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7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마태오 20,1-16)
Am I not free to do
as I wish with my own money?
Are you envious because I am generou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준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매달 마감에 시달립니다. 바로 이 책, ‘쓰담쓰담’ 묵상집 때문입니다. 갑곶성지에 다시 온 뒤에 후원회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기 위해 매달 발행하는 묵상집입니다. 2016년 9월에 시작했으니, 벌써 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묵상집의 모든 글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저 혼자 쓰고 있습니다. 2001년부터 이미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라는 묵상 글을 써왔기에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감’이라는 단어에 힘듦을 매달 느끼고 있습니다.
마감을 지키지 않으면 제때 묵상집을 발행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기에 마감일이 가까워지면 초조해지고 몸과 마음의 피곤함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지난 6월처럼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받고 회복하는 시간까지 길어지면 몸과 마음으로 더 힘들어집니다.
솔직히 마감이 없는 경우, 글이 잘 써지지 않습니다. 편안한 상태가 아닌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어야 자극받아서 글을 쓰게 됩니다. 또 마감이 있어야 그 날짜를 염두에 두고 계획성 있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삶도 마감이 있습니다. 바로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는 ‘죽음’입니다. 이 죽음으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이 죽음에 자극받아 더 발전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내 삶의 마감인 죽음을 바라보면서 더욱더 지금을 계획성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지금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바로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 말씀을 듣고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세상눈으로 볼 때, 포도밭 주인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 모두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이 부분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공평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는 그런 세상의 논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이른 아침에 장터의 인력시장에서 일할 일꾼을 뽑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낮 기온이 너무 높아서, 이른 아침을 제외하고는 인력시장을 찾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포도밭 주인이 찾아갔던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 있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선택받을 수 있었고, 그 희망으로 인해 후한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정의와 세상의 정의는 다릅니다. 하느님의 처사에 대해 우리가 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의 선택을 기다리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시키는 일과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일의 차이: 일이 수단이 되거나 목적이 되거나!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prnSyAGwuJg
하늘 나라의 포도밭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sNYXTdE8K5s
-조재형신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드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다면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모두 부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같은 물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부유함이 주는 편리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부유하면 좋은 집을 가질 수 있고, 부유하면 좋은 차를 가질 수 있고, 부유하면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했을까요? 재물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아서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남을 속이기도 하고,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하느님과 멀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부자는 늘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좋은 옷을 입었고, 커다란 집에서 지냈습니다. 라자로는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었고, 몸이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엘 갔습니다. 그런데 라자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천국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살아서 풍족하게 살았고, 라자로는 살아서 힘들게 살았으니 라자로는 죽어서는 편안함을 누려야 한다.’ 부자는 내가 풍족하게 살았던 만큼 라자로에게는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야 살아서도 죽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누가 알려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부자가 가난한 라자로를 도와주었다면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는 것’처럼 쉬웠을 것입니다. 라자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의 삶이 너무 고단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곳간에 재물을 쌓아놓고 기뻐하는 부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부자는 재물을 곳간에 쌓아놓고 기뻐하지만 부자가 죽으면 그 재물은 하나도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썩지도 않고, 좀을 먹지도 않는 하늘나라에 재물을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나라는 어디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쌓아야 할 곳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헐벗은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너희 중에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너희 중에 외로운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너희 중에 갇힌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레위와 사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정성껏 돌봐주고 치료해 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였던 세리 자캐오를 만났습니다. 부자였지만 세리였던 자캐오는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 자캐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네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4갑절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부자라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부자일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자신의 재물을 기쁜 마음으로 이웃에게 나눌 수 있다면 하늘나라의 문은 언제든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모든 존재는 하느님의 성전으로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마땅합니다!
-양승국신부-
포도밭 일꾼들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천지 차이라는 것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은 다르다는 것.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 하느님의 시계 바늘과 인간의 시계 바늘은 그 속도가 다르다는 것.
인간의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많이 일한 사람은 많이 받고, 적게 일한 사람은 적게 받는 것입니다. 일 잘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대우받고 인정받지만, 부족하고 약한 사람들은 홀대받고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느님의 생각은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른 아침 6시에 포도밭으로 일하러 나온 일꾼이나,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심지어 오후 5시에 나온 일꾼까지도 포도밭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준 것입니다.
그런 포도밭 주인의 처사에 심기가 뒤틀린 오전 6시 일꾼팀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오 복음 20장 11절)
포도밭 주인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하느님의 진심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른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오 복음 20장 13~15절)
후하고 너그러운 포도밭 주인의 말씀에 제 마음까지 다 훈훈해졌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능력과 건강이 철철 넘치는 사람도 사랑하지만, 사회적 약자들, 어린이들과 노인들, 환자들과 장애인들, 불치병 환자들과 임종자들은 더 사랑하고 환대하시는 분,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모든 존재는 하느님께서 생생하게 현존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존중받고 사랑받는 그런 우리 교회와 사회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를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 속에는 하느님의 보화, 곧 하느님 자비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신비는 첫째로,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하루 일과가 다 끝나갈 저녁 무렵까지, 다섯 차례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손수 장터로 나가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일의 능력이나 실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오히려 병들고 노쇠해서 팔려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입니다.
도대체가 계산이라고는 모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주인입니다.
사실은 애시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다기보다, 그들을 살게 하기 위해 불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입니다.
이는 하늘나라가 당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쌍한 우리를 위하여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자비입니다.
둘째로는,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줍니다.
상식적으로는 이른 아침부터 온 품꾼에게 먼저 주는 것이 타당할 것이지만, 굳이 순서를 바꾸어 품삯을 주는 것은 오후 늦게서야 일터로 부름 받게 된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없는 까닭에 하느님의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가장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인 선택을 말해줍니다.
곧 가장 불쌍한 자에게 가장 먼저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냅니다.
셋째로는, 모두에게 똑같이 고루 품삯이 주어집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한 만큼의 형평에 맞게 정당하게 노동의 대가를 셈쳐주지 않았습니다.
일한 시간이나 일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똑같은 품삯을 고르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온 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아니라 계약으로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으며, 단지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을 뿐입니다.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쳐주는 이러한 포도원 주인의 권한행사와 너그러운 처사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하늘나라가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이요, 자비임을 밝혀줍니다.
결국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 비유’는 이 지상에서의 꼴찌들에게 대한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교회로 불러들이십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자와 나중 온 자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큰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비천한 신세를 자비로 돌보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앞세우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를 내세우는 데는 '꼴찌'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마태 20,4)
주님!
당신은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꼴찌들부터 품삯을 주십니다.
애시 당초 일을 부리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부르심이 이미 은총이오며, 은총은 계산이 아니라 자비시오니, 주님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아멘.
「어떤 일이든 사랑을 담아서 하라」
-반영억신부-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봐야 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지자 실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 시기심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른 이가 좋은 것을 얻는 모양새를 두고 내 안에서 악을 꺼내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의 좋은 것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못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내가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하였는데 누군가 챙겨주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합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을 세상의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가 잘못이 아닐까요?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가 뒤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가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2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송영진신부-
하느님 나라는 누가 들어가든지, 또 언제 들어가든지,
누구에게나 똑같은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뿐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언제 얻든지 간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한 가지뿐입니다.
다른 종류나 다른 등급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바로 그 단순한 사실을 기초로 한 비유입니다.
얼마나 오래 일했든지, 얼마나 많이 일했든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똑같은 품삯을 받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하느님 나라는 똑같은 나라이고,
누구나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비유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똑같다.’는 것이 아니라,
늦게 와서 일을 적게 한 사람을 차별대우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생활을 짧게 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하신다는 것이 비유의 핵심 주제입니다.
<신앙생활을 남들보다 더 오래 했다고 해서 남들보다 더 높은 등급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신앙생활을 남들보다 짧게 했다고
해서 남들보다 등급이 더 낮은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순교자라고 해서 더 좋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순교자가 아니라고 해서
덜 좋은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똑같다.’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항의할
순교자나 성인 성녀는 없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항상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분들이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한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마태 20,1-5).”
여기서 ‘일꾼들을 사다.’ 라는 말은, ‘복음을 선포하다.’ 라는 뜻이고,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복음대로 살면
얻게 되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뜻을 생각하면, 밭주인이 일꾼들을 구하는 일은
잔치에 참석하라고 사람들을 부르는 일과 같습니다.
신앙인은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한 다음에,
품삯을 받고 떠나면 그만인 일꾼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품삯을 받는 일꾼이라면, 그가 하는 일은 ‘남의 일’이고,
일을 다 하고 나서 품삯을 받으면 주인과의 관계가 끝납니다.
자녀라면, ‘아버지의 일’은 곧 ‘나의 일’이고, 일을 하는 동안에도,
일을 마친 뒤에도,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와 함께 기뻐합니다.
그러니 품삯을 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이 끝난 뒤에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끝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남을 위해서 하는 노동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나의 생활’이고,
신앙생활 자체가 은총입니다.
은총이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태도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은총을 똑같이 주시는 분입니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마태 20,9-12).”
맨 먼저 온 이들의 불평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불평과
거의 같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나오는 ‘맨 먼저 온 이들’은
자기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했다.”고 주장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은
자기가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일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모두 신앙생활을 강제노동 하듯이 기쁨 없이 한 사람들입니다.
기쁨도 없고 사랑도 없으니 은총을 받아도 은총인 줄 모르고,
노동의 대가만 요구합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나오는 ‘맨 먼저 온 이들’과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을,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하느님을 믿고 섬겼다.
그런데 이제 막 하느님을 믿기 시작한 이방인들에게
어찌하여 우리보다 더 좋은 은총을 주는가?”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 자체는 자랑거리가 아니고,
이제 막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을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시대의 신앙인들이 구약시대의 유대인들보다 낮은 등급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이 받은 것보다 등급이 낮은
구원과 생명을 받아야 하는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나라와 구원과 생명은 없습니다.
이 말은 각 개인의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유아세례를 받고 평생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받는 은총과
인생의 마지막 시점이 되어서 비로소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사람이 받는 은총이 달라야 한다면,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달라야 하는가?
똑같은 은총을 똑같이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먼저 믿은 사람이
나중에 믿게 된 사람을 축하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차별도 없고, 시기 질투도 없는 나라입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 15)
-한상우신부-
적어도
하느님의
후하신 처사를
우리가
악용해서는 안된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셨다는
엄청난
이 사실이다.
하느님께서
두루 살피시고
가장 좋은 시간에
우리를 초대하신다.
언제나
어느 때나
후하신
하느님의
사랑법이다.
사랑 앞에
꼴찌도 첫째도
모두가 동등한
사람들이다.
포도밭의
한 가족들이다.
우리 삶의
가장 큰 행복은
후하신 하느님을
우리가
알게되었다는 행복이다.
행복의
한 데나리온을
갉아먹는 우리의
시기와 질투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연민은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신다.
사랑 앞에서
만나게 되는
우리들 욕심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내놓으시고
우리는 욕심을
내놓는다.
우리를
맞아들이시고
거두어들이는
분 또한
하느님이시다.
모두가
가장 알맞은 때에
이루어지는
한 데나리온의
회개이다.
때에 맞게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참된
구원이다.
하느님께서는
욕심이 아닌
구원으로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신다.
새로운 삶의 방식은
하느님 중심이며
회개를 통한 행복이다.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우리의 오늘이다.
오늘 우리를
움직이게 하시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지금이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알맞은
은총의 때이다.
후하신 은총 속에
너와 내가 있다.
가장 좋은
사랑을 주고
싶어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포도밭을
구원으로
물들이시는
하느님이시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0주 수요일-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은 꼭 공정하지 않다.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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