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8월 9일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2. 8. 9. 06:10

2022년 8월 9일  연중 제19주 화요일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마태오 18,1-5.10.12-14)

 

Whoever becomes humble like this child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꿀처럼 입에 단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며, 이스라엘 집안에게 당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제게 “할아버지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손자가 있습니다. 조카의 큰아들입니다. 이 손주 생일이라서 장난감을 사서, 선물이라며 주니 너무나 좋아합니다. 밥도 먹지 않고 장난감 가지고 놀 생각만 합니다. 솔직히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면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난감끼리 부딪치는 데도 너무나도 재미있어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장난감끼리 부딪치는 것뿐인데 뭐가 재미있을까요? 이 장난감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집중하는 것에는 재미와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집중하지 못할 때, 지루하게 생각하면서 하기 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많은 이가 기도를 지루해하고 또 시간 낭비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중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기도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집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쓸데없는 집중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세상일에 몰입하면서 행복하지 않은 자신에 관한 불평불만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늘 나라에서의 서열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고는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취급하여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긴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어른들의 말참견을 할 수 없었고, “조그만 게 까불어”라는 말을 듣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가 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이가 보여주는 순수한 집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 순수한 집중이 성 이냐시오의 해석대로 순진, 순박, 겸손의 모형이 됩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집중을 갖출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뜻이 담긴 사랑의 실천에 집중해서 그 안에서 크게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 너무나도 좋아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우리를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절대로 손해 보는 우리의 행동이 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됩니다.
지난 일을 진정으로 잊는다는 건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지난 일과 화해하는 것이다(한유석).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 길을 잃기 때문!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6XHM4Fo9rrY

영화 ‘트렌센던스’(2014)는 한 인간에게 신적인 능력이 주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궁금증을 조금은 해소해줍니다.
    윌과 애블린은 과학자 부부입니다. 이 부부는 절친인 맥스와 함께 인간의 뇌와 의식을 컴퓨터에 옮기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투자금을 받기 위해 연설하던 도중 윌은 신의 능력에 도달하려는 인간을 반대하는 세력에 총상을 입습니다. 총상은 위험한 것이 아니었지만 총알에 독이 묻어있어서 과학의 힘으로는 손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애블린은 남편을 보낼 수 없다며 맥스와 함께 윌의 의식을 컴퓨터에 저장해보자고 합니다. 죽어가는 남편의 의식을 컴퓨터에 다 저장했을 즈음 남편은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컴퓨터 속에서 말하는 남편을 만납니다.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윌은 컴퓨터 안에서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많은 지식과 힘을 원합니다. 은행 계좌까지도 다 뒤져서 자신들에게 돈을 쏟아부으려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자신이 접속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맥스는 반대했지만 애블린은 찬성합니다. 그래서 윌은 인터넷에 접속하여 세상 모든 지식을 다 갖게 됩니다.

    윌은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앉은뱅이도 걷게 하고 태생 소경도 다시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친 사람도 고칩니다. 그런데 윌은 육체를 가지고 아내를 다시 안아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뇌를 다친 사람의 의식 안으로 들어가서 아내를 만져봐도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아내는 점점 윌이 낯설어집니다.

    그래서 윌은 이번엔 작은 입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예전의 모습을 복원하여 애블린에게 다가갑니다. 애블린은 망설입니다. 그러던 중 포탄이 떨어져 애블린이 죽습니다. 이에 분개한 윌은 자신들을 향해 포를 쏘는 이들을 다 죽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애블린을 안고 자신도 잠이 듭니다.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생각해볼 만한 것이 많습니다.
    ‘만약 인간에게 신의 능력이 주어지면 그 능력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인간이 되려면 인간의 능력이 주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늑대에게 자라서 자신을 늑대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인간의 능력을 주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의 생존을 위해 인간을 죽이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능력은 그 능력을 주는 이의 순종하는 자녀에게만 주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능력을 주는 부모가 그 능력을 조절할 수 있는 길이 되어줍니다. 만약 늑대에게 자라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 아이와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는 아이가 있다면 이 둘 중에 누구를 학교에 보내고 싶습니까? 당연히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는 아이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적인 능력을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쓸 줄 아셔서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내가 인간이라고 믿으며 능력을 달라고 하면 절대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능력을 조절할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어린이임을 고백해야만 하느님의 능력이 주어져서 이웃도 구원하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2)
그리고 잃어버린 어린 양의 비유를 말씀해주시며 그 하느님의 능력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쓰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우영우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린양들을 많이도 구합니다. 그 이유는 고래에게 영감을 받기 때문입니다. 고래는 여기서 신을 상징하고 우영우는 그 신의 자녀입니다. 고래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인간의 능력 이상의 아이디어를 선물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우영우에게만 선물합니다. 왜냐하면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종하는 마음이 없다면 능력이 주어질 수 없음을 잊지 맙시다. 그런데 그 어린이란 같은 본성의 자녀가 되었음을 전제합니다. 하느님 자녀의 능력을 지니고 살다가 하느님 나라에 가려면 내가 그리스도라 믿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라 믿기 위해서는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성체가 아니면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hXUC6QBE91E

 -조재형신부-

 

북미주 엠이 모임엘 다녀왔습니다첫날은 사제의 날이었습니다사제들만의 모임인 줄 알았는데 많은 교우들이 함께 하였습니다그렇습니다교우들이 없는 사제의 날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사제의 날은 미사로 시작되었습니다주례 사제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성가도 영어와 스페인어로 불렀습니다모임에 참석한 사제와 교우들 중에는 스페인어가 편한 분들이 많았습니다저는 영어도스페인어도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영어가 조금은 귀에 익었습니다발표자들은 이민자들의 고충과 가난을 이야기하였습니다그런 고충과 가난을 극복하고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의 대화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었다고 하였습니다새는 두 개의 날개로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듯이 교회는 성직자와 교우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하늘나라를 향해 여정을 떠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나자렛의 성가정도 많은 고충과 가난이 있었습니다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나자렛 성가정이 고충과 가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맞습니다고난과 역경이 사라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그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용기와 인내를 주시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정확하게 입력하지 않으면 아무리 운전을 잘해도교통법규를 잘 지켜도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어렵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가장 큰 것가장 좋은 것가장 비싼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그것이 성공명예권력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제자들은 하늘나라에서도 당연히 세상의 기준이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러기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부탁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는 주님의 오른 편에동생은 주님의 왼편에 있게 해 주십시오.” 역시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나라를 생각하였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기준을 새롭게 말씀하셨습니다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하느님 나라에서는 우리에 있는 건강한 양 99마리도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그리고 제자들에게 되찾은 동전되찾은 어린 양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맞습니다우리가 회개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한다면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서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가 생각납니다의좋은 형제의 이야기입니다가을 추수를 마치고 형제는 서로 생각합니다형님은 이제 막 신혼살림을 차린 동생에게 필요한 것이 많으리라 생각하고 자신의 논에서 볏단을 동생의 논으로 옮겨 놓았습니다동생도 형님은 아이들도 많아서 필요한 것이 많으리라 생각하고 형님의 논으로 볏단을 옮겨 놓았습니다그렇게 하던 어느 달 밝은 밤에 형과 동생은 함께 만나게 됩니다서로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확인한 형제는 서로 깊은 포옹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입니다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깁니다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남을 위해서 배려하고나의 것을 챙기기 전에 남의 것을 신경 써 주는 것입니다많은 것을 알고신학적인 지식을 쌓아야만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맹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알고불쌍한 사람을 보면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성공했을 때 좀 더 겸손해지며옳고 그른 것을 가릴 줄 아는 것입니다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양심에 넣어주신 것입니다이것을 잘 가꾸는 사람은 신앙심이 깊어질 것입니다물질경제자본성공과학이라는 잣대도 중요합니다하지만 세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시와 문학음악과 미술철학과 신학신화와 문화가 있습니다감성 없는 이성은 너무나 삭막할 것입니다영혼 없는 육체는 사랑이 없는 집과 같습니다.

 

요즘원망과 미움이 생기는지요아니면 분노와 질투가 생기는지요그렇다면 내가 세상을 내 욕심과 세상의 잣대로 바라보기 때문은 아닐까요지금 내 마음에 감사와 찬미가 가득하다면 우리는 이미 신앙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내 앞에 놓인 십자가가 걸림돌이 아니라디딤돌로 여겨진다면 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한마디 말이 꽃이 되고 위로가 되고

 -양승국신부-

 

이박삼일 동안의 여름 신앙학교를 끝내고 돌아가는 청소년들이 인사를 하며 한마디 하는데, 어찌 그리 예쁜 말만 골라 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부모님인지 가정 교육 참 잘 시켰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여기 너무너무 좋아요.” “이박삼일 내내 밥이 너무 맛있었어요. 급식도 여기 같았으면 좋겠어요.”

  

꽃 같은 아이들이 남기고 간 짧은 한마디 말이 뒷바라지하느라 녹초가 된 저희에게 큰 위로요 기쁨이 되었습니다.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말이 누군가에게는 비수가 되고 화살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말은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말 한 마디가 향기로운 꽃이 되고, 꿀보다 더 달콤할 수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명령에 따라 주님 말씀이 적혀있는 두루마리를 받아먹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놀랍게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에제키엘 예언서 3장 2절)

  

오늘 화답송을 통해 전해지는 시편작가의 말씀도 일맥상통합니다.

  

“주님, 당신 말씀 제 혀에 달콤하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진꿀보다도 더 달고 그 어떤 향유보다도 향기롭습니다. 그 말씀에 깊이 매료되고 빠져든다면 더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좋은 것도 말씀 앞에 빛을 바래며, 의미가 사라집니다.

  

힘겨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주님 말씀으로 인해 살아갈 힘과 활력을 얻습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가면서도 말씀으로 인해 희망을 지니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결국 말씀은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의미요 전부입니다.

  

사실 제가 그랬습니다. 수십 년간 주님 말씀의 끈을 꼭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매일 발버둥쳐 왔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은총과 축복이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말씀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제 안으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말씀은 주저앉아있는 저를 일으켜 세우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재촉하였습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갈 때도, 까마득히 높은 언덕을 올라갈 때도, 매일의 말씀은 제게 견뎌내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매일 우리에게 선포되고 건네지는 말씀들은 그 자체로 기쁨이요 위로입니까? 그 말씀이 내게 살이 되고 피가 되고 있습니까? 말씀은 지친 나를 일으켜 세웁니까? 말씀은 매일 나를 양육시키고 성장시킵니까?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인 마태오복음 13장은 마태오복음 사가에 의한 네 번째 설교 집성문인 교회 설교 혹은 공동체 설교라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역에서 유다 지역으로 가시기 직전에 교회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를 다루십니다.

곧 교회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작은 이들의 가치(1-14절)와 공동체 안에서의 형제애(15-35절)를 다룹니다.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로서,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마태 18,1)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세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는 우선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야 그곳에서 큰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린이’란 열두 살이 되기 이전의 아이를 가리는데, 고대인들은 ‘어린이’는 오늘날 우리가 여기고 있는 것과는 달리, 천진무구하다고 여기지 않고, 손이 많이 가고 책임감도 없고 늘 어른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하찮은 존재요, 율법을 모르는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된’ 사람이란, 어린이가 어른에게 의지하고 지시에 따르듯이,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지시에 잘 따르는 겸손한 태도를 취할 뿐 아니라, 회개한 죄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곧 어른처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함을 받아들이고 주인께 신뢰로 의탁하는 죄인을 말합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 5,3)고 선언하셨습니다.

 

둘째는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인지’를 밝히십니다.

곧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에서는 명예나 권력을 가진 이가 아니라, 결국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이가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이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마태 5,19)이라고 제시하셨습니다.

 

셋째는 ‘누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곧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 그것은 무력하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일이요 죄인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은 회개한 죄인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미천하고 무력한 이들을 당신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시며,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되찾은 양의 비유'(12-14절)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마태 18,1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하찮고 비천한 이일수록 더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3)

 

주님!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게 하소서.

아기가 어머니께 소중한 것처럼, 제가 당신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아기가 어머니께 속해 있듯,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19주 화요일-양 한 마리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