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마태오 25,1-13)
The foolish ones, when taking their lamps,
brought no oil with them,
but the wise brought flasks of oil with their lamp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유하시며,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도박하는 사람의 승률은 얼마나 될까요? 실력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아마 도박에서 이기는 사람보다 지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 도박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본전 생각과 막연한 희망 때문입니다. 본전까지만 찾으면 그만하겠다고 하지만, 본전 찾기 전에 패가망신 당하고 말지요. 또 본전을 찾아도 더 딸 것이라는 잘못된 희망에 매달려서 쫄딱 망하고 맙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분은 절대로 도박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이런 도박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돈이 아닌 시간을 가지고 하는 도박입니다.
“돈에 여유가 생기면 봉사할 거야.”, “시간이 나면 성당에 열심히 다닐 거야.” “은퇴하면 가족과 열심히 함께할 거야.” 등등 우리는 막연히 시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지금 하지 않고 뒤로 미룹니다. 시간을 가지고 도박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되찾을 수 없는 돈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거의 100%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에 대해서 도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 나중에’라는 말로 지금을 소홀히 한다면, 큰 후회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미루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자주 말씀하셨지요. 특히 깨어 기다리라는 교훈을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확실한 이해를 위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열 처녀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는 야단스러울 만치 온 동네가 함께 기뻐합니다. 혼인 며칠 전부터 밤에 횃불을 밝히고 춤과 노래로 밤을 지새웁니다. 신랑이 자기 집에서 친구들과 잔치를 벌이고 혼인날 저녁에 신부 집을 찾아가 결혼합니다. 그래서 언제 올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신랑 집의 잔치가 끝나야만 신부 집에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신랑이 제때 오지 못하고 꽤 늦어졌다는 것입니다. 신부 측 들러리들은 신랑 측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들고 기다리는데, 이 등은 약 15분가량 있으면 꺼집니다. 그래서 신랑이 올 때를 잘 맞추든가 여유의 기름을 준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할 일에 늘 대비하는 성실한 사람과 그저 그때를 안일하게 넘기는 게으른 사람으로 나뉩니다.
성실한 사람은 잔치에 들어가고 게으른 사람은 문을 두드리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성실히 주님의 나라를 준비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나라가 아직 오려면 멀었다면 게으르고 불성실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큰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8개월 시한부 선고받고 바뀐 인생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hWtVKZMLzPo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티는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안효정 간호사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러 경우를 보았다고 합니다. 한 어르신은 폐렴으로 오랜 병상 생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분에게 다녀가시는 분이 없었다고 합니다. 젊으셨을 때 가족에게 그렇게 못되게 해서입니다. 상태는 돌아가실 수밖에 없는데 버티고 계시는 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안 간호사는 청력은 살아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귀에 대고 크게 “할아버지, 부인이 보고 싶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눈을 뜨시더니 두 번 깜빡이더라는 것입니다. 안 간호사는 수소문하여 부인과 자녀들을 찾아 다녀가게 하였습니다. 부인이 그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내가 다 용서할 테니 편안히 가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고는 바로 임종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분은 90세가 넘은 할아버지셨습니다. 가끔 친지들과 지인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거의 산 송장처럼 30년을 병원에서 지내고 계셨다고 합니다. 간호사들은 자녀들이 다녀가지 않은 것을 알고는 연락이 끊긴 미국에 사는 아들에게 연락해 다녀가게 하였습니다. 2주 만에 아들이 다녀갔고 한 시간도 채 안 되어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죽음 직전에야 무엇이 부족한지 알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리 준비되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끝까지 그런 준비가 필요 없다고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불교 신자였던 이지은 씨는 말기암으로 투병하는 남편을 보살피며 병원에서 함께 입원하였던 다른 암환자들의 임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언가를 목격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남편과 함께 입원하고 있던 그 환자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내의 이름은 정자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눈의 실핏줄이 다 터져서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고 있었고 몸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있어서 천만 하나 덮어놓은 상태였으며 온몸의 땀구멍에서 소변이 빠져나와 주위에서 소변 냄새가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분의 아내와 밖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도 못 하던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불렀다는 것입니다.
“정자야, 정자야! 무서워, 정자야!”
그리고 그 아내의 목을 팔로 두르더니 “나 무서워서 혼자 못 가, 함께 가자!”라고 하며 놓아주지 않더랍니다.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이지은 씨는 갖은 방법을 써서 아내를 그 남편으로부터 떼어놓았습니다. 계속 그런 두려움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자기 남편의 귀를 막아주어야 했습니다. 보통 심박수가 30이하로 떨어지면 사망하는데 그분은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사흘이나 버텼다고 합니다.
이것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지은 씨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그 사람처럼 죽지 않으려는 마음만 있었습니다. 남편은 도박과 외도 등으로 빚을 잔뜩 지고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환자처럼 남편도 아내를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위에 무서운 사람들이 둘러섰다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남편의 눈은 처음 보는 공포에 질린 눈이었습니다. 이지은 씨는 불교 신자였음에도 ‘이 사람 지옥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병원이기에 무조건 사람들을 불러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언니에게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가시기 2주 전에 그분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반을 굶어 뼈만 남았고 온몸이 돌처럼 굳어있었는데도 맥박 30이 되었을 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셨습니다.
[출처: ‘말기암 임종 환자들의 죽음을 보며 겪은 충격적인 사실’, 유튜브 채널, ‘아빠품안에’]
오늘 복음에는 현명한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이 나옵니다.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무언가를 준비했다면 현명한 처녀들이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미련한 처녀들입니다. 누구에게나 오는 이 죽음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죽음 앞에 가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저는 할머니의 죽음으로 지금까지 죽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묵상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본 장례미사 중 가장 많은 신자가 참석한 미사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유학하며 한 동네에서 행해진 장례식입니다. 마체라타라는 곳의 500년 된 커다란 성당에서 행해진 장례미사였습니다. 보통 주일 교중미사보다 그 장례미사에 다섯 배 정도의 하객이 들어찼습니다. 당시 한여름이었고 기온이 40도 정도였습니다. 성당에는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시장님부터 시작하여 동네 사람들이 모두 이 미사에 참례한 느낌이었습니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성당에 빼곡히 사람들이 서 있었고 문을 열어 밖의 뙤약볕 아래도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공동묘지까지 행렬을 하는데 그 더운 날씨에도 아무도 떠나지 않고 마을을 가로질러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날 장례를 치르는 분은 성직자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여자 신자였습니다. 3년 전에 암으로 시한부 3개월을 선고받은 자매였습니다. 그 자매도 평소에 하.사.시.를 읽었다고 합니다. 시한부를 선고받고는 자신의 집에 신자들을 초대하여 성경을 읽고 생활 나누기를 하였고 늘 하던 대로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 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자매는 길을 지나가다 마주치면 언제나 먼저 달려와 인사하였고 신앙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저도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찾아가 인사를 드렸는데, 저는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그분은 저를 알아보고 찾아와주어서 고맙다며 천사의 미소를 보내셨습니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아내가 돌아가시기 2~3일을 제외하곤 3년 동안 기적적으로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렇게 3년 동안 가진 것을 다 주며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 은인이 되었기에 마을 사람들이 다 그 장례미사에 참례하여 그분이 가는 길에 함께 한 것입니다.
자매님은 특별한 삶을 산 것도 아닌데 시한부를 선고받고는 더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 안에서 탐욕과 무절제와 같은 안 좋은 욕망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며 방탕한 삶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 앞에 나아가는 데 기름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자매는 기름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일 수 있고 죽고 나면 그리스도를 심판관으로 만나야 함을 되새긴다면 내 마음 안의 기름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아쉬움 없이 행복하게 살았노라 말할 수 있습니까? 미소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기름이 가득 찬 등잔을 들고 계신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bFZp4x5Yols
-조재형신부-
하루사이에 부고를 두 번 들었습니다. 여행사를 하시는 형제님의 아들이 밤사이 심장마비로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젊은이가 꿈을 다 펴지 못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부모님의 상실은 어찌 말로 표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젊은 청년이 주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세상을 떠난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부모가 슬픔을 딛고 힘을 내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내년에 부제품을 받는 형제님의 장모님이 가슴이 답답하여 병원엘 갔지만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일주일에 3번씩 투석을 하였던 어르신입니다. 자식들에게는 큰 슬픔이지만 어르신께서는 이제 투석이 없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리라 믿습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Hodie mihi, Cras tibi)”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의 문을 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0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0처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모두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등잔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름은 그 시간과 공간에 채워야 하는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빌려올 수도 없고, 나의 것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 주어라. 누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까지 내 주어라.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이런 삶은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은 타인에게 빌려 올 수 없습니다. 공기가 있어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 그냥 우리가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삶 또한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빌릴 수 없습니다. 물이 있어서 마시는 것처럼 우리가 행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참된 신앙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불빛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은 성찰이 부족하면 쇠락하기 마련입니다!
-양승국신부-
낮잠 한잠 자고 나니 늙은이가 되어 있었노라는 옛이야기에 깊이 공감합니다. 어찌 세월은 이리도 속절없이 빠른지요?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요, 생각은 유년인데, 나이를 생각하면 끔찍할 정도입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어간다는 것은, 하느님 대전에 나아갈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 어떤 영혼의 상태로, 하느님께 드릴 어떤 선물을 들고 그분께 나아갈 것인가? 더 자주 생각해야겠습니다.
늦여름 바닷가 석양은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노년, 하느님 앞으로 나아갈 우리의 마지막 순간도 저리 황홀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조만간 반드시 다가올 그 순간, 그토록 고대해왔던 하느님을 우리 눈으로 직접 만나 뵙는 순간, 우리 영혼의 등잔은 어떤 상태일지 늘 생각하며 살아갈 일입니다.
후회 없이 충만한 삶과 아낌없는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넉넉히 등잔 속 기름을 준비한 사람의 그 날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반대로 그저 자기 한목숨 부지하느라 아웅다웅했던 사람, 영혼의 성장이나 이웃 사랑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 하느님 앞에 내어놓을 게 하나도 없는 사람, 즉 등잔이 텅텅 빈 사람의 그 날은 참으로 울적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처럼 그날은 예고없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맑은 정신, 열린 마음으로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25장 13절)
진정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만 시선을 두지 않고 이 세상 너머의 또 다른 세상, 영적인 세상,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얼굴을 찾음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며,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 자신에 대한 사랑, 하느님의 모상인 이웃들에 대한 사랑...
우리 영혼은 성찰이 부족하면 쇠락하기 마련입니다. 오늘의 나에 결코 만족하지 말고 부단히 나를 돌아보고, 나를 갈고 닦으며, 이웃을 살펴보고, 세상을 직시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가는 노력이야말로 깨어 있음의 중요한 표현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이영근신부-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고 올리브 산으로 가시자, 제자들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태 24,3)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마태 24,4) 하시면서, ‘가장 큰 재난’(마태 24,15-26)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마태 24,29-31)에 대해 말씀하시고, ‘도적의 비유’(마태 24,42-44)를 통해 ‘깨어있음’과 ‘준비함’을 명령하시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이요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를 밝혀주시기 위해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탈렌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는 혼인잔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열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입니다.
신부는 당연히 신랑께 깨어 있어야 하고, 신랑을 고대하고 기다림으로 준비합니다.
왜냐하면 신랑이 오면 마중 나가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마중 나갈 뿐 아니라 신랑이 자신을 잘 찾아오도록 ‘등’을 밝혀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등’을 밝혀 들기 위해서는 ‘기름’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이가 바로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준비해야 할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일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등’을 ‘선행’으로, 등에 불을 타오르게 하는 ‘기름’을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의 ‘세상의 빛과 소금’의 가르침에서 말씀하십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5-16)
그러니 ‘등’은 ‘착한 행실’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등을 밝히는 데 꼭 필요한 ‘기름’은 ‘신랑에 대한 사랑’, 곧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자세’이며, 성령의 기름부음에 도유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습니다.(마태 25,6)
여기서 '한밤중'은 가장 예기치 않은 때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등불을 챙겼습니다. (마태 25,6-7)
여기서 ‘챙기다’(코스메오, κοσμεω)는 ‘심지를 자르다’라는 뜻으로, 다 타버린 심지 끝을 잘라서 그을음이 나지 않고 환하게 타오르도록 정돈하는 행동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곧 불꽃이 잘 타오르도록, 그래서 환하게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 심지가 기름에 닿아 있는지 기름은 충분한지 그리고 심지가 타버리지는 않았는지 보고 잘라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기름에 몸을 담그고 있는지, 성령에 젖어 있는지, 그 사랑의 기름에 도유되어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신랑이신 주님’께 깨어 있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인 사랑의 착한 행실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나는 ‘슬기로운 처녀’인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마태 7,26)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깨어 있어라.”
(마태 25,13)
주님!
눈을 부릅뜨고 깨어 있되 신랑인 당신을 향해 깨어 있게 하소서.
당신을 희망하고 기다리며 더더욱 갈망하게 하소서.
빛 속에서 은총을 볼 줄 알게 하시고, 그 은총이 얼마나 큰지 경이로워하고 놀라워할 줄 알게 하소서.
사랑의 등불을 켜들고 임을 보게 하소서.
임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에 깨어 있게 하시고, 당신 사랑에 기름칠 되게 하소서.
아멘.
『열 처녀의 비유』
-송영진신부-
“그때에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1-4).”
여기서 ‘열 처녀’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이고,
‘신랑’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열 처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 또는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을 가리킵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맞이할 준비를 하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비유 속에서 ‘열 처녀’는 신부가 아니라 ‘신부의 들러리’(친구들)입니다.
신부는 비유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신부’ 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들러리’로 설정하셨을까?
만일에 ‘신부’로 설정하면, 신랑이 혼인잔치에 들어가면서 신부를 밖에 둔 채
문을 잠가버리는 상황 설정이(10절-11절) 이상해집니다.
(신부 없이는 결혼식도, 혼인잔치도 안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들러리’는 열 명 가운데 다섯 명이 없더라도
결혼식과 혼인잔치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존재가 ‘들러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신앙인은) ‘들러리’ 같은 존재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들러리’로 설정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남의 신앙생활을
구경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들러리’로 전락하는 일이 됩니다.>
‘어리석다.’ 라는 말과 ‘슬기롭다.’ 라는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6).”
따라서 어리석은 처녀들이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실행하지는 않는 것을 뜻하고,
슬기로운 처녀들이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등’에 초점을 맞추면, 기름이 없어서 불을 켤 수 없는 ‘등’은,
또는 기름이 떨어져서 불이 꺼져 가고 있는 ‘등’은,
쓸모가 없어서 밖에 버려야 하는
‘제 맛을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마태 5,13).
반대로 기름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서 불이 꺼지지 않는 ‘등’은
사람들 앞을 환하게 비추어서 주님에게로 인도하고,
그 자신도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마태 5,16).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25,7-9).”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 주기를 거절하는 것은
‘신앙생활’과 ‘회개’는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고,
회개하라고 권고할 수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보속’을 대신 해 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그 기도와 권고와 보속은 ‘사랑 실천’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과 회개 자체는 대신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과 구원과 회개는 무임승차가 허용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0-13).”
‘최후의 심판’은 글자 그대로 ‘최후’의 심판입니다.
재심의 기회도 없고, 취소되거나 번복되지도 않습니다.
비유의 내용만 보면, 어리석은 처녀들이 늦게 온 것은 기름을 사러 갔기
때문이고, 그저 ‘슬기로움’이 조금 모자랐던 것뿐이니 정상참작을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이것은 비유일 뿐입니다.
실제 최후의 심판 상황에서는,
늦게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13-15).”
최후의 심판이 끝나면 ‘문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고 ‘문 밖에’ 있는 세상은 전부 다 소멸됩니다.
지옥도 소멸됩니다. ‘문 밖’이라는 공간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니 늦게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는 상황 자체가 없습니다.
아마도 소멸되기 직전의 짧은 순간 동안 후회를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것입니다.
(어쩌면 후회할 시간조차 없을지도 모릅니다.)
‘열 처녀의 비유’의 가르침은 간단합니다.
“지금 회개하고, 지금 준비하여라. 나중은 없다.”
신앙생활과 회개를 나중에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뒤로 미루는 것은
‘어리석음’이고, 미루지 않고 지금 하는 것은 ‘슬기로움’입니다.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 목표인 우리
-김찬선신부-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파견되어서 해야 할 일이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오늘 독서의 말씀은 좋은 가르침이고 지금의 저에게는
걱정을 덜어주고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복음 선포와 세례 주는 것을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복음 선포보다 세례에 집착하기 쉬운데 바오로 사도는 오늘
세례의 욕심을 부리지 말고 그저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내 복음 선포의 마침표로 세례를 받게 하고픈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복음 선포로 누군가 세례를 받았다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싶고,
내가 이룬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싶은데 이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지역 사회 복음화를 목표로 <여기 선교 협동조합>을 하고,
협동조합 사업의 하나로 식당도 하는데 세례 주는 것이 식당의 가시적인 성과의
하나라면 그런 면에서는 아무 성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고 헛발짓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매스컴을 타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신부가 하는 식당이 매스컴을 타서 후원도 받고,
그 좋은 일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라는 제안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이 매스컴을 탈만큼 그만큼 훌륭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설사 그만큼 훌륭한 일이고 그래서 매스컴을 탈 수 있을지라도 저는
그러고 싶지 않고 과거 북한 일을 할 때도 그런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좋은 일을 널리 알리고 그럼으로써 좋은 영향력을 세상에 주라는,
주님께서도 등불을 됫박에 덮어두지 말고 등경 위에 올려놓아
세상을 비추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하라는 설득을 받지만
저는 그 좋은 명분 뒤에 숨어있는 유혹을 경계합니다.
저는 매스컴을 탈 때 그것을 제 영광 삼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저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때
저는 성공의 유혹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기에 하는 하느님의 사업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때 은근슬쩍 그 사업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북한 평양에 평화 봉사소를 위한 우리 계약 조건을 북한이 수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너무 기뻐 경당으로 달려가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때 문득 깨달음이 왔습니다.
내가 왜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가?
내 뜻을 그리고 내 사업을 주님께서 이루어주셨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당신 사업을 내가 도구가 되어 이루어드린 거라면
주님께서 오히려 내게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 사업을 내 것이라고 순간 착각하고 감사를 드린 것 아닌가?
이처럼 어떤 일이 가시적인 성과와 성공을 거둘 때
그것이 하느님을 위한 것도 이웃을 위한 것도 아닌,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되기 쉬운데 세례 주는 것도 그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 우리에게는 사랑이지만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따름은 그들이 볼 때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의 목표라면
세상이 볼 때 어리석을지라도 십자가라는 사랑을 목표로 삼고
그것이 우리의 복음이라고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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