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1일 연중 제21주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루카 13,22-30)
“Lord, will only a few people be saved?”
He answered them,
“Strive to enter through the narrow gate,
for many, I tell you, will attempt to ent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며 시련을 견디어 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시며,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나누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키엣 대주교-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사람들은 나쁜 것은 쉽게 배우지만 좋은 것은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 무척 더딥니다. “좁은 문”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인내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승을 원하는 선수들이 지옥같은 훈련을 이겨내야 최고라는 경지에 오르는 것처럼, 엄격한 주님의 규율을 따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규율은 입으로 되뇌이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실천으로 보여줘야하며 그 진실은 하늘 나라의 문앞에서 여실히 드러날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문은 아주 작다고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정도로 넓은 하늘이지만 하늘나라의 격에 맞는 믿음과 사랑을 지닌 사람만이 선택될 수 있기에 좁은 문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그 문을 통과하려면 살아가는 동안 조건을 갖추어야합니다.
먼저 자신을 낮추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하늘 나라는 이와 반대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가장 낮은 자리에 앉는 겸손함이 필요하며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작아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돋보이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더 큰 집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더 넓은 땅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을 드러내 줄 학위와 직위 등 더 많은 특권을 갖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 이런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나의 능력과 재능,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줄 알아야합니다. 나를 빚내 줄거라고 생각하는 학위와 직위는 주님 앞에서는 한낱 종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나의 것을 나눠줌으로써 하늘 나라의 보물을 쌓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지닌 것이 작아진다면 하늘 나라 창고는 점점 커질 것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오직 예수님께서 지나가셨던 문 하나뿐입니다.
하늘나라 문은 온전히 한 사람밖에 지나갈 수 없을만큼 작다고 합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낮추신 겸손하신 예수님에 맞게 만들어졌기에 그 문도 좁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불필요한 것들을 가져간다면 좁은 문을 통과하는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나의 욕망과 자만을 버려야만 그 좁은 문을 통과하여 영광된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께서 지나가셨던 길을 따라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가난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신 예수님을 따라 자신을 깊이 낮추고 이기적인 자아를 포기한 사람만이, 좁은 문을 통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당신을 희생하시어 우리에게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빠져 주님의 길과 멀어지지 않도록 저희를 훈육하시고 깨닫게 하여주소서. 주님을 따라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지닐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2.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부님! 이 제품은 콜라젠을 주성분으로 한 건데요. 열심히 드시면 피부에 탄력이 생기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어느 자매님께서 건강보조제를 주시며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저 역시 피부 노화를 많이 느끼고 있었기에 열심히 먹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피부가 좋아지는 느낌이었고, 저를 향해 피부가 좋아졌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시중에서는 먹거나 얼굴에 바르면 피부에 탄력이 생겨 주름이 없어지고 더욱 젊어 보인다며 콜라젠을 판다. 하지만 아무리 비싼 콜라젠이라도 먹거나 발라서 얼굴 피부에 탄력을 줄 수는 없다. 콜라젠은 매우 큰 분자라 발라도 피부에 흡수되지 못한다. 먹으면 위와 장을 거치는 동안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온몸으로 운반되므로 얼굴로 고스란히 가지 않는다.”
제가 느낀 피부 탄력은 그냥 느낌뿐이었을까요? 어쩌면 좋아지고 있다는 마음이 실제로 좋아지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짜 양이 명약이 될 수도 있다는 플라세보 효과도 있지 않습니까? 결국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마음도 중요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당연히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며 그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좁은 문’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세우시는 하느님 나라는 시련과 유혹과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어려운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가치 있는 길이기에 어려워도 이 길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생명에 이르는 이 문은 좁고 또 그 길은 험해서 그리고 찾아드는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대부분 멸망하지 않을까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주님 말씀은 ‘옳은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옳은 길을 통해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크고 넓은 길이라고 불리는 쉽고 안일한 생활이 더 눈에 뜨일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했던 사람이 선민의 자부심이 있었던 유다인들이었고,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안락을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인고의 노력이 필요하며, 마음으로부터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닌, 어렵고 힘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좁은 문: "오늘 어떻게 살까?", 아니 "어떻게 죽을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8t0iGGL7oTA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1992) 줄거리입니다. 매들린은 아주 잘 나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입니다. 하지만 세월은 속일 수 없는 법. 매들린은 늘어가는 주름이 걱정입니다. 이때 어릴 적 친구 헬렌이 남자친구 멘빌 박사를 소개하겠다고 옵니다. 멘빌은 유망한 성형외과 의사입니다.
매들린은 헬렌의 남자친구에게 치근댑니다. 멘빌도 매들린이 싫지 않습니다. 헬렌은 매들린이 항상 자기 남자친구를 빼앗았다며 당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멘빌은 그렇지 않겠다고 해놓고는 매들린과 결혼해버립니다. 헬렌은 상심한 나머지 폭식하여 살이 찌고 정신병원에 갇힐 정도로 피폐해집니다.
몇 년이 지난 후 헬렌이 파티를 한다고 매들린과 멘빌을 초대합니다. 매들린은 헬렌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보려고 갔지만 헬렌은 훨씬 젊어 있고 아름다워져 있었습니다. 이번엔 헬렌이 멘빌을 다시 꼬십니다. 멘빌도 자신을 자기 주름보다 못하게 여기는 매들린이 지겹습니다. 그래서 매들린을 죽이기로 합니다.
계단에서 밀어서 매들린을 떨어뜨린 멘빌은 헬렌에게 전화합니다. 그런데 매들린이 목이 꺾인 채로 멘빌에게 다가옵니다. 멘빌은 기겁합니다. 매들린은 헬렌에게 질 수 없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약을 먹은 것입니다. 그 약을 먹으면 몸은 좀 망가져도 죽지는 않습니다. 누가 좀 고쳐주면 됩니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 모습을 보고 기겁하고 심지어 심장마비로 죽기까지 합니다.
이때 매들린이 죽은 줄 알고 헬렌이 들어옵니다. 매들린은 자기를 죽이려 했다며 헬렌을 총으로 쏴서 배를 뚫어버립니다. 하지만 헬렌도 죽지 않습니다. 헬렌도 그 약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죽도록 싸우다가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원히 살려면 자기 몸들을 고쳐 줄 의사가 있어야 하는데 멘빌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은 서로 화해하고 멘빌에게도 영생의 약을 먹도록 권합니다. 멘빌은 괴물이 되어 버린 두 여자를 두고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영생의 약을 버립니다. 그는 죽기를 택한 것입니다.
37년 뒤 멘빌의 장례식이 열립니다. 멘빌은 다시 결혼하여 자녀도 많이 낳고 모험도 즐기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은 이들이 슬퍼합니다. 하지만 뒤에서 두 명의 여인은 비웃습니다. 바로 매들린과 헬렌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으면 뭐 하냐, 살아있는 게 낫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눈은 슬픕니다. 아무 의미 없는 하루를 또 살기 위해 나갑니다. 그들의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습니다. 아무도 고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화가 끝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하십니다. 좁은 문은 한 마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삶을 택하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비록 미사에 와서 강론을 듣고 성체를 영하더라도 이 길을 통해 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아침에 일어나 우리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어떻게 살지?”
이것은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으로 사는 사람의 질문입니다. 매들린과 헬렌이 영생의 약을 먹고는 매일 아침 그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택한 멘빌 박사는 다릅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문하지 못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늘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어차피 죽는 인생, 어떻게 잘 죽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어디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느냐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적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그는 죽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나의 죽음이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그리고 실제로 혼자서 330척과 대적해 싸웠습니다. 이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나머지 11척도 죽자고 덤벼서 결국엔 말도 안 되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의미 있게 죽으려고 하는 삶, 이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영원히 살게 되면 더 완전한 모습으로 살려고 더 욕심을 부립니다. 하지만 죽으려 하면 생명 유지를 위해 간직한 아주 작은 것까지 이웃을 위해 내어줄 수 있게 됩니다. 내 힘으로 영원히 살려고 하는 것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맡김은 하느님의 자녀됨으로 하느님처럼 됨입니다. 우리에겐 이 두 길밖에 없습니다.
우린 지금 살아있습니다. 죽으려 하며 이웃을 살리는 사람이 될 것인지, 살려고 하며 이웃을 죽이는 사람이 될 것인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고 예수님은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것, 죽으려는 삶으로 나아가보라고 권하십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도 하루를 어떻게 죽을 것인지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더 의미 있는 죽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가슴에 희망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 것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죽으려 하기보다는 어떻게 살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x1HGU2B8_Js
-조재형신부-
오늘은 연중 제21주일입니다. 그리고 2022년 8월 21일입니다. 8월 21일은 제게는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2019년 8월 21일 오전 11시 30분에 한국에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오늘은 제가 뉴욕에 온지 꼭 3년이 되는 날입니다. 3달만 하기로 했는데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도 2년째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묵상에 강론을 올린 것이 어느덧 10년이 되었습니다.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중견사제연수, 용문청소년수련장, 성소국장, 제주 엠마오 연수를 거쳐서 지금은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에 있습니다. 중견사제연수는 사제생활 20년을 하면서 충전의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교구장님께서 용문청소년 수련장에서 지내라고 하셨을 때는 기뻤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여름 캠프를 다녔던 곳입니다. 자연 속에서 지내는 평화로운 날이었습니다. 6개월이 지났을 때 교구장님은 제게 성소국장으로 교구청에서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교황님께서 방한하셨습니다. 교황님 방한 준비위원으로 일할 수 있어서 보람 있었습니다. 서품식을 준비하면서 새 사제들을 보는 것도 기쁨이었습니다. 제주 엠마오 연수는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 같았습니다. 여러 교구에서 온 신부님들을 만났고, 정을 나누었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일은 제게는 새로운 도전이지만 새로운 경험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신앙인은, 사제는 하느님의 영광을 알리는 것이 본분이며 사명입니다. 사막과 같은 곳이라면 그곳을 오아시스로 만들어서 생명이 자라게 만들어야 합니다. 분열과 갈등이 있는 곳이라면 화합과 일치로 신명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분노와 원망이 있는 곳이라면 이해와 용서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제게 3가지의 과제를 주었습니다. 첫째는 미주지역가톨릭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며, 삶을 나누는 지면을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는 홍보를 통해서 구독자의 수를 늘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셋째는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해야 합니다. 기존의 수입은 구독료, 광고료, 후원금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제가 뉴욕으로 온 지난 3년은 어쩌면 긴 시련의 터널과 같았습니다. 팬데믹으로 본당의 모든 활동이 중단되면서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기 어려웠습니다. 덕망 있는 사제들에게 글을 부탁드렸습니다. 신부님들은 기꺼이 글을 보내 주었고, 글은 팬데믹 터널을 지나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홍보를 통해서 구독자를 늘려야 하는데 홍보자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미주가톨릭신문은 팬데믹의 터널을 나오지 못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본당활동이 재개되면서 대림/ 사순특강을 다니면서 홍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도움으로 구독자가 늘어 날 수 있기를 청합니다.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사제들과는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함께 대화하고, 기도하면서 길을 찾았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으로 미사를 다니면서 팬데믹의 터널을 지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예수님께 말씀하시는 좁은 문은 영광의 문이 아닙니다. 권력의 문도 아닙니다. 재물의 문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바로 그런 문으로 들어가려하기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진다고 하십니다. 좁은 문은 희생의 문, 사랑의 문, 용서의 문, 겸손의 문입니다. 그런 문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모두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고통없이 영광없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행복은 외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옵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얼마나 마음에 모시고 살았느냐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집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던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행복하지 못했다면 지금부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사람을 곤충으로 비유해 거미ㆍ개미ㆍ꿀벌의 세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거미형의 사람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놓고 기다리다가 어떤 먹잇감이 걸리면 피를 빨아 먹습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이기주의 인간'입니다.
개미형의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람', 즉 있으나마나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지런하고 단결심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 잘 뭉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개인주의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도 필요 없고, 도움을 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꿀벌형의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꿀벌은 조직력도 강하고 부지런합니다. 열심히 꿀을 따다 자기들도 먹지만 대부분 사람에게 제공합니다. 주는 삶을 삽니다. 이런 사람은 ‘이타주의 인간’입니다. 사회곳곳에 이러한 꿀벌형의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유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인은 바로 베푸는 사랑에 기뻐해야 합니다. 꿀벌 유형을 희망합니다.
인간의 삶을 네 가지로 구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언제나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 둘째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지만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 살고자 애쓰지 않는 사람. 셋째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지만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넷째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는 사람. 아니,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첫째 사람은 하늘을 차지해서 행복한 사람이고, 둘째는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사람이며, 셋째와 넷째는 매를 맞아도 덜 맞을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7-48).
하느님께서 계심을 믿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함으로써 천상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된 백성이라는 환상에 잠겨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상을 차지하는 것은 ‘따논당상’이라고 생각하고 특권을 휘두를 뿐 신앙 안에서 ‘내면의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지만 뽑힌 사람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둠속에 던져지고 오히려 이교백성들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릇된 안전감에 빠져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나는 구교신자다. 오래도록 신앙생활에 충실했다고 자만한다면 공든 탑은 한 순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방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캐지 않는 유일한 보석은 ‘진주’라고 합니다. 진주는 ‘조개 속에 들어있는 이물질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분비물로 감싸서 생기는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저항과 고뇌’의 과정을 극복해서 탄생한 강함을 가진 보석입니다.
‘조개나 굴’ 속에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은 ‘나카’(Nacre)라고 불리는 물질을 만들어 모래알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나카가 많이 덮일수록 진주는 커지고 값도 비싸집니다. 그런데 이 나카는 아주 적은 양이 천천히 생기기 때문에 작은 진주도 수개월이 걸리고 큰 진주는 몇 년에 걸려서 만들어 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굴속에 들어온 모래알이 다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에게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카를 생산해서 코팅작업을 하든지 아니면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면 나카를 생산하는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 모래 때문에 상처가 나고 대부분의 굴은 아주 죽어버립니다.
이 굴의 선택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여러 종류의 모래알이 자주 들어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성장의 발판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회피하여 차차 곪아 스스로 파멸을 가져오고 맙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며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브12,11-1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나카를 생산하고 코팅작업을 하여 진주를 만들라는 권고입니다. 분명 시련은 더 없이 귀한 은총의 기회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 답은 여러분 마음에 있습니다. 정말 장차 구원 받을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최선을 다해 살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있느냐? 내가 알고 있잖아요! 물론 개중에는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자기는 잘산다고 하는데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하면 여러분 뭘 생각하십니까? 이건 베드로 얘기하는 거야, 마리아 얘기하는 거야! 하면서 “저는 아니겠지요?”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건 네 말이다.”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궁금증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13,24).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는 사람들 속에 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투신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사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있는 힘을 다 쏟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희생 봉사하고 사랑하며 헌신하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이들은 환호하며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
세상은 지금 당장 편하고 쉬운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멀리 보면 그것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있는 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바 대로, 그분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문은 결코 요행이나 잔재주로 통과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성실과 인내로, 사랑으로 통과하는 문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친분을 내세워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13,26). 하였지만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13,27) 하셨습니다. 아무리 하느님과 친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악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느님을 잘 알고 믿음의 생활을 오래도록 충실히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꼴찌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신 말씀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바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문에 들어가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삶의 터에서 상황이나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배려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보시는 첫째와 세상이 인정하는 첫째가 같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덜 성공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희망을 줍니다. 지금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때입니다.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천국문은 바르게 살려는 사람에게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가운데 행복을 키워 가시기 바랍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깨어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준비를 하려는 체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의 처신 때문에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마음의 의지를 굳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거슬러 행하려 하느냐에 구원과 저주의 판결이 달려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사사건건 따지는 한 젊은이에게 한 어르신이 자네, 명석함과 지혜로움의 차이를 아나?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어르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른들의 말에서 오류를 찾아내는 것은 명석함이고,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은 지혜로움 이라네.” @@@
『구원과 멸망』
-송영진신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3-24)”
여기서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라는 질문은,
구원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만일에 구원받을 사람들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그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또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라는 말씀은,
구원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힘쓰는’(노력하는) 사람만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좁은 문’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문이 실제로 좁다는 뜻이 아니라,
그 문의 ‘성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자격을 갖춘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뜻에서 그 문은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표현만 보고서 ‘들어가기 어려운 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고, 그 생각은 ‘신앙생활은 어렵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데,
‘좁은 문’이라는 말은 ‘들어가기 어려운 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격 심사가 엄격하다는 뜻입니다.
(엄격하다는 말도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대충 아무렇게나 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으니
하느님 나라의 문은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은 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으니,
그 문은 ‘들어가기 쉬운 문’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쉬운 일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세속의 눈으로만 보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학력, 나이, 신분 등과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주 쉬운 일’입니다.
자기 이름을 쓸 줄 모르는 무식한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고,
어린이들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몸이 약하거나 병든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니 ‘아주 쉬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못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보다 더 많다.”
라는 뜻이 아니라, “들어가기를 바라면서도 노력하지는 않아서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라는 뜻입니다.
어느 쪽이 더 많은지는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 때에 드러날 것입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루카 13,25-27).”
이 이야기는 ‘최후의 심판이 끝난 뒤의 상황’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선고가 번복되거나 취소되는 일은 없습니다.
재심의 기회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닫힌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 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멸망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뒤늦은 후회’를 나타냅니다.
(주님이 무자비하고 냉정한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회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라는 말은, 주님이 앞에
계시는데도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라는 말은,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모습을 ‘구경만’ 하고,
그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는 일은 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미사를 구경만 하고, ‘참례’는 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몸은 성당에 앉아 있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멸망을 선고받은 ‘결정적인 이유’는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죄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너희를 모른다.” 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시는데,
모른다는 말은, 관계가 없다, 또는 관계가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끊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 쪽에서 먼저 관계를 끊었습니다(루카 12,9).>
지금 이 상황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저승에서 애원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루카 16,23-24).
한 번 멸망을 선고받으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28-30).”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라는 말씀은,
멸망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후회와 절망’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안에’ 들어가는 방법을 몰라서 못 들어간 사람들이
아니라, 알면서도 안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또 하느님 나라의 ‘안’보다 ‘밖’이 더 좋다고 하면서
‘밖’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할 뿐입니다.
<구원이 확정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하고,
그러면서 겸손하게 주님께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 24)
-한상우신부-
먼저 좁은 문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방식이 아닌
좁은 문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를 살리는
좁은 문이다.
좁은 문은
너무 커져버린
우리 자아를
대변해 주고 있다.
좁은 문은
작아짐으로
풀어야 한다.
구원은
우리 자아가
작아지는
참된
기쁨이다.
작아지면
못 빠져 나갈
문이 없다.
작아지면
이 모든 것은
편안해진다.
자기를 버리면
하느님과
하나되어
빠져나갈
좁은 문도
사라진다.
불의를 멈추고
올바른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
복음의 참된
길이다.
개울물 또한
쉼없이 흘러
바다와 하나된다.
흐르는 물에
삶을 맡긴다.
다시 길을
만드시는
구원의
하느님이시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게되는
좁은 문의
크옵신 사랑이다.
머무르지 않는
살아있는
실천이란
우리의 자아가
점점 작아지는
작아짐의 실천이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는
이들의 기쁨이다
말씀 나누기 - 연중 제21주일-좁지만 열려 있는 문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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