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오 19,3-12)
For this reason a man sha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be joined to his wife,
and the two shall become one flesh?
So they are no longer two, but one flesh.
Therefore, what God has joined together,
man must not separat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게 자기가 저지른 역겨운 짓들을 알려 주라고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말씀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내를 버려도 되냐는 바리사이의 질문에,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술관에 가면 작품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설명을 보면서 분명히 지식과 견문을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 설명의 틀에 갇히면서 작품의 깊은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나만의 느낌과 감정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찾아보는 작가의 의도 역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명 안에 갇히게 되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구나.”라면서 생각의 지평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
독일 뒤셀도르프의 미술관 ‘인젤 홈브로이히’에는 어떤 설명도 붙어있지 않다고 합니다. 작품 자체를 경험하게 하려는 취지입니다. 그래서 설립자 칼 뮐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랑, 인생, 당신의 아이들은 설명될 수 없다.”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인간관계는 절대로 설명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러나 설명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자기 틀에 그 설명을 맞추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설명되지 않아도 괜찮은, 그래서 더 성장할 수 있는 우리를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는지에 관해 묻습니다. 사실 이혼에 관한 율법은 십계명 안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신명기(24,1-4)에 이유만 닿기만 하면 여자를 내몰 수 있었고 그때 이혼장을 써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유배 생활을 거치면서 결혼을 일종의 매매 계약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 되었고, 여자는 재산 소유권과 상속권이 없었습니다. 이혼할 수 있는 권리도 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혼인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태초에 하느님께서 만드신 남녀 결합의 근본이념에도 어긋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혼인법을 없애고 하느님의 원래 뜻으로 되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늘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자신이 이해할 설명을 상대방이 해야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면 상대방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설명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부관계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모든 관계엔 '압도적인 뜻'이 필요하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MPtA3UeAkuU
요즘 상영 중인 ‘한산-용의 출현’을 보면 정말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선 수군의 56척 학익진 공격으로 왜군의 73척을 공격하여 왜선 47척을 격파, 왜군 1만 명을 전사시킨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이순신 장군은 육지에서만 사용하던 학익진 전법을 바다에서 쓸 생각을 했을까요?
이순신 장군이 싸워야 했던 상대는 일본군만이 아닙니다.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원균이 그런 역할을 맡습니다. 원균은 상식에 어긋나는 생각을 하는 이순신 장군을 믿지 못하고 그런 식이면 자신은 빠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우세한 일본에 원균까지 빠지면 이기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어느 날 꿈을 꿉니다. 말을 타고 적군을 쫓고 있었는데 갑자기 적군이 사라지더니 커다란 성이 자신을 둘러싸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익진은 이처럼 상대의 배를 성처럼 둘러싸는 전술입니다.
하지만 조총과 월선을 통해 전쟁하는 빠른 일본 배의 추격을 따돌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학익진을 만드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면 일본 배들이 조총으로 쏘고 배에 달라붙어 월선하게 됩니다. 그러면 활로 싸우는 조선군이 이길 가망이 없습니다. 이때 거북선이 큰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대포가 있기에 멀찍이서 포격을 가하는 방법이 가장 좋지만, 이것저것을 다 따졌을 때 학익진만큼 좋은 전술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이순신에게 질투가 나고 반기를 들고 싶어도 전술에 대해 확신하고 있으니 원균도 이것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누군가를 일치시키는 일은 서로의 이견조율이 아닙니다. 모든 의견을 압도하는 뜻입니다. 모든 이견을 압도하는 뜻이 그 공동체에 존재한다면 공동체는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그 뜻이 없다면 공동체는 분열로 무너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모세는 이유만 있으면 아내에게 이혼장을 써주어도 된다고 말했다고 따집니다. 예수님은 부부 사이에 사람의 이유가 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부부를 머리와 몸, 곧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머리와 몸이 하나가 되었다면 더는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뜻이 부부 사이에 존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이 사람의 뜻을 압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자녀들이 서로 싸운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자녀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부모의 뜻이 필요합니다. 자녀들끼리의 이견조율로는 평안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부모의 뜻이 자녀들을 지배할 때 자녀들은 사이좋은 사이가 됩니다.
‘개는 훌륭하다’에서 한 지붕 일곱 마리의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개들이 등장했습니다. 사실 주인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질투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싸우지 말라는 뜻을 압도적으로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개들에게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개들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강 훈련사는 주인이 압도적인 법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애정도 좋지만, 우선은 기계적으로 개들을 대하라고 합니다. 자신이 먼저 보여주고 이렇게 말합니다.
“규칙을 정확하게 강조하면서 따르는 느낌이 있죠?”
개들에겐 인간의 명령이 압도적인 뜻입니다. 개들끼리는 조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법이 되어주어야 개들에게 평화가 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하느님께서는 부부에게도 형제간에도 교회 공동체에도 당신의 뜻이 스며들게 하십니다.
부부는 관계의 완성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혼인 서약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셨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서약을 목숨을 걸고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뜻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관계 안에서 하느님 뜻을 찾읍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맺는 관계에서 분열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신의요 예지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조재형신부-
아침미사를 마치고 제의방으로 왔는데 수녀님이 어르신 한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고백성사를 보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기쁜 마음으로 성사를 드렸습니다. 어르신은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10분이 지나면서 20분이 지나면서 저는 마음이 조금 급해졌습니다. ‘죄를 이야기 해 주세요.’라는 말이 입에 머물렀지만 차마 그렇게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르신은 30분이 조금 넘은 다음에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어르신은 지나온 세월의 이야기를 하셨기에 사죄경은 드렸지만 보속까지는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어르신 이야기를 듣고 나오면서 잠시 저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30분 이야기를 듣는 것인데 마음이 조급해졌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할 때는, 술자리를 할 때는 몇 시간도 재미있게 보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행복은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아직 행복한 사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매일 강론을 준비하면서 사용하는 것은 컴퓨터입니다. 컴퓨터에 저의 생각을 옮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키보드’입니다. 키보드가 없으면 문서를 작성하기도 어렵고, 원하는 정보를 얻기도 어렵습니다. 키보드에는 많은 자판이 있습니다. 어떤 곳은 많이 사용해서인지 반들반들 합니다. 하지만 어떤 곳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키보드 상단에 있는 ‘F'라는 기능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전문가들에게 필요한 기능인 것 같습니다. 컴퓨터의 키보드는 사용자가 있어야 기능을 합니다. 키보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입력하면 모니터에는 사랑이 깜박입니다. 미움이란 말을 입력하면 마찬가지로 미움이 모니터에 깜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의 몸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몸이 누군가를 위해서 도움을 주는 곳에 있다면 나의 마음도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사랑, 용서, 희망이라는 말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합니다. 저도 질문을 받곤 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은 ‘사제생활 할 만하십니까?’였습니다. 그래서 그 질문을 제목으로 서품 25주년 은경축 기념 책자를 만들었습니다.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사제생활 할 만합니까?’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충실히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오늘은 질문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질문에는 3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몰라서 묻는 것이 있습니다. 길을 묻기도 하고 문제의 해결 방법을 묻기도 합니다. 둘째, 상대방의 실력을 묻는 것이 있습니다. 영어는 어디까지 했는지, 철학은 어디까지 배웠는지, 수학의 방정식을 묻는 것이 있습니다. 면접이나 시험이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 깨우침을 주는 물음이 있습니다. 선불교에서 고승이 묻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냐?”
오늘 성서 말씀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곤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다려 주시고 용서를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혼인은 하느님 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겠다고 약속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인의 약속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키보드의 자판을 생각합니다. 다른 자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저의 손가락을 만납니다. 언젠가 단 한번 쓰여질 그 날을 위해서 오늘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외로운 자판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나의 모든 것, 내가 만나는 이웃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느님 앞에서는 컴퓨터의 키보드와 같은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저는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주님 그분밖에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성녀 요한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도자(1572~1641)는 영성생활의 진보와 성장에 있어서 영적 동반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셨습니다.
요안나의 영적 동반자는 당대 대세남이셨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큰 슬픔에 잠겨 있던 그녀에게 살레시오 주교는 존재 자체로 빛이요 생명이요 구원이었습니다.
사별의 깊은 아픔을 겨우 추스르며 열심히 자녀들을 양육하던 요안나는 33세 되던 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그녀 인생의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찾아온 것입니다.
당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명성과 인기를 하늘을 찔렀습니다. 준수한 외모와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유자, 감동적인 설교가였던 그를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고 존경했습니다. 특히 당대 여성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거의 아이돌 급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께서 말씀을 시작하면 신앙심이 깊은 여인들은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듯이 그를 둘러쌌습니다. 그 중에 한명이 요안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강론과 인품에 완전 매료된 요안나는 그분의 지혜롭고 슬기로운 영적 지도 하에 신심이 일취월장하게 되었고, 의기투합한 두 분은 전통적인 수녀원과는 많이 다른 신심깊은 과부들을 위한 수녀원(성모 방문 수녀원, Order of the Visitation of Our Lady)을 설립하게 되었고,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한 백작의 아내요 여섯 아이의 어머니였던 요안나가 훌륭한 영적 지도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을 만나 수도자로 거듭나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성모 방문 수도회의 창립자가 되었다는 것, 오늘 우리 교회와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큰 의미와 과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한다면 세상 안에서도 아주 훌륭히 수도생활 못지않은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신도로 살아가면서도 아주 높은 성덕의 정상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 같은 훌륭한 영적 지도자를 찾는 일입니다. 그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일입니다. 영적 여정에서 생기는 모든 어려움 앞에 겸손되이 자문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영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일입니다.
“저는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주님 그분밖에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저는 당신의 말씀을 직접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종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곧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분을 통해 저를 온전히 바치겠습니다.”(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녀)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설교를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유다지역으로 가시자 그곳에서도 많은 군중이 따랐고 그들을 고쳐주셨는데, 당신을 시험하려는 바리사이의 질문, 곧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라는 질문을 받고, 결혼과 이혼과 독신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을 허락해준 이유가 이혼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혼이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창조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이미 이혼당한 여성들을 그대로 놔두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이혼장이라는 서류도 없이 버림을 받게 될 경우, 여성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생활하다 붙잡히면 간통죄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마태 19,5)
교부들은 이 말씀을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관계로 해석해 왔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하여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하여 기뻐하시리라.”
(이사 62,5)
이는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남편으로 맞이하고, 예수님의 아내가 되는 혼인성사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이 깊은 관계가 우리를 가장 품위 있는 존재로 부각시켜줍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엄마와 아버지를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당신의 고유한 작품일 뿐, 내 자신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당신으로부터 건네진, 당신의 형상이 새겨진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서로를 위하고, 서로에게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권리, 똑같은 의무를 지닌 서로의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부족하기에, 서로를 껴안아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마태 19,5)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 만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 만이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떠나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헤어진다는 것」
-반영억신부-
남성은 결혼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여성은 경제적 안정을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미혼 남녀 5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결혼을 통해 보완하고 싶은 것으로 남성의 54.6%가‘정신적 안정 및 풍요’를 꼽았고, 12.1%는‘가사에 도움’이라고 답했습니다. 반면에 여성들은 47.2%가‘경제적 안정’을 꼽았고, 정신적 안정 및 풍요가 25%, 사회적 지위가8.3%로 나타났습니다.
남성의 지향과 여성의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살겠다며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부부도, 잉꼬부부로 알려진 부부도 쉽게 헤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많은 경우‘성격 차’'경제적 이유'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며 각자의 길을 갑니다.
성격이야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상대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 다를진대 어찌 성격이 똑같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로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너무도 쉽게 너와 내가 다른 것을 ‘네가 틀렸어'로 몰아 부치고 맙니다. 그래서 마침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등을 돌립니다. '너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19,6). 혼인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헤어질 수 없지만 단순히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혼을 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하느님과 일가친척 앞에서 서약을 하였습니다. 남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이지,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서로는 동반자이면서 서로 사랑 받고 존경 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예레31,3).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관계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착한 사람을 소크라테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결혼만은 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아내 크산디페는 세기의 악처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물론 집안 살림에는 관심도 없는 남편을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남편에게 바가지는 예사이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태산 같은 인내심으로 이겨 나갔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마구 욕을 해 대다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로 인해 화가 풀리지 아니하자 걸레를 빤 물을 남편의 머리에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뇌성벽력이 대단하더니 종래는 비가 오고야 마는군”하였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부간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견디면 성공하는 것이요, 인내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5,33).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인데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됩니다. 만일 헤어졌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남편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또 남편은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됩니다”(1고린7,10-11).
서로간의 관계 안에서도 신의를 지키고 부족함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던히 참아주고 변화를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우리를 풍요케 할 것입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한다”(러시아 속담).고 했습니다. 결혼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나 풍랑이 몰아치는 험한 바다보다도 더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애쓰지 않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혼인과 이혼』
-송영진신부-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마태 19,3).”
여기서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함정에 빠뜨리려고’ 라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아내를 버릴 권리가 남편에게 있는가?” 라는 뜻이고,
“헤로데의 이혼과 재혼은 정당한 일인가?”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가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비판하다가 헤로데한테 살해당했습니다(마태 14,3-12).
헤로디아의 남편은 헤로데의 이복동생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을 비판한 일을 겉으로만 보면,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안 된다는
레위기 20장 21절에 있는 율법을 어긴 것만 비판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결혼을 위해서 이혼한 것도 함께 비판한 일입니다.
헤로데는 헤로디아와 결혼하려고 부인과 이혼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이웃 나라인 ‘나바태아 왕국’의 공주였습니다.
‘나바태아 왕국’의 ‘아레타 임금’은 공주가 이혼을 당하고 친정으로 돌아오자
화가 나서 헤로데와 전쟁을 하려고 했는데,
로마제국의 중재로 전쟁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헤로디아의 경우에도 헤로데와 결혼하려고 남편과 이혼했습니다.
헤로데는 부인을, 헤로디아는 남편을 일방적으로 버렸습니다.
이혼당한 그 두 사람은 잘못한 일 없이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버리면 안 된다.’ 라고 대답하시면,
헤로데에게 가서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처럼 헤로데를 비판했다고
예수님을 고발하고, 반대로 예수님께서 ‘버려도 된다.’ 라고 대답하시면,
산상설교에서 하신 당신의 말씀과(마태 5,31-32) 반대되는 말을 했다고
비방하겠다는 것이 바리사이들의 속셈이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서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이라는 말은, 자신들의 질문이
함정이라는 것을 감추는 말이기도 하고, 이 말 자체가 함정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질문에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은 정당한 일인가?” 라는
뜻이 들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는 그런 의도가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세속의 권력자가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인 일은 누가 보아도 ‘큰 죄’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이
‘이유만 있으면’ 누구라도 붙잡아서 처형할 수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은 중대한 범죄다.”
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하셨다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헤로데의 통치권에
도전하는 반역죄를 지었다고 고발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4-6)”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부정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하느님 말씀을
인용해서 그들의 함정을 피하셨는데, 예수님의 답변은 ‘안 된다.’입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고,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거스를 권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배우자를 버릴 권리 같은 것은 원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마태 19,7-9)”
여기서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라는 말은, “어찌하여 모세는 ‘아내를 버릴 때에는
이혼장을 써 주어라.’ 라고 명령하였습니까?”로 번역을 바꿔야 합니다.
모세의 명령은 “아내를 버려라.”가 아니라, “이혼 증서를 써 주어라.”입니다.
바리사이들도 그런 뜻으로 인용했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사실인데,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말을 인용한 것은 순전히 예수님과 논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라는 말씀은,
“너희가 혼인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로 해석됩니다.
모세의 규정은, 원시시대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은 그 옛날에, 사람들이
미개한 상태에서 만든 규정일 뿐이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그 명령은 모세의 명령이지 하느님의 명령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써 모세의 규정을 폐지하셨고,
본래의 ‘하느님의 법’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 일도 ‘율법의 완성’에 해당됩니다(마태 5,17).>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지은 사람과
그 죄의 피해자를 구분해야 합니다.
단순히 이혼했다는 사실만 보고서
함부로 죄인 취급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혼인성사는 둘이 함께 받은 성사이고, 둘이 함께
완성해야 하는 성사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만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잘못한 일 없이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피해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가해자들을 겨냥하신 말씀이지
피해자들의 고통을 무시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라고 말합니다(1코린 7,15).
혼인을 통해서 성가정을 이루고,
가족이 함께 구원받는 것은 큰 평화를 누리는 일입니다.
반면에 혼인이 지옥으로 변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그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교회 공동체의 의무입니다.
행복에로의 부르심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은지 묻는 것으로 시작하여
혼인 성소와 다른 성소에 대한 것까지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얘기의 전개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에 제자들은
남편의 처지가 그렇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결혼을 하건 하지 않건 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른 것이라고 하시는데
바리사이나 제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인간 선택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옛날 결혼의 경우 어른 또는 집안이 결혼 상대를 결정한 것에 비해
요즘은 당사자들이 서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진정 어떤 것입니까?
결혼이나 수도 생활이 하느님의 부르심입니까? 나의 선택입니까?
아무리 하느님의 부르심일지라도 내가 싫으면 걷어찰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결혼이나 수도 생활 모두 부르심이지만,
그 부르심을 내가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나의 몫이고,
그렇기에 아무리 하느님 뜻이어도 내가 싫다고 걷어차면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부르심보다 먼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그것이 그분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보다 먼저 자유를 주셨고 그것이 그분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은총보다 먼저 자유를 주셨고 그것이 그분 사랑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거나 걷어차는 것은 자유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그 자유로 사랑하게도 하시고 싫어하고 미워하게도 하셨으며,
그 자유로 당신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신앙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믿을 뿐 아니라
그 부르시는 뜻을 사랑이라고 믿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신앙이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거나
알더라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인정치 않기에 걷어차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느님은
결혼이건
비혼이건
이혼이건
졸혼이건
또 수도 생활이건
그것을 통해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데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랄까 사랑은 행복이어야 하고,
신앙인이라면 그것을 사랑의 부르심이라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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