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8월 11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2. 8. 11. 06:15

2022 8 11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오 18,21―19,1)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him?
As many as seven times?"
Jesus answered,

"I say to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이스라엘이 유배를 당하여 끌려갈 것을 미리 보여 주는 예표로 삼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시며 빚을 탕감받은 악한 종의 비유를 드시고는,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가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아주 인상적인 글을 쓰셨습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이다.”

이 문장에서 커다란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것에서 계속 감탄하는 사랑은 행복의 시간이 길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커다란 행복만을 꿈꾸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말하며, 이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하고, 내 가족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 남부끄럽지 않게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만을 생각하며 쫓아가는 사람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전부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의 빈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행복을 자주 느끼고, 또 행복감을 길게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엄청난 성취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엄청난 성취는 순간의 만족에 그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상도 내 행복을 위해 필요한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귀한 시간입니다. 행복의 빈도를 높이는 것은 일상의 모든 것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크고 대단한 일회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동태복수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즉,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법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수가 아닌 용서하라는 새로운 윤리적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유다인들도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여 남을 용서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는 4번을 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새 나라의 새 법에서 몇 번까지 용서해주어야 하는지를 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곱 번을 생각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기대와 달리,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용서에는 한도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빚진 것을 처리하는 한 왕의 처사를 하늘 나라에서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과 비교 설명하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커다란 용서를 통해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용서에는 한도가 없기에, 계속된 용서를 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의 용서 역시 계속해서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인 것처럼, 우리가 용서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면서 행복도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오늘도 주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위안은 극도로 힘들고 추한 순간, 서로에 대해 아름다운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다(데이비드 화이트).

 산사람은 죽은 개를 걷어차지 않는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RjEEcU3XNnA 

 1980년 '모이자 노래하자' 녹화장으로 선생님 한 분이 어린 제자를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이 말하길 “얘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천식으로 일을 할 수 없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하며 홀로 6남매를 키우고 있다, 수술 안 하면 죽는다, 아이 좀 살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진행자였던 이상용 씨는 두말하지 않고 바로 “그렇게 하자, 알겠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서울대병원에 갔는데, 수술비가 1,800만 원이라는 말에 그는 기절할 뻔했습니다. 당시 열 평짜리 아파트값이 1,000만 원이었고, 이상용 씨는 650만 원짜리 전세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전셋값 세 배에 해당하는 수술비를 대겠다고 했으니 기절할 뻔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도 어린 시절 병약한 몸으로 태어나 생사를 넘나들었기에 그 아이의 비극이 남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지 관리상 야간업소 출연하지 않았지만, 그 아이를 위해 야간업소 세 군데를 다니고 바자를 하고 돈도 빌려 결국 수술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습니다. 수술받은 아이의 아버지가 감격해 방송에서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가 자기 아들을 무료로 수술해주었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자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 부모들이 우리 아이도 수술시켜 달라며 이상용의 집으로 몰려온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수많은 아이를 돕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대신 ‘한국 어린이 보호회’를 만들어 한 명씩 수술해주기로 합니다. 그렇게 그는 사무실을 내고 16년 동안 567명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찾아주었습니다.  

 

    하지만 1996년 11월 4일 한 시사 프로에서 뽀빠이 이상용 씨의 충격적인 사건이 폭로됩니다. 뽀빠이 이상용 씨가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빌미로 국민의 성금을 가로채 벤츠를 타며 40억 호화주택에 산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심장병 어린이를 돕던 의인에서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희대의 파렴치범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가 이미지가 좋았을 때 국회의원에 출마하면 무조건 당선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체질적으로 정치를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교황님과도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터였습니다. 교황님은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사흘 동안 이상용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검은 손길이 다가왔습니다. 당시 엄청난 힘을 자랑하던 정치인이 그에게 고향 대전에서 출마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용은 단번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정치인들이 이상용에게 보복한 것입니다. 어느 날 우정의 무대 녹화를 끝내고 돌아오니 세상이 발칵 뒤집힌 것입니다. 사실 1996년 당시 이상용은 20년 된 지프차를 타고 사는 집은 융자금이 막 상환된 상태였고 당시까지 수술받은 567명의 수술비는 거의 이상용 씨의 돈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이상용 씨는 집 밖을 못 나갔고 우정의 무대는 폐지되었으며 수술을 기다리던 어린이들은 수술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전역에서 우리 아들은 그렇지 않다고 프린트물을 돌리던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사망하였고 이상용 씨는 왼쪽 눈이 실명되었습니다. 당시 권력 기관들이 총동원되어 ‘심장병 어린이 재단’을 탈탈 털었지만 이상용 씨의 공금횡령은 전혀 없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문제는 이 무혐의 처분에 대해 보도한 언론사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뽀빠이 이상용 씨가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나왔기 때문에 활동을 못 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후에 이상용 씨는 김수환 추기경의 조언대로 수중에 남은 돈 20만 원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관광 가이드를 하며 딸을 시집보내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당시 그의 일당은 3만 원이었고 가장으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엉엉 울기도 했습니다. CD를 만들고는 휴게소 화장실 앞에서 직접 팔았으며 즉석 공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계에 큰 보탬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춘천 MBC 사장 유수열 씨가 “상용아, 와라. 나는 너 안다”라며 ‘강원 매거진’을 통해 이상용은 방송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철처: ‘뽀빠이 이상용 거짓 인성 논란?’, 유튜브 채널, ‘트롯 뉴스’]

  

    미움은 죽은 놈이 산 사람을 때리며 자신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려는 행위입니다. 산 사람은 죽은 개를 걷어차지 않습니다. 이상용 씨가 그렇게 맞은 것은 살았기 때문입니다. 산 사람을 때려서 자신도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기에 죽은 사람입니다.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리고 우리라면 용서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이상용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은 20명, 건강은 80평, 행복은 150평에 사는 사람입니다.”

아마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용서했을 것입니다. 그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용서받았다는 믿음으로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것인지 용서하지 않을 것인지는 내 힘으로 살 건지 다른 누군가의 덕으로 살 것인지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내 힘으로 용서하려고 하는 것은 내 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빚을 탕감해 준 임금 덕분으로 산다는 것을 깜빡 잊었습니다. 그러니 임금도 더는 그 사람에게 자신 덕분으로 살게 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우리를 용서해주신 하느님 덕분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신부님이 강론하다가 신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순간 성당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한 원로 신자분이 손을 드셨습니다. 신부님은 “여러분, 저분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라고 하며 박수를 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물었습니다. 

    “어떻게 모든 이를 용서하실 수 있으셨죠?”

그러자 그분이 대답했습니다. 

    “어, 원래 미운 인간들이 있었는데 먼저 다 죽었어….” 

 

    죽음이란 것을 통해 이 신자분은 미운 인간을 묻어버리셨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어떤 신자분이 고해성사를 보셨습니다. 

    “저는 시어머니가 미워 죽겠어요. 시집올 때부터 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으셨어요.”

사제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용서하시겠지?’라는 생각으로 그 자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그 자매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 두 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한 분은 미운 사람을 죽음이라는 것으로 묻어버렸고, 한 사람은 죽음으로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덕분으로 산다면 이미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덕분으로 부활합니다. 이것은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는 하느님 자비에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탕감해 준 1만 탈렌트입니다. 이 1만 탈렌트에 100데나리온을 묻어버릴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1만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을 미워한다는 말은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1만 탈렌트로 산 사람은 죽은 개를 걷어차지 않습니다. 1만 탈렌트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산 사람이 되게 합니다. 같이 구원받은 사람은 나에게 잘못하지 않을 것이니 미워할 이유가 없고, 구원되지 못한 사람은 죽은 개에 불과하니 굳이 걷어찰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말은 아직 1만 탈렌트를 탕감받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소명과 응답에 관하여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0SfvpqISCBk

 -조재형신부-

 

산보 중에 인터넷 강의를 듣는 것은 즐거움입니다일전에 피부질환과 면역체계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우리의 피부는 부드럽지만 우리의 몸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있습니다우리의 피부는 바이러스에 의해서 각종 염증이 드러납니다단순포진대상포진지루성 피부염아토피건선이 있습니다최근에는 원숭이 두창도 새롭게 피부 염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이런 피부 염증은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하나는 과로와 긴장으로 우리 몸의 면역력이 약해질 때입니다다른 하나는 과다한 영양 섭취로 인한 비만과 화학 물질에 노출되는 환경의 변화라고 합니다겉으로 드러나는 염증을 치료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런 염증의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그날의 피로는 그날 푸는 것이 좋고적당한 운동으로 몸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좋습니다걱정과 근심은 하느님께 맡기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씀으로 위로를 얻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염증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걱정과 근심 그리고 원망과 분노입니다걱정과 근심은 나의 행동과 마음에서 생길 때가 많습니다원망과 분노는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마음에 염증이 생기면 그것이 우리의 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기쁘지 않습니다걱정과 근심 그리고 원망과 분노는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합니다그래서 우리는 걱정과 근심 그리고 원망과 분노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다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걱정과 근심 그리고 원망과 분노를 없애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영어로 용서를 나타내는 말은 ‘Forgive’입니다. For는 위하여라는 전치사이고, Give는 주다.’라는 동사입니다용서는 위하여 준다.’는 뜻의 합성어입니다목적어는 없습니다우리는 목적어를 다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첫째나를 위하여 줄 수 있습니다이것이 어쩌면 용서해야하는 실질적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용서하지 못하고 분노가 가득차면 내가 힘들고 너무 괴롭기 때문입니다한국인들에게 있는 화병도 어쩌면 용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용서하지 않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둘째상대방을 위해서 줄 수도 있습니다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수오지심이 있습니다이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용서 받지 못한 사람도 가슴에 이 맺히기 마련입니다많은 것을 가졌어도삶이 풍족해져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고백성사는 이런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갖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셋째하느님을 위해서 줄 수 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우리가 잘못을 해도 뉘우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시고우리가 범한 더 큰 잘못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용서를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루가복음 15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유명한 돌아온 아들’ 이야기입니다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용서해 주었고아들을 위해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복음은 돌아온 동생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큰 아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큰 아들은 자기에게 잘못한 것도 아닌 동생을 용서하지 못하였습니다아버지의 권한인 용서에 대해서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불만을 이야기 합니다어쩌면 이것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자비는 하느님의 몫이고정의는 인간의 몫인 것 같습니다세상의 질서는 정의가 바로서야 합니다그러나 신앙은 먼저 자비가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사랑이용서가자비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지 못해서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예전에 이런 표어가 있었습니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자!’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 클라라

 -양승국신부-

 

언젠가 아시시에 들렀을 때의 경건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특히 클라라 성녀와 동료 수도자들이 기거했던 다미아노 성당에 들렀을 때, 그 가난하고 소박한 분위기가 눈에 선합니다.

  

그 좁디좁은 공간에서, 처참할 정도의 청빈한 생활 가운데서도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자매들과 함께 찬미가를 불렀던 그녀였습니다. 가난이라고 다 똑같은 가난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느꼈습니다. 웬일인지 그녀의 가난은 우리들의 옹색하고 남루한 가난과는 달리 찬란하고 영롱했습니다.

  

클라라 성녀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분 계십니다. 가난과 겸손의 성인이자 제2의 예수 그리스도라 불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십니다. 그가 지녔던 인간적 성품, 그가 추구했던 가치관, 그가 소유했던 신앙과 삶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던지 당대 수많은 청년들이 그와 같은 길을 걷고자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녀 역시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승이 주도한 가난을 통한 영적 쇄신 운동에 흠뻑 매료된 그녀 역시 뭇 남성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세상을 등졌습니다. 귀족 가정 출신 자녀로서의 풍요와 특권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상속 재산도 자발적으로 포기했습니다.

  

출가 이후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제시한 영적 여정을 단 한 치 오차도 없이 충실히 따랐습니다. 클라라의 영성은 프란치스코의 영성과 동일합니다. 가난과 겸손과 사랑입니다. 그녀가 자주 강조한 것은 그냥 가난이 아니라 겸손과 함께 하는 가난, 그리고 동시에 가난과 함께 하는 겸손이었습니다. 그녀의 생애 안에서 가난과 겸손은 다정하게 손을 잡았습니다. 그녀 안에서 이루어진 철저한 가난과 겸손의 실천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에로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클라라의 삶이 스승 프란치스코와 다른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녀는 봉쇄구역 내에서 프란치스코 영성에 따라 관상 수도생활을 해나간 것입니다. 그녀가 평생토록 관상 수녀회 안에서 끊임없이 바라본 것은 프란치스코가 바라본 것과 동일입니다. 곧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동시에 성체 안에 머물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사람들은 ‘복사판 프란치스코’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또는 ‘제2의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의 영혼에서 나온 여인’, ‘프란치스코의 거울’, ‘프란치스코의 여성적 얼굴’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를 일컬어 ‘복되신 스승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즐겨 불렀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클라라는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다미아노 성당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 당시 아시시의 교구장이셨던 귀도 주교님께서는 극구 사양하는 그녀를 수녀원장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 직책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수녀원장인 그녀였지만 수녀원의 허드렛일은 당연히 자신의 일이려니 생각하고 언제나 콧노래를 부르며 기쁘게 해나갔습니다. 그녀가 유독 좋아하던 일이 한 가지 있었는데, 동료 수녀들이 식사할 때 ‘서빙’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밭일을 끝내고 흙 먼지투성이의 발로 들어오는 동료 수녀들의 발을 정성껏 씻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발을 다 씻긴 그녀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재빨리 수녀들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클라라의 잠자리는 아무것도 깔지 않은 맨바닥이었습니다. 냇가에서 주워온 돌이 베개였습니다. 작디작은 빵 한조각과 물 한잔이 매끼니 식사였습니다. 실내장식이나 난방은 고사하고 아무런 설비도 안 갖춰진 누추한 거처에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가난이 무엇인지, 추위에 떤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고픔이 무엇인지, 피로에 지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온 몸과 마음으로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더할 나위없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그녀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정원에 핀 첫 꽃송이로서 마치 빛나는 별처럼 반짝였으며, 희고도 순수한 봄꽃과도 같이 향기로웠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 안에 프란치스코의 딸이었으며 가난한 클라라회의 창설자였습니다.”

 

클라라는 한평생 봉쇄구역 안에서의 관상생활에 전념하였지만, 자신의 삶을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음의 서한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하늘 아래에서 내가 바랐던 아무도 훔쳐갈 수 없는 그 기쁨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에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도 주님 안에서 늘 즐거워하며, 슬픔이나 우울이 그대를 덮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원을 영광의 광채 속에 두십시오.”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 클라라

 -이영근신부-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는 공동체 설교(마태 18장)에서 먼저 공동체에서의 작은 이들의 가치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마무리 하셨듯이, 이어서 공동체에서의 형제애를 말씀하시면서 먼저 죄지은 형제에 대한 '사랑의 교정 4단계'에 대해 이야기하신 다음, 이제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왜 용서를 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편에는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서 청하지도 않은 빚을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마태 18,30)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이 비유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용서'의 특성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는 것이요, 셋째는 '용서하되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

 

이는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되 무한히, 계속해서,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 혹은 몇 번 용서해보고 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미처 받아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말입니다.

 

둘째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마태 18,33)

 

이는 용서의 이유를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기도 전에, 혹은 잘못을 고백하거나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 까닭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사랑하셨고,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구원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내 형제가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혹은 비록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고백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함으로써 하느님의 용서가 그들에게 베풀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역시 하느님의 용서에 참여하게 되고, 그 용서를 통해 구원으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용서해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먼저’ 우리가 용서를 통해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용서를 통해 타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용서하되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 35)

 

이는 용서의 태도를 밝혀줍니다.

곧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선심 쓰듯이 혹은 값싼 동정심이나 의무감이나 보상을 얻기 위한 방편에서가 아니라, 남의 시선이나 평가 또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되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망도 원한도 없는, 분노도 미움도 보복도 없는, 오직 사랑만이 있는 용서입니다.

 

결국 '용서'란 왕이 빚진 종을 '가엾이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 보내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입었기에, 이제 우리 역시 이러한 용서와 자비를 이웃과 형제들에게 베풀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

 

주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나아가,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게 하소서.

오늘도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은혜를 기억하라」

-반영억신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은혜를 입으며 삽니다. 부모나 스승의 은혜뿐 아니라 이웃의 은혜도 큽니다. 그리고 자연의 은혜는 더욱 큽니다. 그러나 이 은혜로움에 대하여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 반대로 살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을 생각하면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니 마음이 박해 집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풀었으면 그 보답을 바라지 말고, 남에게 주었으면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미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대하게 되면 기대하는 만큼 “네가 그럴 수 있나?”하는 서운함만 커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억지로 눈감아 주고 참아줄 수 있는 한계를 일곱 번으로 표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 자비심으로 용서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한없이,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할 대상을 바라보면 용서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바라보면 용서가 가능합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은혜를 입었고 앞으로도 입게 될 것이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허물에 대하여 용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23,34).하고 기도하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했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 역시 예수님의 힘을 입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탈출기34,6-7에는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에 대하여 끊임없는 자애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없는 은혜를 기억하며 나도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이미 많은 용서를 받았고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남에게 관대해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생에 있어서도 허물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지녔다는 사실을 안다면 용서 안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고,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용서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에 대해 칭찬 받고 싶은 마음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3,12-13).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게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19-21).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악에게 굴복당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먼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받을 은혜를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용서할 사람은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빚을 탕감해 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이웃의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할 때입니다. 당신의 은혜를 돌 판에 새기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강론
유감스럽게도 문제는 우리에게 작은 불의를 행한 형제들과 대적하고자 할 때 생깁니다. 비유 말씀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마태18.28) 이 장면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빚을 지고 있을 때는 자비를 청하지만 우리에게 빚진 이가 있을 땐 정의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이 행동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할 행동이 아니며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형태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가르치셨고 한계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주어라’(22절)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정의 실현이 아닌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정의로운 것으로 제한을 둔다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랑의 가치를 보여준 십자가 아래에서의 자비를 드러내야 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보이지 못할 것입니다. 비유 말씀 마지막 부분을 잊지 맙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35절)

『용서』

 -송영진신부-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을 잘 받아서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회개를 안 하는 것은, 이미 주신 용서를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하느님의 용서를 나타냅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활동을 시작할 때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선포했는데(마태 3,2; 마태 4,17),

이 선포는 “하느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셨다. 그러니 회개하여라. 그리고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의 은총’을

형제에게 나누어주는 일이고, 그것은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용서의 은총’을 주신 것은,

형제에게 다시 나누어주라고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에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용서의 은총’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거부해도,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은 그 형제에게도 내립니다.

내가 그 형제를 용서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스스로 회개하고 노력해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형제를 용서하지 않은 나는

‘주신 은총을 거부해서 구원의 자격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그 형제는 나하고는 상관없이 ‘구원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일이 그렇게 될 때, “너무 억울하고 불공평하다.” 라고

하느님께 항의할 수 없습니다.

은총을 받아 누릴 기회를 거부한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베드로 사도가 ‘일곱 번’을 말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 최대한의 숫자를 말한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하느님께서는 일곱 번은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일곱 번까지는 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질문은 ‘선의’로 한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일곱 번’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일곱 번’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라는 예수님 말씀은

‘무제한으로’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무제한’입니다.

그러나 ‘무기한’은 아닙니다. ‘심판 전까지’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임종 전까지’입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무제한’이니 우리도 무제한으로 용서해야 하는데,

용서받는 쪽에서 생각하면, 회개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제한으로 용서의 은총을 주시지만,

회개하지 않고서는 그 은총을 받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사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그렇게 죄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 죄지을 때마다 회개한다고 말하면,

그 회개가 진짜일까?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것도 큰 죄이고,

회개를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것도 큰 죄입니다.

그런 회개는 거짓 회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 뒤에 나오는 ‘매정한 종의 비유’는

‘하느님의 큰 용서’를 설명해 주신 가르침이기도 하고,

“너희가 이미 용서받았으니 너희도 용서하여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마태 18,24-27).”

 

여기서 ‘만 탈렌트’ 라는 빚과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라는 말은,

‘주님의 자비’ 외에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방법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곧 구원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는 주인의 명령은,

그 빚을 갚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빚을 갚을 길이 없는 종들을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으로 그 빚을 갚아 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라는 종의 말은,

빚을 갚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하는 말입니다.

(“갚을 수도 없는 큰돈을 왜 빌렸나?” 라고 묻는 것은,

주제에서 벗어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은, “인류는 어쩌다가 그렇게 메시아의 구원이 필요할 정도로

큰 죄를 지었는가?” 라고 조상들을 탓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은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인류를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마음이 곧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거액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아주 적은 금액을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둔

이야기는(30절), 인간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자기가 받은 큰 은총은 금방 잊어버리고,

이웃 때문에 생긴 작은 원한은 오래 기억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비결은 매사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1테살 5,18).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라는 임금의 말은(33절) 이 비유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라는

말씀도 기억해야 합니다.

 용서는 용서가 될 때까지

 -김찬선신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오늘 베드로는 나에게 죄 지은 형제에게 몇 번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우리가 자주 하는 질문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일곱 번 정도를 생각한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대답은 일흔일곱 번이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용서는 용서가 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미워지지 않을 때까지입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한 형제가 또다시 미워지지 않고,

간신히 용서했는데 또 죄를 지어도 화가 나지 않을 때까지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