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4일 연중 제20주일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12,49-53)
Do you think that I have come
to establish peace on the earth?
No, I tell you, but rather divis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치드키야 임금은 대신들의 말을 듣고 예레미야 예언자를 저수 동굴에 가두었다가, 악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에벳 멜렉의 말을 듣고 그를 꺼내도록 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자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신다(복음).
내 마음 속의 어둠과 빛
-키엣 대주교-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밤이 지나고 낮이 시작하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제자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대답했습니다. “스승님, 멀리 있는 소와 물소를 구분할 수 있으면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제자가 말했습니다. “멀리 있는 망고나무와 잭 플룻을 구별할 수 있게 되면,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승은 그들의 대답에 머리를 가로 저었습니다. 말하려는 사람이 없자 스승이 이야기했습니다.
“얼굴을 보고 ‘형재 자매’를 알아볼 수 있으면 비로소 어두운 밤이 걷히고 환한 낮이 온 것이오.”
어느 날 마더 데레사와 수녀들은 보잘것없이 초라한 한 할아버지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곳은 어지럽게 쌓여있는 쓰레기와 낡은 모기장, 헌 옷 등이 지저분하게 뒤엉켜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사람을 싫어해서 밖에 나가지 않고 쓰레기 같은 집안에 자신을 가둔 채 고독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와 수녀님들이 청소해도 되겠냐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자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고 가구와 물건들을 정리하고 깨끗이 닦았습니다. 구석에 쳐 박혀있는 시커먼 램프도 깨끗이 닦으니 반짝거리고 예쁜 램프가 되었습니다. 램프를 본 할아버지는 그제서야 말을 했습니다. “그건 아내가 나한테 선물한 것이오. 그런데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한번도 램프에 불을 켠 적이 없어요.”
그 때부터 수녀님들은 매일 할아버지 집에 와서 이야기도 나누고 램프에 불을 켰습니다. 차츰 할아버지는 수녀들에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도 나누고 이웃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삭막했던 할아버지 집은 다시 따뜻해졌습니다. 할아버지 집은 불을 켜지 않아서 어두웠던 것이 아니라, 마음의 불이 꺼져있었기에 어두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램프에 불을 켜서 밝아진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 마음의 불이 밝게 켜져 집도 밝아진 것입니다. 마음의 불이 꺼져 사람을 피했던 할아버지는 다시 마음의 불씨를 켜고 이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빛의 신비로움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마리아 사람이 다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엎드려서 상처에 붕대를 감아 줄 때 갑자기 불빛이 밝게 비추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불빛에 비친 얼굴을 보고 그들은 바로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신비한 빛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빛과 불이 퍼져 온 세상을 비추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아직 타지 못하고 멀리 퍼지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간절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0세기 1,2차 세계대전으로 인적, 물적 피해는 물론 국가간 화합에 많은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1980년대 냉전이 종식되었을 때 우리는 금방이라도 세계 평화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르완다, 코소보 같은 인종과 종교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도 여전히 비방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빛이 아직도 그 곳까지 비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한의 그림자들이 여전히 세상을 덮고 있어 서로가 형제 자매임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도 복음의 빛이 나를 밝게 비추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나는 내 마음속의 불만과 시기, 욕심 등으로 마음이 닫혀서, 나의 어둠이 불빛을 가려 ‘나의 형제’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불을 밝혀라. 어둠과 전쟁, 원수를 쫓아내거라.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베풀고, 이기심과 소심한 것들을 없애기 위해 마음을 활짝 열어라”
주님의 빛으로 형제를 알아보고 서로 아픔을 보듬어주고 하나되는 시작, 그것은 바로 말씀의 실천입니다. 어둠이 빛으로 바뀌는 것은 바로 사랑이 충만한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사랑입니다. 그래야 어두운 밤이 걷히고 낮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 사랑의 불빛으로 저희 마음에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소서. 아멘.
2.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 밝고 따스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충만한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사랑만이 어둠을 빛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진실되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일과 삶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하루 8시간 일을 마치자마자 삶 안에서 또 다른 행복을 만날 수가 있을까요? 일하는 8시간이 분명 적지 않은 시간입니다. 예전과 비교하면서 요즘 사람은 너무 놀고먹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과 삶의 조화를 이루겠다면 일하는 시간은 분명히 줄어야 할 것입니다.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에 대한 대가가 일에 대한 보수라고 하지요.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원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일의 강도와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될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과 삶의 균형과 조화는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을 좋아해서 그 안에 푹 빠져서 살고 있다면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연 만족스러운 삶이 될까요? 유튜브, 게임 등은 어떨까요?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만족스러운 삶은 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줄 삶을 만들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는 것도 있고 또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밖에도 자기 취미 활동에 집중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삶의 영역에 대한 만족도를 높여야 지금 내가 하는 일과 삶의 균형과 조화도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악을 실천할 때 얻을 수 있을까요? 반대인 선을 실천할 때 얻게 될까요? 주님께서는 악이 아닌, 선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당신의 삶을 통해서 계속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커다란 충격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시작하는 예수님 말씀은 평화가 아닌 불화를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면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을 것입니다. 특히 부자간, 모녀간, 고부간의 반대를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가족 안에서 일치가 아닌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선 자체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분열된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옳을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도 악은 있을 수 있고, 가족을 위해 악이 합리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면서 악을 합리화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악보다 선을 실천하면서 삶의 만족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등이 선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선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다시 한번 힘내서 진리를 향해 갑시다.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히브 12,1)
울타리가 느슨하고 모호한 공동체는 매력이 없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33ADWKQCVAE
우리나라에서 흡연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매년 5만 명에 이릅니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500만 명이 흡연으로 사망합니다. 흡연하고 장소를 옮기더라도 흡연자의 옷이나 머리카락 등에 여러 가지 유해 성분이 묻어와 주변 사람에게 건강 문제를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금연을 시작한 지 20분 후에는 혈압과 맥박이 정상화되며, 12시간 후에는 혈액 속 산소량이 정상화됩니다. 2주가 지나면 혈액순환이 좋아지고 폐 기능이 회복됩니다. 이후에는 여러 질병의 위험이 감소하며, 5~15년부터는 질병 위험이 정상인과 비슷해집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금연을 불가능한 과제로 여깁니다. 혼자 힘으로는 끊지 못해 금연보조제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약으로도 1년 금연 성공률이 20% 전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희소식이 있습니다. 담배를 정말 끊고 싶다면 이곳으로 가면 됩니다. 어떤한 국가인데 앞으로 담배 없는 나라가 될 것 같습니다. 담배를 마약과 같은 것으로 규정해 2009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은 앞으로 담배를 죽을 때까지 구입 할 수 없게 되며, 담배를 파는 가게도 찾기 어려워질 전망입니다. 이런 법을 만들려는 나라가 뉴질랜드입니다. 수십 년 후 뉴질랜드 자체가 금연할 수밖에 없는 국가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금연하고 싶은 사람들, 혹은 담배 연기가 싫은 사람들에게 천국은 어디가 될까요? 바로 뉴질랜드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천국을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세속-육신-마귀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 공동체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것들을 끊고 사랑의 법만으로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니 사탄과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이들은 그냥 교회 안에만 머물면 됩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처음에 가진 재산을 다 팔아 봉헌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법이 얼마나 엄했는지, 재산의 반만 바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벌을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 사람을 많이 늘려주신 이유는 돈 걱정하며 살 필요가 없는 사랑의 공동체라는 매력을 풍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가톨릭교회는 그런 매력을 풍기고 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우리가 신자가 얼마냐고 물으면 한국에 한 500만 정도가 된다고 말합니다. 세례만 받으면 공동체 일원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예수님께서 처음에 계획하셨던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배울 수 없습니다. 한 나라가 담배를 팔지 않아야 ‘금연하려면 무조건 뉴질랜드로!’라는 말이 성립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금연하고 싶은 사람에게 매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범위를 좁힌 것이 3년에 한 번 고해성사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무금을 많이 내고 단체에 속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바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신앙생활 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매력을 잃고 또 그 안에서 성장도 할 수 없습니다.
강형욱의 ‘개는 훌륭하다’에서는 주인의 법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개들이 많이 나옵니다. 개들이 곧 법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개들에게 자비롭고 개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주인을 물고 개들끼리 서로 물고 싸우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지옥이 되어갑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그건 개들을 방치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개를 키우거나 더 데려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에덴동산의 법은 지켜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가 바쳐졌습니다. 교회의 일원이면 당연히 교무금을 내야 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는 의미도 있고, 본당과 교구가 유지되게 하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그다음은 아담과 하와의 친교였습니다. 그 친교 안에서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법이 실현됩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세례만 받으면, 혹은 3년에 한 번 고해성사만 드리면 신자로 인정하겠다는 태도 자체가 어쩌면 자비롭게 보일 수는 있지만 교회 전체 이미지에는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놓으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세례를 통해 세상에 뿌려지는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성령의 불이 붙여진 사람과 붙여지지 않은 사람, 두 부류밖에는 없습니다. 선이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의 불을 붙여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어디로 와야 하는지 명확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주님께서 세우신 성령의 법이 실현되는 더 선이 명확한 공동체가 되도록 쇄신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3NJ3OjqBYWI
-조재형신부-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인 1972년에는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불’이라는 구호가 학교 벽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1980년이 되면 개발도상국인 대한민국이 중진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외국여행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제품보다는 일본, 독일, 미국의 제품을 선호하였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2022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35,000불이 넘었습니다. 수출은 6,400억불이 넘었습니다. 경제적인 수치에서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문화와 예술에서도 대한민국은 ‘한류’를 전하고 있습니다. ‘기생충, 미나리’와 같은 영화가 국제적인 상을 받았습니다. ‘오징어 게임, 킹덤, 이상한 변호사 우병우’와 같은 드라마는 세계인들이 즐겨보았습니다. ‘BTS'는 춤과 노래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대한민국은 ’방역‘에서도 성공을 보였습니다. ‘추적, 검사, 테스트’라는 방식으로 확진자를 줄였고, 의료진의 헌신과 시민들의 협조로 방역에서도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정말 눈떠보니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눈물 젖은 빵을 먹었던,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막아냈던 분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선진국의 문턱을 넘었던 나라들이 있습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가 있었고, 아시아의 필리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들은 선진국이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는 낙후되었고, 시민들의 삶은 어렵습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탓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경제대국인 일본은 선진국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 30년 동안 거품이 꺼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선진국은 문턱을 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의 자리를 오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이 필요합니다. 일본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세계 최고라는 자만심 때문에 혁신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스마트 폰, 스마트 TV에서 발전이 더딘 것은 아날로그에서 세계최고라는 자만심에 취해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늦게 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의 연결에서도 일본은 전화선으로 세계최초로 인터넷 망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전화선으로 인터넷 망을 연결하는 대신에 광케이블로 인터넷 망을 구축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망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기름을 기반으로 하는 차에서는 세계최고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기차 시장으로 진입하는데 늦었습니다. 일본의 거품 붕괴는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는 ‘타산지석’이 되고 있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하듯이 대한민국도 혁신과 도전이 없으면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교회는 세계교회를 선도하였습니다. 화려한 건축과 예술은 대부분 교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을의 중앙에는 늘 교회가 있었습니다. 신앙은 삶이었고, 신앙은 생활이었습니다. 유럽교회의 제도와 교리 그리고 신학은 현대사회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떠났고 그곳에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유럽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에서는 ‘선진국’이었습니다. 유럽의 표본은 교회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사상과 이념의 대립을 겪으면서 두 번의 세계전쟁을 겪으면서 유럽교회는 세계교회를 선도할 힘을 잃었습니다. 유럽교회의 신자들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심취하면서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급격히 고령화 되었고, 성직자들의 수도 줄었습니다. 신자들이 떠난 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유럽교회에 영향을 받았던 북미교회의 사정도 유럽교회와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성직자 수는 줄고 있고, 고령화 된 교회는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교회가 통폐합되고 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저는 그런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성장하고 발전하였습니다. 10년마다 신자는 100만 명씩 늘었습니다. 많은 교회가 새로 신축되었습니다. 7개의 신학교가 설립되었고 사제들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도 최근 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성소자가 감소하고 있고,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으며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변화와 쇄신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눈에 보이는 유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을 물려주려고 하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신앙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에 충실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삶입니다. 자녀들의 결혼도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 중에서 선택하도록 하였습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거룩한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배우자가 신앙이 없으면 교리를 받아 세례를 받은 후에 혼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학력과 능력 그리고 재산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게으름, 나태함, 무기력한 삶을 떨치고 불꽃처럼 활활 타오릅시다!
-양승국신부-
세상과 인류 구원을 위해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백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분히 복합적이었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는 사람들은 대견스럽게 바라보셨습니다. 오랜 세월 폭군들의 압제에 시달리던 식민지 백성들의 고통 앞에서는 저절로 연민과 측은지심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 돌아서지 못하고 과거의 악습에 푹 빠져 도무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가장 중요한 자신의 영혼과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오늘 하루 희희낙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무런 준비도, 변화를 위한 노력도 없이,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영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고, 강력한 경고 말씀이 뒤따랐습니다.
오늘 엄청 강력하고 섬뜩한 경고 말씀은 이런 분위기를 배경 삼아 나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복음 12장 49절, 51절)
‘세상에 불’ ‘평화가 아니라 분열’ 등의 강력한 표현은 묵시 문학을 배경으로 하신 말씀이라, 조금 난해하기에, 잘 새겨들어야만 합니다. 묵시 문학에서는 종말이 다가오면 가정에서부터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붕괴 현상이 초래될 것을 예언합니다. 따라서 가정의 분열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전조라는 것입니다.
한 가족 안에서, 다섯 식구 중 3:2로 갈라져 맞설 것이라는 말씀,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이 맞설 것이라는 말씀, 참으로 듣기에 거북하고 난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종말이 다가오면 하느님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즈카리야서에는 더 끔찍한 말씀이 적혀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온 땅에서 삼 분의 이가 잘려 죽고 삼 분의 일만 살아남으리라. 나는 그 삼 분의 일을 불 속에 집어넣어 은을 정제하듯 그들을 정제하고 금을 제련하듯 그들을 제련하리라.”(즈카르야서 13장 8~9절)
우리 역시 더 이상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을 내려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지르신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은 낮처럼 밝아졌고 그분께서 드신 횃불이 온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무관심과 타성은 쫒겨나야 하고, 예수님의 불은 세상 방방곡곡으로 번져나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경계하시는 백성들의 삶은 열정없는 삶입니다. 살아있어도 이미 죽어버린 삶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뜨뜨미지근한 삶입니다. 열정이 없는 신앙, 불꽃이 없는 설교, 영혼이 없는 얼굴, 뜨거운 사랑 없는 삶! 이제는 떨쳐버려야 할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지상 생활은 그야말로 불꽃 같은 삶이었습니다. 매일 활활 타올랐습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알차게, 역동적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생인데, 금쪽같은 순간들이었는데, 아무런 영양가 없이, 빈둥빈둥 허송세월한 지난 삶이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우리네 일상이 비록 구차스럽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 대상, 존재라 할지라도 지극정성으로 대하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게으름, 나태함, 무기력한 삶을 떨치고 일 분 일 초라도 의미 있게 보내야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의 전례는 우리의 영혼을 태우는 뜨거운 불입니다.
제1독서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대신들의 요청으로 죽음의 저수동굴에 던져져 박해받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언자의 길은 참으로 고달픕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기존의 질서와 평화를 깨뜨리고 백성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는 자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썩은 세상일수록 진리와 정의를 더 강하게 외면하고 박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바로 오늘 복음과 연결됩니다.
제2독서는 “우리가 달려야 할 길”(히브 12,2)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는”(히브 12,1) 일이요, 또 한편으로는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히브 12,2)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십니다.
여기서의 불은 하늘나라의 선포를 말합니다.
한편 '불'은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예레 20,9; 23,29)과 엘리야 예언자의 말(집회 48,1)을, 신약에서는 세상에 대한 종말 심판(마태 3,11; 7,19; 마르 9,48; 루카 3,16)을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하시며, 열절한 마음으로 저희에게 '불'을 지피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성령에 의해서 타오르는 '말씀의 불혀'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이나 밖이나 이 '불'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가진 기득권으로 불빛을 짓누르고 공격합니다.
불의와 거짓은 물러가기보다 오히려 '불'을 꺼버리려 온갖 술수를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언자는 더더욱 박해받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루카 12,50)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물세례’로 전도활동을 시작하시어 십자가에서 ‘피 세례’로 전도활동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새 생명(구원)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받아야 할 이 ‘피의 세례’와 우리 안에 타올라야 할 이 ‘성령의 불’은 하나의 큰 도전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는,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 걸어야 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모순과 부조리, 불의와 거짓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세상과 맞서야만 하는 일이요, '불'로 어둠과 거짓을 사르고 자신을 파괴하고 분쇄시켜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분열 속에서 빛과 어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문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4항)에서는 말합니다.
“교회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 시대의 표지를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이사 9,5)일진데, 어찌하여 분열을 일으키실까?
그것은 파괴를 위한 분열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분열인 까닭입니다.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과 세상의 불의와 부정과의 분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과 세상의 불의와 일치를 이룰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
(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불’은 우리를 갈라놓고 분열시킵니다.
오늘도 세례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분열시킵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기 위하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흔히 분열을 회피하려 하지만, 분열은 회피하고 덮어버려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그 무엇입니다.
바로 그 분열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분열이 없는 듯 보여도, 사실은 거짓된 평화 속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열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열 안에서 빛과 어둠을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분열은 어둠으로부터 오기도 하지만 빛으로부터 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카오스 위에 머무르는 영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위를 감돌고 있었다.”
(창세 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카오스 속에서 빛과 어둠을 보아야 합니다.
분열이 없는 것이 평화인 것이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진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이신 당신께서는 오늘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십니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주님!
이 칼의 불꽃이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루카 12,49)
주님!
당신은 제게 사랑의 불을 지르십니다.
제 속의 어둠을 태워 새로운 살이 돋게 하시고, 이기심을 태우고 자비가 돋게 하소서
무관심을 태우고 사랑이 돋게 하시고, 이제는 제게서 사랑의 분열을 일으키소서.
제가 중병에 걸린 까닭입니다.
제 살을 가르고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고 정의와 불의를 가려내소서.
제 안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당신 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제 20 주일-젖은 짚단까지 태우는 사랑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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