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2. 8. 19. 06:40

2022 8 19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오 22,34-40)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뼈로 가득 찬 계곡으로 데리고 가시어 마른 뼈들을 살리시며, 이스라엘을 무덤에서 끌어내어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시겠다고 예언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단정 짓는 태도를 보이고, ‘요즘 젊은 애들은~~’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을 어떻게 부를까요? 듣자마자 답이 나올 것입니다. ‘꼰대’라고 말입니다. 이 ‘꼰대’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젊은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또 상대에게 의견을 묻는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했는데도, 아들에게 “아빠는 꼰대 같아.”라는 말에 크게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꼰대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돈만 내고 사라지면 된다.’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자신이 이제까지 시행착오를 겪었던 일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야기한 것뿐인데, 이런 말을 했다고 ‘꼰대’ 취급받는 것이 억울하다고 하십니다. 또 너무 화가 나서 ‘요즘 젊은것들’이라고 했다가, “그러니 꼰대지.”라는 말을 들었다며 세상 살기 힘들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존경받는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단정 짓는 말을 하고, 요즘 세대를 비판해도 꼰대 소리를 듣지 않는 어른이 있습니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어도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키워나가면서 자기만의 영역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역이 없으면 쉽게 ‘꼰대’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영역이 있습니까? 특히 주님과 함께하는 신앙의 영역은 자기만의 소중한 영역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에 동참하며 만드는 영역은 ‘꼰대’보다는 진정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존경받는 어른이 되도록 해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 따르는 것을 몹시 어렵게 만들었지요.

예수님 시대의 율법은 인간 생활을 외부적으로 종교화하여 지켜야 할 계명 248개 조항, 금기의 조항 361개 조항, 모두 합해서 613개 조항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잡다하고 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도 힘들었지만, 613개의 조항을 지키느라 다른 것들을 도저히 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활하는 데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율법 학자가 한 것입니다. 당시 종교 생활의 고민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큰 계명을 뒤로 하고 자질구레한 외부 생활 규율에 치우치고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면서 이 사랑에 집중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잘 실천하는 이는 ‘꼰대’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진정한 이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받기보다 사랑하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을 안겨 주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봉사다(톨스토이).

 사탄이 방해하는 첫 번째 기도: 식사 전 기도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KHRHECn-3v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 중의 첫째는 하느님 사랑이고 두 번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인간이 이 계명을 지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질투 해 보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사탄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첫 번째로 방해하는 기도가 무엇일까요? 이것만 하지 못하게 하면 인간이 계명을 지키게 하지 못하는 데 거의 다 한 것이 됩니다. 

  

    지금의 멕시코에서 번성하였던 아스테카 문명이 있습니다. 이 문명은 상당히 발달한 지식을 가졌었습니다.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사람을 죽여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인육을 자기 백성들에게 먹이는 일도 했다는 것입니다. 현재 조사에 따르면 왕의 생일 때 500만에 가까운 백성을 먹이기 위해 20~30만 명의 사람을 죽였다고 하니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남자 한 명당 가격이 5천만 원이나 했다고 하니 백성들은 임금에게 감사해야 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임금이 주는 음식에 감사하면서 왕이 하는 행위 또한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들도 자녀들에게 타인을 해치며 그로부터 얻은 획득물을 주어 먹여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먹는 것을 주는 대상에 감사하면 그 대상이 하는 일을 긍정하는 것이 되고 그러면 그가 하는 사랑이라는 것도 그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족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사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사랑이 이루어지려면 이런 시스템을 허물어뜨리고 다른 존재에게 양식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당시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Cortes)가 멕시코에 도착하였습니다. 군인은 600명 정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600명으로 사냥에 최적화된 500만의 아스테카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말린체(Malinche)입니다. 

  

    말린체는 귀족 집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새엄마가 유산을 자기 아들에게만 물려주려 했기에 말린체를 몰래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말린체는 언어 습득 능력이 뛰어나서 결국 코르테스의 통역관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아스텍어, 마야어는 물론이요 스페인어까지 능통하였습니다. 그녀는 코르테스에게 자신이 협조하면 나중에 사람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는 그런 문화를 없애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코르테스는 그녀에게 그것뿐만이 아니라 스페인 귀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말린체는 아스테카의 제물 사육장으로 사용되는 수많은 부족에게 스페인에 협력하면 더는 사냥당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설득합니다. 그렇게 많은 부족들이 코르테스와 연합하게 되었고 덕분에 코르테스는 아스테카 문명을 허물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말린체는 원주민으로서 공식적으로 첫 번째 세례를 받고 첫 번째 메스티소(원주민과 스페인계 혼혈)를 낳았으며 첫 번째 스페인 귀족이 됩니다. 자신이 그렇게도 증오했던 사람을 잡아 바치고 그것을 먹는 문화를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주시는 하느님의 체제로 변화시키려 했던 인물입니다. 이것이 사랑일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를 통해 그렇게 내어주시는 양식이 당신의 살과 피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식사할 때 주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사랑이 곧 자신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주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사탄은 “이건 네 부모님이 고생해서 주신 거야!”, 혹은 “네가 번 것으로 네가 먹는 거야!”라고 자신과 인간에게 감사하게 만듭니다. 자신에게 감사하는 사람은 자아에 감사하는 것이고 뱀의 시스템을 긍정하게 됩니다. 부모에게 감사하는 사람도 부모의 부족한 면까지도 그 음식에 감사하며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랑은 하나의 시스템입니다. 밥을 주는 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밥이 자신의 살과 피일 수 있다면 그 밥을 주는 이는 창조자입니다. 창조자만이 자신 안에서 양식이 솟아납니다. 피조물은 타인을 죽여서 그것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에 감사하면 그 시스템을 긍정하고 또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체성혈을 믿고 영해야 하는 이유이고 식사 전 기도 때, 마치 작은 미사를 거행하는 것처럼 주님께 감사하며 먹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식사 전 기도를 마치 성체를 영할 때의 그 마음으로 하고 식사한다면 그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은 그리스도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이중 계명과 삼중 대화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channel/UCuUtL9J89jdK7sVXbNd0Beg

-조재형신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기에 신부님들과 식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로마에서 유학 중인 청주교구 신부님이 뉴욕에 왔습니다마음이 통해서 몇몇 신부님들이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모임 날이 되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못 오는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모임의 동기를 주었던 청주교구 신부님은 한국에 계시는 가족의 장례 때문에 한국으로 갔습니다갑자기 면담 요청이 온 신부님은 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여름행사로 피로가 겹친 신부님은 다음 기회에 참석하겠다고 했습니다다섯 명이 모여서 맛있는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다들 이유가 있어서 두 명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여러 명이 대화하면 주제가 다양한 면이 있지만 진지한 대화를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그런데 후배 신부님과 둘이서 이야기를 하니 가족이야기여행이야기미국생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제게 두 가지의 질문을 하였습니다첫 번째는 노후에 대한 질문입니다미국에서 사제들은 알아서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미국 본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은 아직은 젊지만 노후에 대해서 어찌 해야 할지 궁금했다고 합니다저는 31년 사제생활을 하였고앞으로 한 텀이 지나면 원로사목자가 될 것입니다제가 속한 교구에서는 원로사목자들에게 공동숙소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미사예물도 지원해주고국가에서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경제적인 면에서 노후를 크게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시간관리와 건강관리 그리고 영적인 생활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사목의 현장에서 떠나면 개인의 시간이 많아질 것입니다악기를 배우거나그림을 그리거나책을 읽거나 적당한 취미와 봉사의 시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나이를 먹으면 건강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적당한 운동규칙적인 식사긍정적인 생각이 건강관리에 좋을 것 같습니다매일 미사를 봉헌하고기도로 하루를 열고 기도로 하루를 마감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강론에 대한 질문입니다매일 저의 강론을 인터넷을 통해서 읽고 있다고 합니다미국 성당에서 영어로 강론을 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강론 준비가 늘 숙제라고 하였습니다저는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습니다저는 신학생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강론의 주된 재료는 말씀입니다그러기에 말씀을 눈으로 읽고마음으로 읽으면 좋습니다말씀에 소홀한 강론은 좋은 이야기는 될 수 있지만 참된 강론은 될 수 없습니다. ‘시대의 표징입니다말씀은 변함이 없지만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은 변하기 마련입니다그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과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 좋습니다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책을 가까이 하고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좋은 의사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치료를 시작합니다. ‘입니다말씀을 강론한 대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기도하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으면남을 도우라고 하면서 욕심을 채우려한다면 예수님께서 책망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될 것입니다삶이 함께하지 않는 강론은 속빈 강정이 될 것입니다. ‘기도입니다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고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기도는 좋은 강론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둘이라서 단출했지만 둘이라서 영적인 대화를 더 많이 했던 시간이었습니다언젠가 후배 신부님도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후배의 질문에 저보다 더 현명한 대답을 하리라 생각합니다오늘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스승님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사랑은 관념이 아니고 사랑은 실천이며사랑은 삶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그제야 너희는 나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언제나 낙관적이고 희망적입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는 참으로 섬뜩한 광경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광활한 계곡 한가운데로 안내하셨는데, 에제키엘 예언자는 자신의 발밑을 보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곳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죽은 사람들의 뼈들로 가득했는데, 얼마나 오래 지났던지 뼈들은 바싹 말라 있었습니다.

  

이른바 죽음의 계곡, 죽은 자들의 계곡이었던 것입니다. 그 뼈들은 억울하게 집단 학살된 사람들의 뼈들이었습니다. 에제키엘 입장에서 끔찍했을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그 음산한 곳을 빠져나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에제키엘 예언자는 놀라운 주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은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됩니다. 무수한 마른 뼈들 사이에 힘줄이 생기더니 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살갗이 생겨나 살아있는 사람들의 형상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주님께서는 마무리로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 넣어주시고 생명의 부여하셨습니다. 그러자 모두 다시 살아나서 자신의 발들로 걸어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숫자는 일개 연대가 될 정도로 많았습니다. 이어지는 주님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의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에제키엘 예언서 37장 12절, 14절)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이신 우리 주님이심을 다시금 똑똑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번 죽음, 그걸로 인생이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조만간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아니 영원히 다시 살릴 것입니다. 살아생전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만 희망했던 우리는 언젠가 주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다 할지라도 언제나 낙관적이고 희망적입니다. 삶 전체가 고통으로 가득했던 에제키엘 예언자의 삶 또한 그랬습니다. 주님 말씀 전하느라 가족들이 곤경에 처하고 심지어 사랑하는 아내가 비명횡사했음에도 그는 주님의 언약만을 굳게 믿으며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참혹한 상황 앞에서도 에제키엘 예언자가 건네는 메시지의 결론은 언제나 희망적이고 낙관적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패망을 거듭 외쳤지만,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돌아서기만 한다면, 새로움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새 하늘, 새 땅, 새 마음, 새 기운, 새 생명, 새 계약, 새로운 미래를 선물로 주실 것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유배지에서의 처절한 고통과 쓰라린 절망 가운데서도 에제키엘 예언자는 새로움을 외쳤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새로움은 물질적 의미의 새로움을 넘어 존재론적인 의미의 새로움입니다. 그 새로움은 새로운 마음, 새로운 정신, 새로운 기운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존재로서의 새로움입니다.”

  

“새로운 존재 안에는 완고하고 무딘 돌 심장이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살 심장이 뛰며 움직일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 안에는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 피가 순환되는 따뜻한 마음, 연민과 자비로 가득한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명함」

 -반영억신부-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5,45).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주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명함입니다. 다른 명함은 거짓이며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3.35 참조). 우리는 지치지 말고 일치로 향하는 길과 서로를 갈라놓는 장애와 장벽을 넘어 하나가 되는 다리를 만들고 또 만들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상호 존중과 대화로서, ‘주님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은 누가 더 큰 사랑을 내어놓을 수 있는지를 찾는 것'(요한 바오로 2세, 2001.09.27 강론)임을 알고, 모범이 되어 서로 도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호경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를 긋는 동작을 통해서 위로부터 아래로의 하느님과 나의 사랑을, 동시에 옆으로의 이웃과 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물, 그것은 사랑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므로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네 목숨을 다하고』

 -송영진신부-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율법학자는 ‘무엇이’ 가장 큰(중요한) 계명이냐고 묻는데,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를,

즉 “계명 실천의 ‘근본정신’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가에 관해서는

이미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 말씀은, 자기 마음대로 계명들을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분류해서,

작은 것을 무시하고 안 지키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고,

모든 계명을 똑같이 중요하게 여기면서 잘 실천하는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결국 ‘가장 큰 계명’은 따로 없고,

모든 계명이 다 똑같이 큰 계명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학자의 질문은,

그 자체로 ‘잘못된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계명 실천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다.”,

또는 “계명은 ‘사랑으로’ 실천해야 한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계명을 잘 지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도,

사랑 없이 지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선’이고,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계명 실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 이유는, 계명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계명을 내려주신 것은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계명으로 인간들을 억압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고(1요한 4,8), 하느님의 계명도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 쪽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다하고 당신의 목숨을 다하고

당신의 정신을 다하여 너희를 사랑하신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일은,

당신은 뒤로 물러나 계시고 예수님만 보내신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직접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은 일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일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것과 같은 일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당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신 말씀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니,

우리도 하느님을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동전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를,

모든 것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 사랑’의 모범이 됩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에는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신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과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네 이웃은 너 자신이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에서 ‘강도당해서 쓰러져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하고,

예수님이기도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이웃 사랑 실천이기도 하고,

이웃 사랑 실천을 통해서 하느님 사랑을 실천한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웃과도 하나가 되고, 하느님과도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3).”

하느님은 내 안에도 계시고, 이웃 안에도 계십니다.

내가 이웃 사랑 실천을 하면, 사랑을 받는 쪽의 입장에서는

이웃의 사랑을 받는 것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나를 사랑하는 그 이웃이 곧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이웃 사랑 실천을 통해서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0주 금요일-모은 사랑의 원동력인 하느님 사랑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8월 21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