ‘창조 경영’에 이르기까지 한국 경제사에 변곡점이 될 만한 혁신을 주도해 왔습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을 시작으로 삼성은 반도체, 스마트폰, TV 등의 분야에서 글로벌 1위에 올랐습니다. ‘타산지석’이라고 합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도 혁신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2022년 9월의 교회에도 혁신과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타이르려는 것입니다.”
동료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시선!
-양승국신부-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꿈꾸는 희망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의 정화입니다. 좀더 따뜻하고 낙관적인 시선, 활짝 열린 너그럽고 관대한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싶은 희망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희망사항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좁고 경직된 시선, 차갑고 비관적인 시선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딱딱하고 냉랭한 시선의 소유자들이 지니고 있는 특징이 한가지 있습니다.
꼬투리 잡기, 말꼬리 잡기, 비비 꼬인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기입니다. 그의 시선은 안타깝게도 상대의 작은 실수나 부족함을 잡아내고 지적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세상에 좋은 것들, 정말 아름다운 대상들, 고귀한 가치들이 정말 많은데, 그 소중한 것들을 모두 놓치고 팍팍하게 살아가니, 이
그 얼마나 울적하고 불행한 삶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이 꼭 그랬습니다. 그들은 꾸리꾸리하고 때묻고 남루한 자신들의 전통과 율법을 완전 파기시키고 등장하신 신선함의 끝판왕이신 예수님의 존재가 무척이나 껄끄러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 새 포도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실체를 도무지 인정할수도 수용할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뒷꽁무니를 살금살금 따라 다니면서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꼬투리 잡기요, 흠집내기요, 말꼬리 잡기였습니다.
안식일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에 어긋나는 일을 한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밀이삭을 왕창 뜯어다가 절구에 넣고 찟은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저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며 심심풀이 삼아 고작 밀 이삭 몇가닥을 뜯어 손으로 비벼먹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목격한 바리사이들은 기다렸다듯이 안식일 규정 위반이라고 외치며 설레발을 친 것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야말로 침소봉대요 확대해석의 끝판왕이 아닐수 없습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윗 사건까지 호출하시며 그들의 완고한 시선을 꾸짖으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제사빵을 먹지 않았느냐?'
보십시오. 절박한 상황 앞에서는 우선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메뉴얼이나 규칙, 율법이라 할지라도 한 인간의 생명 앞에 결코 우선시 될수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아닌 은총의 새 시대를 열어 가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곧 앞 장면에서는 단식논쟁을 통해 새로운 시대인 당신의 때를 알리시고, 오늘 복음의 안식일 노동을 통해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곧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라고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을 가로질러 가시고, 제자들은 '밀 이삭'을 뜯어 비벼먹습니다.
이는 그들을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참여시킴을 암시해줍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밀밭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2)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는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사실 그들이 트집잡은 것은 밭의 이삭을 뜯어먹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일을 했다고 해서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일’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제사 빵을 주었던 것처럼 이제 당신께서는 배고픈 제자들에게 아직 빵이 되지 않은 밀을 먹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곧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사실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
(탈출 23,12)
이처럼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주어진 날입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쉬는 것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은총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병렬 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태 12,7)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 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르코복음의 병렬 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카 6,5)
주님!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 5)
-한상우신부-
안식일의 본질은
사람의
참된 길이다.
사람의 길은
마음의 길이다.
우리 마음이
올바르면
안식일도
올바르다.
마음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
우리모두
사랑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사랑의 길은
안식일 율법에
사로잡혀
있지않다.
먼저
자기자신을
보는 깨어있는
사람으로 우리가
돌아서는 것이다.
깨어있는 사람은
깨어있는 사랑과
깨어있는 지혜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악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도 사랑을
실천하신다.
안식일의 탈을 쓰고
세속의 방식을 따르는
모순된 우리들
신앙이다.
참된 신앙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다.
사랑의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다.
다시 안식일의
주인에게서
사랑을 배운다.
안식일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랑의 일이다.
사랑을 위한
안식일이다.
아름다운
사랑의
안식일이다.
여기 안식일의
사람이 있다.
그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 받아야 할
사람이며
사랑을 실천해야 할
사랑의 사람들이다.
사람을 위한
안식일은
활짝 열려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2주 토요일-사랑으로도 우쭐대지 않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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