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8월 30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2. 8. 30. 05:53

2022 8 30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명령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다 물러가지 않는가!”

하면서 서로 수군거렸다.

(루가 4,31-37)

 

They were all amazed and said to one another,
"What is there about his word?
For with authority and power he commands the unclean spirits,
and they come ou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몰아내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성사 본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 고백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죄 고백할 것도 없는데 왜 고해소에 들어오셨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사 보신 지 얼마나 되셨는데요?”라고 물으니, 석 달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자기 마음의 불편한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석 달 되었다는 말에, ‘얼마 안 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황님도 보름에 한 번 성사를 보신다고 하는데, 석 달이면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이 아닐까요? 사실 많은 이가(저 역시 여기에 예외가 아닙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갔으면서도 안 넘어간 척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1)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니까

2)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3) 아직 젊으니까

4) 이번 한 번뿐이니까

사실 마귀의 유혹은 우리가 방심하는 잠시의 틈을 타서도 불쑥불쑥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옵니다. 주님의 말씀 따라 항상 깨어 있지 않는다면 죄의 침범을 절대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점령되었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도 마귀는 힘을 잃고 도망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정답입니까? 거짓입니까? 당연히 정답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도 이 고백을 해서,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마귀가 이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따라서 더러운 영이 걸렸다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하면 사람들이 과연 믿을까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도 마귀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하면서 거리를 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시대에도 마귀를 쫓아내는 예식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예식은 주로 랍비들이 담당했는데, 그 시간이 아주 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 한마디 말로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귀의 유혹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마귀와 타협하지 않고, 주님 말씀만을 따라야 합니다.
소통의 답은 존중하는 마음에 있다(템플 그랜딘).

 이렇게 했더니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sIfroCDU56E

유튜브 채널 ‘책그림’에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한 오래된 동영상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다른 방향으로 뜁니다. 어떤 차를 보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이것만 보면 이 사람은 분명 도망자입니다. 옷도 그렇게 입었습니다. 그러다 어떤 신사의 멱살을 잡습니다. 분명히 그 사람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을 벽으로 밀어붙입니다. 이때 하늘에서 건축 자재들이 쏟아집니다. 이 사람은 사실 지나가다가 건축 자재가 쏟아지려고 하는 것을 보고 그 신사를 구해주려 급히 달려온 것입니다. 

    현실은 하나지만 그것 때문에 생기는 판단은 여럿이고 그것 때문에 생기는 감정도 시시각각으로 달라집니다. 처음엔 안 좋은 감정을 가졌던 사람에게 나중엔 감동하게 됩니다. 

  

    우리 감정은 어떻게 생길까요? 바로 ‘믿음’에 의해 생깁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감정이 다릅니다. 얼굴에 모반을 가지고 태어났고 또 한쪽 얼굴에 암까지 들었던 김희아 씨는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반면 내 안의 자아를 믿으면 그 자아가 하는 말을 믿게 되고 그러면 모든 것에 불만을 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루카 4,34)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어떤 감정으로 소리 지르는 게 옳은 일일까요?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 21,9)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왜 어떤 이들은 같은 예수님을 보고 기뻐 뛰지만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싫어할까요? 분명히 어떤 이들은 좋은 이득을 주시는 분으로 믿고 어떤 이들은 자기가 가진 무언가를 잃게 만드는 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죽이고 당신이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나’를 주인으로 섬기는 이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거부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를 버리고 싶은 이들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어려움 속에서 당신께 잘못하는 이들을 죽이고 싶은 심정까지 들 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십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들 곁으로 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

이 말씀으로 어머니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시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한 분으로 모든 서러움이 날아가고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음은 좋은 감정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감정은 ‘믿음’의 산물입니다. 연인을 태우고 배를 타고 물놀이하는데 다른 배가 내 배를 들이받아서 심하게 흔들렸다고 가정해봅시다. 멍청하게 배를 젓는 상대 때문에 화가 날 것입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그 배는 빈 배였습니다. 그냥 떠내려온 배였습니다. 그러면 ‘아, 내가 부주의해서 저 배를 보지 못했구나!’로 감정이 바뀝니다. 앞에서 화가 날 때의 감정은 ‘분명히 저 배에는 멍청한 놈이 타고 있어!’라는 자기 말을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을 믿으면 나쁜 감정이 솟아납니다. 하지만 자신을 믿지 않으면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믿어 모든 일에 감사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어린이가 사람을 톱으로 자르거나 통에 넣고 칼로 찌르는 마술을 본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매우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그 모든 것이 눈속임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저 ‘저걸 어떻게 했지?’라며 신기하기만 할 것입니다. 

    이렇게 감정은 믿음에 의해 생겨납니다. 나는 내 목소리를 믿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믿을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내 목소리를 믿으면 나쁜 감정에 사로잡혀 결국 남도 죽이고 나도 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것이 은총이 됨을 믿어 나도 살고 이웃도 삽니다.  

 

    기쁘지 않은 성인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지 않고 기쁜 감정으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악령은 ‘나를 믿게 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을 멸망시키러 오신 분으로 믿게 했습니다. 그래서 악령에 들린 사람은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이뤄집니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나를 주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악령이 되어갑니다. 

  

    더 늦기 전에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사랑합시다. 그러면 그분이 주인이 되시고 그분의 말씀을 믿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일에 감사한 감정이 생겨나고 그러면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나에게 사로잡힌 이들은 나쁜 감정으로 살면서도 좋은 감정으로 구원해주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감정에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나를 믿던지, 그리스도를 믿던지. 불만족과 불평으로 살든지, 기쁨과 감사로 살든지. 악령에 사로잡히든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든지 말입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XpS5REeda4I

 -조재형신부-

 

한국 교회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전직 목회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일종의 자기고백과 같은 이야기였습니다그분은 한국교회의 문제는 대부분 담임목사에게 있다고 하였습니다목사님의 설교가 복음 선포와는 거리가 먼 설교라고 하였습니다축복과 저주의 설교번영의 설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목사님의 설교가 시대의 표징을 잘 읽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목사님의 교회운영이 투명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교회의 재정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자식에게 교회와 교회의 재산을 물려주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목사님의 언행이 상식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목사님의 생활이 너무 사치스러운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자동차옷이 호화스러운 경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공동체가 분열되고가나안 신자가 늘어나고(가나안은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가 된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대부분 담임목사의 책임이 크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목사님이 수준이하인가?’라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전도사 시절 열심히 전도하였고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목사님이 된다고 합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목사님의 생활이삶이 변하게 된다고 합니다목사님은 특별한 존재라고 존경하는 것은 좋지만목사님은 예수님은 아닙니다마치 목사님을 예수님처럼 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모든 결정은 목사님이 내릴 수 있는 교회의 구조에도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결정기구에 덕망 있는 신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교회에는 정관이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정관에 따라서 목사님의 임기를 정하고교회에서 재신임’ 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그렇게 하면 목사님은 처음 가졌던 순수한 마음으로 목회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주어진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목사님은 대부분 재신임을 받고 목회를 계속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변하지 않는 제도견제 받지 않는 제도는 부패하기 마련이라는 말은 가톨릭 사제인 저에게도 타산지석이 되었습니다한국 가톨릭에 문제가 있다면 대부분 영적으로 눈이 먼 사제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기도에 소홀한 사제세상의 것들에 관심이 많은 사제재정에 투명하지 않는 사제성사를 성실하게 집전하지 않는 사제말과 행동이 상식적이지 않은 사제들이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강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악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맞습니다사제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기고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면 교회는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교회의 역사는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제안이 있다면 사목에 대한 키워드를 뽑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사목의 기간 동안 겸손희생인내열정화합이라는 키워드가 많이 있었다면 그렇게 평가하면 좋겠습니다사목의 기간 동안 독단독선상주의무 위반지나친 음주불성실이 많이 있었다면 이 또한 평가 되면 좋겠습니다좋은 평가를 받은 사목자들은 그에 합당한 곳에서 사목을 하면 좋겠습니다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사목자들은 재충전의 시간을 주면 좋겠습니다치유의 시간을 갖도록 배려하면 좋겠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평가를 하셨습니다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을 비판하셨습니다제자들에게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

 -이영근신부-

 

'희년 선포'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이 전하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는 어촌 ‘가파르나움 일지(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라 일컬어지는 있는 시작 부분입니다.

그것은 안식에 성전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었는데, 루카복음에 나오는 21개의 이적 중에 첫 번째의 이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과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의 ‘치유’를 통해서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은 이미 앞에서 ‘예수님 탄생 예고 장면’(1,32.35)과 ‘세례 방면’(3,22)에서 선포되었는데, 여기서는 마귀들의 입을 통해 선포됩니다(4,34.41).

 

그런데 목격자들이 놀란 것은 구마 치유가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곧 그분의 말씀의 권위였습니다.

권위 있는 한 마디 '말씀', 곧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라는 말씀에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 내동댕이쳤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습니다. (루카 4,35)

 

여기서 '한가운데'라는 부사는 우리를 하느님의 현존에로 데려다 줍니다.

이사야와 즈카리아 예언자는 말합니다.

“너희 한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는 위대하시다.”

(이사 22,6)

“정녕 이제 내가 가서, 너 한가운데 머무르리라.”

(즈카 2,14)

 

이미 예수님께서는 앞의 희년 선포 장면의 마지막 구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하시며 당신의 현존을 그들 가운데 드러내셨습니다.

사실 인간은 악마의 혀에 속아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고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곧 당신의 현존에로 회복시키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인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치유는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곧 희년 선포와 마찬가지로 원죄 이전의 에덴으로의 복귀를 드러내줍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은 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단지 악마를 쫓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이 나가지 않는가?”

(루카 4,36)

 

그렇습니다.

그들이 몹시 놀랐던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능과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권위(exusia)'라는 단어는 ‘힘’이란 뜻으로, 발설된 말씀이 말씀한대로 이루어지는 힘입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말씀'이 예수님의 신적 권능, 곧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구마자들과는 달리,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의 '말씀'으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을 빌어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을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힘으로 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루카 4,3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시고,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 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사오니 거룩함 안에서 제가 새로 나게 하시고,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22주 화요일-나의 영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9월 1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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