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있어라.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마태오 24,42~51)
"Stay awake!
For you do not know on which day your Lord will come.
Be sure of this: if the master of the house
had known the hour of night when the thief was coming,
he would have stayed awak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와 소스테네스는 코린토 교회에 인사하며, 하느님께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베푸신 은총을 두고 감사드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라며,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성실히 일하고 있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처럼 되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세계적인 명지휘자 토스카니니(1869∼1957)는 원래 첼로 연주자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아주 심한 근시여서 잘 보지 못했다고 하지요. 관현악단의 일원을 연주해야 하는데, 눈앞에 있는 악보도 보이지 않았으니 어떻게 연주할 수 있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악보를 완전히 외워서 연주회에 가야만 했습니다. 이 상황이 즐거웠을까요? 자기의 엄청난 근시에 대해 답답해하고 어느 정도의 불평불만도 간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연주회 바로 직전에 지휘자가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한 것입니다. 지휘자가 없으니 연주회 자체가 무산될 위기였지요. 그런데 그 많은 오케스트라의 단원 중에 곡을 전부 암기하여 외우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토스카니니였습니다. 바로 임시 지휘자로 발탁되어 지휘대 위에 서게 되었고,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불평불만의 일들은 늘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일만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어렵고 힘들다면서 자기 신세 한탄만 해서도 안 됩니다. 또 자기가 가져야 할 것만을 떠올리며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한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인이 부재중일 때, 그 집의 하인들이 늘 깨어 있으면서 주인이 돌아올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하나의 내용과 주인이 돌아왔을 때, 떠날 때 맡긴 직무에 대하여 충실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일 처리를 했느냐에 대한 점검이 있을 것이라는 또 다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모두가 종말론적 비유를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구원과 연결되기에 종말의 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늦어지는구나.’라는 잘못된 판단에서 불충실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는 생각은 자기 판단일 뿐입니다. 이렇게 자기 생각만을 내세우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불충실한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충실한 종이 과연 종말의 순간을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이 원하는 모습을 지금 당장 실천하면서 성실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과연 충실한 종일까요? 불충실한 종일까요? 종말의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는 충실하고 성실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면서 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가?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FLX7A0sSUk8
‘금쪽같은 내 새끼’에 아이들이 엄마를 극도로 미워하고 반항하고 때리고 심지어는 발에 오줌까지 싸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48화에 보면 10살 아이가 10개월째 등교를 거부하며 어머니 속을 썩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혼자 있을 때 공부를 집에서 합니다. 공부하기는 하는 데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 싫은 것입니다.
전에 나왔던 이지현 씨의 아이도 그랬습니다. 두 가정의 공통점은 이혼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없어서 엄마는 아빠 없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지 않으려고 잔소리를 많이 합니다. 아이는 잔소리 듣고 무언가를 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하고 싶은데 하고 나면 다 엄마가 하래서 한 것이 됩니다. 그러니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엄마처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주인이 하인들에게 제때 양식을 주라는 소명을 주고 떠났다면 주인이 돌아왔을 때 양식을 주고 있는 이들은 깨어있는 종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종들입니다. 종은 명령받고 파견받습니다. 우리도 명령받았습니다. 파견받았다면 소명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일어나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명령을 되새기지 않는다면 나를 주님의 종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분명 이웃에게 양식을 주라고 파견받았습니다. 양식은 은총과 진리를 말합니다. 은총은 살과 피를 내어주는 희생이고 진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두 일을 할 기회를 분명 주실 것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이 소명을 수행해야 언제 죽더라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깨어있는 사람이 됩니다.
문제는 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니까 당신이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고 시험하시는 것일까요? 그래야 우리가 하느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봉사하면서 자녀임을 완전히 믿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에게 지시하며 자신 때문에 자녀가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자녀는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봉사하게 해야 합니다.
2010년 한 여성이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당시 임신 4개월 때였습니다. 다행히 태아는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제왕절개 시술이 가능해질 때까지 5개월간 집에서 남편의 보살핌 속에 누워 있었고, 9개월이 되자 병원으로 옮겨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산모는 상태가 더 안 좋아졌습니다. 의사들은 산모는 회복하기 어려우니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지키던 가족들도 다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녀를 지키는 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시간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서툰 말투로 대화도 건네며 단 한 번도 칭얼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이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아기가 엄마의 병원 음식을 씹어 자기 입으로 엄마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주는 것처럼 행동하던 2013년 5월, 아기가 작은 소리로 엄마를 부를 때 엄마가 눈을 떴습니다.
중국 장롱샹 씨의 기적 같은 이야기는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에 기사화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에서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야 3년의 세월이 지났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제 머리맡에서 미소 짓는 아기가 제 아들이라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됐고요.”
의사들은 의아해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는 음식을 겨우 삼킬 수만 있었고 씹지 않은 것들은 소화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이것을 알고 음식을 씹어 엄마의 입속에 넣어주었을까요?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부모를 넘어서려는 욕구를 느낍니다. 태어난 아기도 엄마를 돌보는 것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니 부모는 더 낮아져서 자녀가 자신에게 봉사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도 부모처럼 온전한 인간임을 믿고 성장하게 됩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당신 자녀로 만들기 위해 당신에게 봉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혜인 씨는 지적 장애인입니다. 그런데 아기가 생겼습니다. 부모도 반대했고 주위 시선도 나빴습니다. 그래도 이혜인 씨는 예쁜 딸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딸아이가 복덩이입니다. 엄마를 자신이 돌봅니다. 지켜줍니다. 아침 일어날 때부터 씻고 옷을 입고 출근하기 위해 도시락을 싸는 것까지 모두 자신이 관여합니다. 엄마가 학교에서 청소하는 일로 적은 돈을 벌어올 때까지, 연서는 집에서 혼자 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까지 다 해 놓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퇴근하는 오후 2시쯤 되면 밖에 나가 엄마를 기다립니다. 마치 오래 못 본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엄마에게 안깁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다고 합니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왜 자신이 그런 부모를 만나서 이런 아이답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지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연서는 자기가 엄마를 돌보아 줄 수 있다는 것에 너무 기뻐합니다. 자신이 인간으로서 충분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 준 사람이 엄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 해 주는 게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약해지고 낮아져서 자녀가 부모를 위해 일하고 봉사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그렇게 진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당신 자녀가 되도록 하느님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선교를 위해 생명의 양식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 소명을 통해 우리는 주님 자녀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께서 어떤 소명으로 우리를 파견하셨는지 묻고 우리가 하느님을 도울 수 있는 존재임에 크게 기뻐합시다.
깨어서 준비하고 있어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9o86bFm_Va8
-조재형신부-
오늘은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저는 2명의 바르톨로메오 사제를 알고 있습니다. 한분은 저보다 4년 먼저 사제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커피의 수요가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스로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가 되었습니다. 직접 원두를 사다가 볶아서 커피를 만들었습니다. 원하는 분들에게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 교육을 시켜주었습니다. 명동 가톨릭회관에 ‘하랑’이라는 커피 매장을 만들었습니다. 하랑은 ‘하느님 사랑’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카페 사목을 하고 싶다고도 하였습니다. 커피를 만들어 주고, 상담을 원하거나 고백성사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고백성사를 주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성당으로 오는 신자들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갈망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사목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건강에 좋은 효소를 만들어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제 앞가림도 하기 벅찬데 신부님은 이웃을 위해서 좋은 것을 보았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터미널 성당으로 자원해서 가셨고 여행자들을 위한 사목을 하였습니다.
다른 한분은 저보다 4년 늦게 사제가 되었습니다. 2002년부터 3년 동안 교구 사목국에서 같이 있었습니다. 신부님도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통합사목연구소’가 있어야 한다고 제언하였습니다. 각자도생이 아니라 각 부서가 서로 협력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상부상조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소공동체 운동의 전도사가 되어 말씀이 공동체에 녹아들도록 하였습니다.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공동체가 변화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변화된 공동체가 지역을 변화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매일미사에 복음 묵상을 나누었습니다. 신부님의 글은 깊은 샘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과 같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의 글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풀었습니다.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쳐갈 때입니다. 신부님께 글을 부탁드렸더니 기꺼이 좋은 글을 신문에 기고해 주었습니다. 갈매기의 꿈에서 높이 날아오르는 조나단처럼 신부님은 늘 새로운 것을 보았고, 찾았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들, 슬픔 중에 있는 이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공감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공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셨습니다. 겸손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희생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순명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우리가 공감의 눈으로, 겸손의 눈으로, 희생의 눈으로, 순명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부활의 로랑 형제의 생각과 단상, 편지들을 모은 ‘하느님의 현존 연습’(콩라 드 메스테르 엮음, 가톨릭출판사)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때로 부실하고 때로 밋밋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제게 매순간 하느님을 의식하고 그분 현존 속에 충만히 살아가라는 로랑 수사님의 권고 말씀은 큰 자극이요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부활의 로랑 형제의 호적상 이름은 니콜라 에르망입니다. 1614년 프랑스 로렌 지방의 뤼네빌 근처 작은 마을 에리메닐에서 태어났습니다. 안팎으로 어수선한 시기 그는 군인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독일군에 체포되기도 하고, 스파이로 의심받아 처형될 위기에 빠지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26살 되던 1640년 파리에 있는 맨발의 가르멜회에 입회하여 ‘부활의 로랑’이라는 수도명을 받습니다. 평수사 지망자였던 그는 1642년 8월 14일 서원을 하고, 그후 15년동안 파리 공동체의 요리사로 일하게 됩니다. 그러나 군인 시절 전쟁터에서 얻은 다리의 상처가 깊어져 더 이상 요리를 할 수 없게 되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인 신발 수선의 임무가 그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한쪽 다리가 마비된 상태에서 로랑 수사는 공동체 포도주 조달 담당자가 되어 왕복 8배킬로나 되는 거리를 왕래해야했습니다. 평수사로서 해야만 했던 수많은 잡다한 일들을 기쁘게 해나가던 로랑 수사는 수많은 세상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기쁜 얼굴로,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지금으로서는 웃기는 일이지만, 당시 평수사들은 잡다한 일들을 하느라 미사에도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주기적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정도였습니다. 각자 맡은 일 때문에 아침 저녁 기도나 공동 묵상에도 참여할 수 없을 때가 잦았습니다. 그러나 로랑 수사는 언제 어디서든 깨어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항상 하느님의 현존 가운데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모든 것을 통해 기도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의 삶 전체, 활동 전체, 하루 전체는 기도였습니다. 로랑 수사의 깨어있었던 삶과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일맥상통합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24장 42~44절) “저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그릇을 씻으면서, 이것저것 부탁하는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저는 마치 성체조배를 할 때처럼 깊은 고요 속에 하느님을 모십니다.” 다음의 로랑 수사의 권고 말씀은 세상 안에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큰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거룩함에 도달하는 길은 일을 바꾸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평범한 일을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은 일의 위대함을 보지 않으시고, 그 일을 얼마나 깊은 사랑으로 하는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앞의 23장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 대해 불행 선언을 하신 다음,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고 올리브 산으로 가시고, 가장 큰 재난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해 말씀하시고,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관한 '도적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곧 '깨어있으면서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3-44)고 하십니다.
재림의 때가 예측 불허할 뿐만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올 것이니, 아무런 준비 없이 있다가 그 때를 돌발적으로 맞이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유 속의 '종'은 주인을 대신하여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곧 ‘충실함’과 ‘슬기로움’입니다.
“주인이 자기 종에게 자기 집안의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마태 14,45)
‘충실함’이란 자신에게 맡겨진 ‘주인 집안 식솔들’(마태 24,45)과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어주는 일’(마태 24,45)에 대한 충실함으로 묘사됩니다.
곧 ‘맡겨진 사람’과 ‘맡겨진 일’에 충실함이 주인에 대한 충실함이 됩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주님 집안의 식솔들, 곧 양들이 맡겨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일이 곧 주인을 섬기는 일이요, 주님께 대한 충실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슬기로움’이란 먼저 ‘주인의 뜻을 아는 것’이요, 그리고 그 뜻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무 양식이나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양식’을 내어주는 일, 곧 당신의 말씀인 생명의 양식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의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일 자체도 그분이 맡기신 일이요, 그분의 일입니다.
이처럼 '깨어있음'은 의식의 각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실행을 말합니다.
곧 '깨어있다'는 것은 ‘주인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일을 맡기신 ‘주인의 신뢰에 대한 깨달음’과 '깨어있음'에서 오는 종의 ‘충실함’과 ‘슬기로움’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으로부터 맡겨진 사명을 받은 ‘종들’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신뢰하시는 주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구체적인 행동으로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주님께서 관계 맺어준 형제들에게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에게 맡겨진 형제들을 존중해야 할 일이요, 결코 무시하거나 소홀히 대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께 대한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마태 24,45)
주님!
당신께 속해 있는 종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에 따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형제들에게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시고, 그것이 당신께 대한 저의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21주일 목요일-풍요로워진 우리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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