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31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
(루가 4,38-44)
I must proclaim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because for this purpose I have been sen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과 아폴로는 하느님의 일꾼이며 협력자고, 신자들은 하느님의 밭이며 건물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와 질병을 앓는 이들을 고쳐 주시고,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진작가 빅토리아 캐럴라인 홀텀(Victoria Caroline Haltom)에 한 여성 손님이 찾아와 부탁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아름다워진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요. 가능한 모든 곳을 보정해 주세요.”
이 여성 손님의 부탁대로 많은 부분을 보정해서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이 손님의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가 온 것입니다.
“당신은 내 아내의 결점을 쏵 없애 버렸습니다. 물론 아내가 부탁한 대로 했겠지요.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18년 동안 함께 쌓아온 삶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튼살을 지우며 아이들의 흔적이 사라졌고, 주름을 지우며 우리의 웃음과 근심도 사라졌죠. 찐 살을 지우며 그동안 우리가 먹은 맛있는 요리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깨달았습니다. 내가 아내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는 걸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변하기를 계속 요구하면서 사랑하지 못할 이유만을 만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전지전능하신 주님도 변하기를 바라는 우리입니다. 정의로우신 주님인데도, 나게 원하는 것을 모두 다 해주시기를 바라는 우리입니다. 자신에게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세상에서 제일 불공평한 주님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내게 고통과 시련이 찾아와도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의 사랑은 늘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린다는 말을 전하며,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찾아가 주기를 청합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지요. 율법에 따르면 병의 치료를 할 수 없는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습니다. 율법을 어긴 것일까요? 어기지 않은 것일까요? 의술을 드러내는 어떤 행동도 없었으니 율법을 어겼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신 것이지요. 말 한마디로 끝이었습니다.
하긴 악령을 쫓아내실 때도 말 한마디였고, 바다를 잠잠하게 하실 때도 말 한마디였으며, 무화과나무도 말 한마디로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천지창조를 하실 때, 하느님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한마디로 세상이 창조되었던 것처럼, 주님의 말씀 역시 창조력이 있는 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힘 있는 말씀으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이십니다. 단순히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주님을 멀리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힘 있는 말씀은 늘 사랑을 주시기 위해 쓰셨음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그 힘 있는 말씀을 굳게 믿으며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참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할 때 이것 회복에 집중하세요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BFDFQSIHr6Q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LA4m7q4dIHQ
-조재형신부-
축일이나 서품기념일에 축가로 부르는 성가 중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은 사명의 가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리다.” 멜로디는 비장하고 무겁습니다. 사명이란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신 길을 가겠다는 것 그 길이 멀고 험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를 보내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저도 사제서품 기념일에 성가대에서 이 성가를 불러주었습니다. 저는 제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사명에 대해서 2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사명을 가진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많은 이들이 사명을 이룬 후 겸손하지 않고 교만해져서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자신보다 더 존경 받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1등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기름을 부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씨를 뿌렸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기르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초대교회에 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바오로 사도는 겸손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너희들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준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 태어나신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둘째, 사명을 가진 사람은 선교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사명을 가진 사람이 가질 태도는 아닙니다. 철새는 가을이 오면 남쪽으로 내겨갈 준비를 합니다. 비록 지금 땅에 먹을 것이 있지만 곧 추운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새는 힘들고 먼 여행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서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하였습니다. 갈랠래아 호숫가에서 시작된 복음은 2000년이 지난 지금,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전해졌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티에서 선교하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길을 갈 때면 강도들을 만날 것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강도들이 거리를 활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신부님은 씩씩하게 아이티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베드로에게 있어 예수님은 휴대전화 내장 번호 No.1 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특히 ‘시몬의 장모’라는 표현을 접할 때마다, 저는 혼자서 속으로 낄낄대며 웃곤 합니다.
시몬의 장모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았을 당시 이미 기혼자였음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모님을 어머니처럼 모신 요한 사도는 독신이었음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장모님이 계셨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장인 어르신도 계셨을 터이고 슬하에 아들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베드로 사도만 바라보고 살아가던 부인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한 가정의 대들보요, 가장인 베드로가 어느 날 홀연히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니, 남아있던 가족들, 특히 장모님의 심정은 불을 보듯이 뻔했을 것입니다. 눈만 뜨면 사위 베드로를 원망하고 욕했을 것입니다. 수시로 미워하고 저주했을 것입니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이지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지? 한 가정의 가장이란 사람이 어떻게 생떼 같은 아이들, 자기만 바라보는 부인을 뿌리치고, 그렇게 떠날 수 있지?”
갑작스레 난감하게 된 딸의 신세에 눈떠도 고통, 눈감아도 고통, 삶 전체가 고통 덩어리였던 장모님은 머리를 싸매고 드러눕게 되고, 화병으로 인해 머리가 펄펄 끓을 지경이 된 것입니다. 계속되는 고열에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을 찾아오셨습니다. 타이밍이 절묘합니다.
자리에 누워있던 장모님은 가정파괴의 주범인 예수님이 나타나자 미운 마음에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렸을 것입니다. 너무도 속상했던 나머지 인사고 예의도 없이, 제발 빨리 내 눈앞에서 사라져달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예수님께서는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 열을 꾸짖으니 열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자 더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펄펄 끓는 고열로 인해 정신도 혼미하고 반죽음 상태였던 장모님이 즉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지체없이 주방으로 달려가 사위 베드로에게 하듯이 씨암탉을 잡고 상다리가 휠 정도로 맛있는 밥 한 상을 차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따지고보니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위해서 참으로 큰 포기를 하셨습니다. 그가 비록 흠결 많고 쉼 없이 흔들리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였지만, 예수님의 신원이랄까 정체를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탁월했습니다. 주님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난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자, 만물의 창조주 주님이심도 파악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세상의 여러 대상들 가운데 그분에게 최우선권을 부여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 예수님은 휴대전화 내장 번호 No.1 이었습니다.
이렇게 초지일관, 일편단심인 베드로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제자 중의 으뜸 수제자로 임명하셨고, 천국 문의 열쇠까지 그에게 맡겼습니다.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신 다음, '시몬의 집'(루카 4,38)에 가시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때와 뒤 장면에서 소리치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와 같이, 열을 '꾸짖으시어' 마치 마귀에게 하듯이 열을 몰아내십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은 마귀가 붙어서 병이 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둘째 부분은 '해질 무렵에'(루카 4,40), 곧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병을 고쳐주실 때는 '손을 얹으시고'(루카 4,40), 마귀를 쫓아내실 때는 '꾸짖으셨다'(루카 4,41)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병자들에게는 측은히 여기시지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루카 4,41)이라고 소리 지르는 마귀들은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한편,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막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카 4,41)
우리는 여기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니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알기에 배척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고, 그 아는 바를 믿고 그 믿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날이 새자'(루카 4,42), 곧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당신이 파견되어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나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43)
여기서,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임을 밝히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 사명을 바로 우리의 사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1고린 9,16) 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43)
주님!
제가 태어난 이유,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오늘, 제 뼈 속에 새긴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뜻을 증거 하는 일, 그 일을 하도록 제가 파견된 까닭입니다.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22주 수요일-성숙과 미성숙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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