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2일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태오 23,13-22)
Blind fools, which is greater, the gold,
or the temple that made the gold sacr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실바누스와 티모테오와 함께, 테살로니카 사람들의 교회에 인사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위선자이며 눈먼 인도자들이라고 하시며 그들이 불행하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연히 어느 지역에 갔다가 오래된 식당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식당이 어떤 곳인지 곧바로 기억났습니다. 30년 전 신학생 때, 본당 신부님께서 데리고 갔던 중식당이었습니다. 너무 고급스럽고 가격도 비싸서 그 뒤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식당이지만, 너무 맛있었기에 그 맛을 잊지 못했던 곳입니다. 그 옛날을 떠올리며 비록 혼자였지만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옛날 그 자리에 계속 운영 중인 식당이었지만,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는지 이제는 너무 낡고 옛날 풍의 느낌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옛날의 비싼 가격이 아니라, 이제 보통 가격 수준이더군요.
그렇다면 맛은 어떠했을까요? 옛날 그 맛이 아닌, 평범했습니다. 아마 그때는 무엇을 먹어도 맛있는 때였고, 그래서 보통 맛보다 더 뛰어난 맛이었기에 최고의 맛으로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옛날을 기억하게 해주는 고마운 장소라서 다시 찾아올 것 같습니다.
문득 시간이 지나도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생각해 봅니다. 변함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계속 바뀌는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좋은 점은 계속 좋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을 흠뻑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눈먼 인도자라고 하시면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꾸짖습니다. 사실 율법의 세부 조항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그들의 삶은 그 어떤 사람도 따라 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이런 열정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행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남들을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으며, 자기들은 어떻게든 합리화시키면서 그 안에서 자유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기만을 사랑하는 아주 이기적인 위선자였던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이러한 ‘불행 선언’을 듣고서 좋아했을까요? ‘맞다. 우리가 이렇게 이기적인 위선자였구나.’라면서 회개해서 다시 하느님 뜻에 맞는 생활을 바꿨을까요?
예수님도 그들이 변화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변화되지 않았기에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끈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기적인 위선에서 벗어나, 처음에 주님을 통해 얻었던 열정과 사랑을 계속해서 실천할 것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첫 마음을 잃지 말고 우리 자리를 계속 지켜야 합니다.
믿으셨으니 복되신분, 성모 마리아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ZYUWaaz2ris
-조재형신부-
산보하면서 강의 듣는 것은 하루를 지내는 소소한 즐거움입니다. 역사 이야기를 듣기도하고, 문학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현재 일어나는 사건의 심층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는 현대인들에게 가치와 의미를 잃어가는 종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고 이끌어갔는데 요즘은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종교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는 기존의 종교 패러다임은 현대인들을 종교로 끌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가르침과 제도 역시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를 떠나는 ‘탈종교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아예 종교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주류를 이루던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성소자의 감소와 냉담자의 증가로 규모가 축소되고 있습니다. 이는 미주지역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스 큉은 “하나의 종교만 아는 것은 진정으로 종교를 아는 것이 아니다. 이웃의 종교를 이해하고 대화해야 한다. 이웃의 종교와 대화하지 않으면 평화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종교의 순기능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줍니다. 지금 겪고 있는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을 줍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서 평화를 얻습니다.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허무할 수 있는 인생을 가치 있게 해주고, 삶의 목적을 갖게 해 줍니다. 그러나 종교의 역기능도 있어왔습니다. 특히 종교와 권력이 하나가 될 때는 권위와 폭력이 생겼습니다. 이방인과 다른 종교를 신의 이름으로 탄압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도 교회가 역사와 이웃에게 잘못했던 일을 겸허하게 사과했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캐나다를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교회가 원주민들에게 잘못했던 것을 사과하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인간을 다른 생명과 구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지성이 있고, 도구를 사용하고, 언어와 글을 사용합니다. 인간을 다른 생명과 구별하는 또 다른 특징은 ‘종교’입니다. 인간은 종교를 갖고, 종교생활을 하는 생명입니다. 다른 생명은 신화와 종교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종교란 궁극의 실재를 믿고, 그것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믿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헌신한다면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이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이념, 사상, 신념을 위해서 헌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를 위해서 헌신한다면 그것이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종교는 그것을 통해서 ‘변화(Transformation)' 되는 것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오면 엄청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게 된다면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됩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문제의 해결을 종교에서 찾지 않습니다. 검색의 시대라고 할 만큼 문제의 해결은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에서 찾습니다. 아픈 사람은 종교에 의탁하지 않고 병원으로 갑니다.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은 종교에 의탁하지 않고 정부의 시스템에 의존합니다. 정부는 다양한 사회보장 제도를 통해서 사회복지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목말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로 채울 수 없는 영적인 갈망입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는 영적으로 메마른 현대인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가 될 수 없습니다. 천국은 눈에 보이지 않고, 지옥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지금, 순간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천국과 지옥보다는 ‘변화’되는 삶의 의미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위선과 가식 속에 거짓된 나를 보기 보다는 진리를 탐구하는 참된 ‘나’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종교가 현대인들의 영적인 갈망과 갈증에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줄 수 있다면 사람들은 종교를 찾을 것입니다. 위기는 기회라고 합니다. 종교가 기존의 틀을 벗어버리고 심층종교로 변화된다면 세상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어릴 때는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준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산타클로스는 나를 사랑하는 부모님이었고, 부모님께서 선물을 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산타클로스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는 것이 산타클로스 이야기의 가르침입니다. 이제 더 시간이 흐르면 부모님의 사랑은 나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산타클로스의 의미는 가난한 이들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승천하셨음을 믿고,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믿고, 평생 동정이셨음을 믿고, 하늘의 어머니임을 믿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성모님께서 참된 신앙인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신앙인이었음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참고 인내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가난한 이를 위로해 주시는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렸던 성모님의 신앙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변화되지 못하고, 남들도 변화되지 못하도록 하는 종교인을 이야기하십니다.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가 변화되지 못하고,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변화와 쇄신되지 못하는 종교는 참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사치와 허세가 하늘을 찌르는 여왕이 아니라, 한없이 겸손하신 여왕이십니다!
-양승국신부-
‘모후’라는 말은 ‘왕의 어머니’, 또는 ‘여왕’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만왕이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가장 충실히 협조하셨던 성모님의 머리 위에 빛나는 왕관을 씌워드린 것을 경축하며‘여왕’ ‘모후’라는 칭호를 붙여드렸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여왕’ ‘모후’라는 호칭은 단순하고 소박하신 성모님, 고향에 계신 우리 어머니 같은 성모님께 그리 잘 어울리는 호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는 분,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마니피캇 찬가의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어 버리십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자리에서 내치십니다. 부요한 자들을 빈손 돌려보내십니다. 목에 잔뜩 힘주는 사람들, 잔뜩 폼 잡는 사람들을 바닥으로 내동댕이 치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한결같은 충실함으로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셨던 지극히 겸손하신 성모님께 큰 축복을 내리시어, ‘모후’‘여왕’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모후요 여왕이기는 하시지만, 사치와 허세가 하늘을 찌르는 모후가 아니십니다. 대신 지극히 인간적인 여왕, 한없이 겸손하신 여왕이십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갖은 고통과 상처로 힘겨워하는 어린 양들을 측은지심의 눈빛으로 굽어보시고, 살뜰하고 극진히 챙기시는 봉사의 모후이십니다.
승천하신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천상 모후의 관을 받으신 후에도, 한결같이 자애롭고 온유한 모습으로, 죄인인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봉사하고 계십니다.
1900년 들어서면서 성모님께 ‘여왕’이란 호칭을 붙여드려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습니다.
마침내 1953년, 원죄없으신 잉태 교의 선포 100주년을 맞아,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찬란한 화관’이란 교서의 발표하셨습니다. 동시에 1년간의 성모님 성년을 선포하셨습니다.
교서를 통해 교황님께서는 성모님께서 여왕이심을 선포하셨고, 해마다 5월 31일에 그 축일을 지내도록 하셨습니다.
그 뒤 교회 전례력이 개정되면서, 성모님을 천상 영광에 연결시키는 의미에서 성모 승천 대축일 뒤로 이동시켰습니다.
축일 이름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바꾸었습니다. 이날 교회는 성모님 승천의 영광을 재확인하면서, 성모님께서 세상과 인류 구원의 도구가 되신 것을 기념합니다.
중세기말 하늘의 여왕이신 성모님과 관련된 성모님 공경 안에서 진지하게 성찰하고 숙고하면서 조심스럽게 바라봐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능력이 지나치게 과정되면서 교회의 공식적이고 일반적인 가르침에서 점점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복음서 안 나자렛 마리아가 보여준 겸손과 순종, 가난하고 작은 여종의 모습은 위축되고 위풍당당한 천상 모후로서의 모습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과도하거나 남용되거나 비합리적이거나 미신적인 마리아 신심에 대한 경고와 비판으로 이어졌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능가하시는 분이 절대 아닌 분임을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성모님은 왕이신 예수님의 노선을 철저히 따르는 여왕, 종속된 여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1주 월요일-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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