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8월 28일 연중 제22주일

Margaret K 2022. 8. 28. 06:11

2022 8 28일 연중 제22주일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루카 14,1.7-14)

 

When you are invited,
go and take the lowest pla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을 것이라 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가 나아간 곳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이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돈과 사치품, 외모, 권력 등 달성하기 어려운 욕망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것들을 이룬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질투심도 생기고 또 좌절감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행복해지려는 생각이었지만 전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에 답해보십시오.

“하루 중 언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하나같이 소소한 일상을 언급합니다. 성당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시간, 자녀와 함께 있는 시간, 산책, 음악감상, 맛있는 음식 먹기, 독서 등등…. 이때의 놀라운 점은 남과 전혀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행복할까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묻는 말이 자신에게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커다랗고 대단한 곳에 행복이 있지 않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우리의 겸손함에서 행복 찾기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고, 겸손한 삶을 강조하셨으며, 마지막 순간에서도 가장 겸손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는데, 우리는 과연 하느님을 따라 얼마나 겸손한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생활에서 식사 예절은 상당 엄격했습니다. 잔치가 크면 클수록 예절은 더 엄격해져서 식탁에 앉는 순서는 손님들의 지위나 신분에 따라 상하가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초대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보고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정해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과시에 몹시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잔치에 초대되면 최대한 윗자리에 앉고자 했습니다. 윗자리에 앉으면 많은 사람이 와서 인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품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발버둥 치며 탐욕을 부린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을 낮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위를 통해 순간의 만족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서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릴 수 있도록, 일상 안에서의 작은 행복에 감사하는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겸손함에서 나오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하느님으로부터 보답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물이 바다로 향하는 건 바다가 낭만적이거나 고향 같아서가 아니라 그저 낮아서다. 정을 느끼며 살고 싶다면 그대 바다처럼 낮아져라(이수동).

 그 사람 때문에 나를 잊어버리니 겸손하다 하더라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aU4zkAea5bc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식사를 초대받았는데 그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며 겸손에 대해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문제는 자기가 자신을 낮추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겸손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교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이 곧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해지는 방법으로 가난한 이들을 식사에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자신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늙은 마귀가 자기 조카 젊은 마귀에게 사람을 유혹하는 방법을 편지로 쓴 내용입니다. 이 중에서 겸손과 교만에 관한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겸손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곧 교만의 유혹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웜우드에게-

    <지난번 네 보고를 받고 제일 걱정되는 건, 환자가 처음 회심했을 때처럼 자신만만한 결심들을 남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듣자 하니 앞으로는 계속 선한 일만 하겠다는 약속도 펑펑 하지 않았더구나. 심지어 한 번 받은 은혜가 평생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매일 매시간 닥치는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매일 매순간에 해당되는 은혜만 바란다니! 상황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야, 네 환자는 겸손해졌다. 미덕이란 인간 스스로 그것을 가졌다고 의식하는 순간에 위력이 떨어지는 법인데, 겸손의 경우는 특히 더 그렇지. 환자의 심령이 진짜 가난해진 순간을 잘 포착해서 ‘세상에, 내가 이렇게 겸손해지다니!’ 하는 식의 만족감을 슬쩍 밀어 넣거라. 그러면 거의 그 즉시 교만-자신이 겸손해졌다는 교만-이 고개를 들 게야. 

  

    혹시라도 환자가 위험을 눈치채고 이 새로운 형태의 교만을 다잡으려 들거든, 이번엔 그런 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게 만들어라. 이런 식으로 하면 네가 원하는 많은 단계들로 나아갈 수가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써먹지는 마라. 혹시라도 환자의 유머감각과 균형감각이 깨어날 시에는, 너를 간단히 비웃고 잠자리에 들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너는 환자가 겸손의 진정한 목적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단다. 겸손이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성격에 대해 특정한 형태의 의견(즉, 낮은 평가)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라고. ‘겸손이란 내 재능의 가치를 내가 실제로 믿고 있는 수준보다 낮게 보려고 애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꼭꼭 박아주거라.

  

    실제로도 인간의 재능은 저들의 생각만큼 가치 있는 게 못 되지만, 그것은 중요한 점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어떤 자질에 대한 진실보다 평가를 더 중요시하게 함으로써, 미덕의 싹이 나타나는 족족 거짓과 가식의 요소를 그 중심에 주입하는 것이지. 이 방법을 통해 수천 명에 이르는 인간들이 ‘겸손이란 아름다운 여자가 스스로 못난이라고 믿으려고 애쓰며, 명석한 남자가 스스로 멍청이라고 믿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믿게 된단다.> 

 

    겸손은 낮은 위치에서 나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KBS에서 2000년 9월 5일에 방영된 ‘내 남편은 두 살 – 정신연령 2세 남편과 결혼하여 살게 된 김영숙 씨 사랑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김영숙 씨(42)는 30대 중반의 요셉이라는 남편과 함께 반지하 월세방에서 삽니다. 그런데 남편의 정신연령이 2세 수준이기에 텔레토비 인형을 좋아하고 밥을 제일 좋아합니다. 한 시도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요셉 씨는 몸은 성인이지만 말 그대로 아기이기 때문입니다.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김영숙 씨는 공부 잘하는 오빠만 챙기는 집안 분위기에서 항상 소외되고 매 맞는 아이였습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오셔서 아랫목을 차지해 윗목 추운 곳에서 쭈그리고 잠을 자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입이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그런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남자아이들은 괴롭힘 감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영숙 씨는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부모님께 선언합니다. 아버지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아 중풍이 왔습니다. 몸 한쪽이 마비된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허락해 주어서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녀원에서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수녀님을 보고 얼굴이 이상하다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김영숙 씨는 수녀원을 나와서 장애인들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소외되고 매 맞아 항상 얼굴에 상처가 있는 요셉에게 관심을 둡니다. 자기 처지와 같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요셉을 때리는 원장 때문에 김영숙 씨는 그냥 요셉 씨를 데리고 나와버립니다. 

 

    하지만 갈 데가 없었습니다. 직장을 얻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지만 두 살 어른을 데리고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이 배고프다며 발작을 일으켰고 도움을 청하러 간 사이에 요셉은 사라졌습니다. 김영숙 씨는 사방팔방으로 요셉을 찾아다녔고 한 시설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되돌아 나오는데 요셉이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매달립니다. 마음이 약해진 김영숙 씨는 요셉 씨를 데리고 다시 나옵니다.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조금이라도 얻으려면 혼인신고를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혼인신고를 하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또 쓰러지셨습니다. 하지만 김영숙 씨는 굳건히 요셉 씨와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요셉 씨는 얼굴이 많이 밝아졌고 이젠 장인어른을 업고 병원에 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김영숙 씨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겸손하여지려고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가장 가난한 사람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잊게 되어 겸손해진 것입니다. 아무리 겸손해지려고 노력한다고 두 살 지능밖에 안 되는 사람과 혼인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주위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합시다. 그들이 나에게 보답을 할 수 없기에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신데도 인간을 당신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란 생각을 잊으셨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담가버려야 합니다. 내가 죽고 사라질 때,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릅니다.

 초대받은 사람들, 초대해야 할 사람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HkYnhdSPcy0

 -조재형신부-

 

계란이 보통 계란보다 조금 커서 열어보니 쌍 란이었습니다신기하게도 10개의 계란이 모두 쌍 란이었습니다아침마다 쌍 란을 먹는 호사를 누렸습니다가톨릭평화신문 8월 14일 지면에 좋은 글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희망과 열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희망에는 닮은 듯 다른 이란성 쌍둥이가 있습니다바로 열망입니다희망과 열망은 다르지만 늘 함께 다닙니다열망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희망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도움에 의탁하는 마음입니다열망은 새로운 일을 기획할 때 기대감이 솟구쳐 오릅니다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아침기도를 하면서 살짝 설레기도 합니다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합니다그러나 하룻밤을 자고 난 후이러한 수많은 열망은 하나둘 무너집니다이것도 저것도 원하는 대로 잘되지 않습니다바라고 또 바라지만 결국 현실은 이를 허용해 주지 않았다는 원망과 분노가 올라오기도 합니다열망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시들어 사라질 수 있습니다사라진 열망으로 인해 마음 속 작은 틈 사이에서 실망과 좌절분노의 기운이 올라옵니다.

 

열망은 온전히 나의 것입니다내 능력과 힘으로 뭔가를 이루려는 갈망에서 온 것입니다그래서 고요함이 무너지고 불안해 집니다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자신을 질책하기도 합니다열망은 온전히 내가 주인이기에 잘 안되면 내 탓이라는 자책과 네 탓이라는 원망 사이를 오가면서 우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그러나 희망은 다릅니다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박해의 칼날이 서슬 퍼런 가운데서도 용감하게 수천수만 리를 걷고 또 걸어서 목적한 바를 이루었습니다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닌데 수많은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며 헤쳐 나갔습니다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희망은 누군가의 도움을 신뢰하는 것이며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어둠의 터널에서도 희망은 유효합니다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희망의 너머에는 늘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비록 당장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평온 할 수 있었습니다교우들을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열망이 없는 희망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열망 없이 희망만 하려는 사람은 겁쟁이고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또한 희망 없이 열망하는 사람은 성급하고 무례하며 교만할 수 있습니다자신의 힘에 기대는 열망은 행동의 에너지이며 활력입니다그러므로 열망이 없는 희망은 가다가 지치면 현실을 잊고 책임을 회피하게 됩니다반면에 희망이 없는 열망은 뜻대로 안 될 때 쉽게 분노와 울분의 나락에 빠지기도 합니다열망이 있어야 자신을 믿고 행동하며희망을 할 때 이웃과 세상을 만나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기대게 됩니다희망은 열망 때문에 용감하게 바라고열망은 희망에 의하여 겸손한 바람으로 변화됩니다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은 희망과 같습니다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알려줍니다자동차의 기름은 열망과 같습니다아무리 내비게이션이 좋아도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마치 새는 좌와 우의 날개를 펴서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희망과 열망이 손을 잡는다면 우리 삶은 많은 결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겸손을 이야기합니다높아질수록 더 욱 낮추라고 합니다그러면 주님께 사랑을 받으리라고 이야기합니다예수님께서는 겸손과 더불어 나눔을 이야기하십니다가난한 이들에게아픈 이들에게 나누라고 하십니다비록 그들은 되갚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다고 이야기하십니다겸손희망열망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희망은 자동차의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열망은 자동차의 기름과 같습니다겸손은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바퀴와 같습니다어느덧 8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가을이 시작되는 9월을 기다리며 겸손희망열망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좋겠습니다.

 겸손이 생략된 신앙, 겸손이 사라진 기도, 겸손이 결여된 권력처럼 위험한 것은 다시 또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이 이웃사랑의 실천과 봉사를 위한 자리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이, 뭐라도 되는 양,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거들먹거리며,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대놓고 무시하며, 자기 잘난 맛에 푹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봐주기 힘든 꼴불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자꾸만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 올려놓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위태위태한 심정으로 바라봅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내려오기 힘들고, 떨어질 때 충격이 엄청날 텐데...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와 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습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 총애를 받으리라.”(집회서 3장 18절)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복음 14장 11절)

  

요즘 저는 이제야 좀 철이 드는지, 예수님의 삶과 그분의 메시지를 아주 쪼금 이해하며, 어떻게 하면 끝자리, 낮은 자리에 앉아볼까 늘 고민하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고 넉넉해지는지 모릅니다. 가장 낮은 밑바닥에 있으니 가끔씩 넘어져도 상처나 충격이 훨씬 덜합니다. 낮은 자리가 주는 축복과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겸손은 모든 덕행의 최고봉이자 기초입니다. 다른 덕들은 겸손의 덕이란 기초 위에 건설됩니다. 겸손이 생략된 신앙, 겸손이 사라진 기도, 겸손이 결여된 권력처럼 위험한 것은 다시 또 없습니다. 겸손은 천국 문을 열수 있는 열쇠입니다. 

 

탁월한 인품을 갖춘 분으로서 학자로서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존경하는 교수님께 한 제자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답니다. 

 

“스승님,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느끼신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그 겸손하고 훌륭한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은 내가 큰 죄인이라는 깨달음, 그리고 이런 큰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해주신다는 깨달음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나야 나! 나 정도 되면 괜찮은 거 아니야? 나 말고 누가 있겠어? 그거 내가 다 했어!” 이렇게 겸손이 사라진 우리에게서 하느님께서도 떠나가십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 내가 가장 큰 죄인입니다. 나처럼 보잘것없는 존재도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우리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펼쳐나가십니다

-정용진신부-

 

기원후 2세기 무렵의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태양계 모델을 제시합니다.

이른바 천동설입니다.

그리고 약 1400년 뒤에 또 다른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을 뒤집습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반대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지동설입니다.

코페르니쿠스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관념을 뒤집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당신 삶의 중심이 누구인가당신인가 아니면 하느님인가?’

또는 당신은 다른 이들을 다스리며 살아가는가아니면 당신이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에 살고 싶은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따르는 이들은 내가 우주의 중심이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자 합니다.

자신은 선하고 자신의 판단은 올바르다고 여기며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합니다.

반면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따르는 이들은 이와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주의 중심이시고, ‘예수님께서 나의 중심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삶의 식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모시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의 자리는 끝자리입니다.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곳에서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만나며 하느님과 같은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살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은 초대(招待)”라는 단어입니다.

무려 아홉 번이나 되풀이됩니다이 단어의 성경 원어는 칼레오’, 곧 부르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부름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첫자리가 아니라 끝자리로 부르셨음을 기억합시다.

말씀 나누기 - 연중 제22주일-하느님이 높여주시도록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9월 1일 연중 제22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