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7일 연중 제19주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루카 12,32~48)
Blessed are those servants
whom the master finds vigilant on his arrival.
Amen, I say to you, he will gird himself,
have them recline at table,
and proceed to wait on th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주님의 백성은 의인들의 구원과 원수들의 파멸을 기대하였다고 전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라며,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이르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기 삶은 아주 평범하고, 특별한 일은 평범한 우리 삶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요?
어느 형제님도 자기에는 아주 평범한 일만 계속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에 가라는 것입니다. 큰 걱정과 함께 대학병원에 가서 검사했는데, 심각한 암이고 수술하기 힘들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이 분야의 권위자라는 소리를 듣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수술받았고, 수술이 잘 끝나 회복 중에 계십니다.
몇 달 동안 계속된 특별한 일로 인해 형제님은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살 때, 건강에 더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십니다.
허리 디스크로 고생했던 친구가 있습니다. 디스크 수술 이후 허리 코어 운동으로 많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열심히 운동하느냐고 묻자, “아프지 않으니까 운동을 안 하게 돼.”라고 말합니다. 평상시 운동해야 아프지 않을 텐데, 세상일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운동하지 않으니 또 아프고 다시 후회하게 된다고 합니다.
평범한 일상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을 준비하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늘 준비하지 않아서 후회하게 됩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뒤로 미루면서 주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에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명백해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보화가 있는 곳에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에 맞춰 사는 사람이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은 사람들이 길을 떠날 때, 일할 때, 또는 식탁이나 예식에 참석할 때 준비하고 있는 옷매무새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등불은 어두움을 밝히는 도구로 깨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잘 준비하는 충실하고 현명한 종이 될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떠날 때 맡긴 직무에 대하여 충실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일 처리를 했느냐에 대한 점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것에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커다란 후회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날, 가장 큰 기쁨으로 주님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상대의 보석함이 되어 주는 것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5iziYZq-mzU
'금쪽같은 내새끼' 93회에서 오은영 박사는 엄마에게 묻습니다.
“어머니는 금쪽이가 미우세요?”
금쪽이는 14세 딸입니다. 엄마와는 대화하지 않고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온라인 채팅 중독입니다. 온라인상에서 만난 남자친구가 가출하라고 해서 가출한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신고하여 돌아오기는 하였습니다. 금쪽이는 극단적인 생각도 자주 합니다. 엄마와 남동생은 행복한 것 같고 자신만 외톨이가 된 것 같습니다. 친구와 이야기하는 도중 자신은 죽어도 엄마와 남동생은 슬퍼할 것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 엄마에 대한 신뢰를 잃었을까요? 엄마는 딸을 앉혀놓고 대화 좀 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그 대화가 너무 일방적입니다. 야단치는 것에 머뭅니다. 딸은 말합니다.
“엄마만 힘들어?”
엄마는 딸에게 섭섭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에 남편이 사고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 아픈 마음을 딸은 몰라주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아빠에게는 편지를 써도 자신에게는 무심한 딸에게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못합니다.
남동생도 자신에게만 잘해주는 엄마가 마냥 좋지만은 않습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엄마와 누나 사이가 좋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왜 세 명 모두 돌아가신 아빠를 다 좋아할까요? 아빠는 그들의 속마음을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엄마는 자기 말만 합니다. 그리고 아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말을 막아버립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엄마와 아빠 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일방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께서 주시기로 하셨다고 하십니다.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루카 12,32)
그러고 나서 우리도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루카 12,33)
이렇게 내어놓고 또 내어놓게 하는 삶을 예수님은 ‘깨어있음’이라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
그리고 특별히 더 내어주어야 하는 주님 제자들에게는 더 내어놓아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 안에는 주는 것과 요구하는 것이 균형 있게 공존합니다.
무작정 주는 것만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선을 베풀라고 할 때는 나 자신을 상대의 것을 넣기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비우는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내 안에 자신의 것이 들어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보석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보석이 들어있는 보석함이 가장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사랑은 내 보석을 상대의 보석함에, 상대의 보석을 내 보석함에 옮겨 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상대가 좋아서가 아니라 상대가 내 보석을 받아주었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자선의 목적입니다.
하느님은 에덴동산을 주시고 가만 있지 않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당신을 위해 소중하다고 여기는 선악과를 바치기를 원하셨고 서로 협력하여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만큼 노력이 많이 들어간 곳이 될 때 에덴동산에 대한 애착도 더 커지는 것입니다.
태국 광고 중 말을 못 하는 아버지와 사춘기 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언어장애인 아버지를 둔 딸은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해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딸을 나무랍니다. 딸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딸은 자살을 시도하고 아버지는 자기 피를 딸에게 줍니다.
이것이 자선입니다. 자선의 결과는 어떨까요? 딸은 깨어나서 잠들어 있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습니다. 아버지가 딸의 소중한 것을 맡을 수 있는 그릇이 된 것입니다. 딸은 자기 손을 맡아 놓은 아버지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보석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4EQHQYq-v1A
-조재형신부-
1988년 군대를 제대하고 본당에서 학생들에게 예비자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즐거운 추억입니다. 학생들의 똘망똘망한 눈이 기억납니다. 신이 난 저는 교리를 시작하기 전에 기타를 가지고 학생들과 노래를 불렀습니다. 앨범에는 세례를 받은 학생들과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34년 전이니 그 학생들도 이제는 누군가의 아빠와 엄마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고3이었던 학생이 증권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선생님인 저에게 첫 월급을 타면 저녁을 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약속 시간을 정했고 5시에 음악다방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 약속을 잊고 친구들과 함께 천마산엘 갔습니다. 천마산에서 내려오면서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부랴부랴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약속장소로 갔지만 4시간이나 지난 후였습니다. 학생은 다방에서 4시간을 기다려 주었습니다. 제가 꼭 올 것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저를 믿고 기다려준 학생에게 미안함 마음도 있었고, 고마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믿으면서 오랜 시간 기다리지 못하였습니다. 짜증을 낸 적도 많았고, 조금 기다리다가 돌아오곤 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고 75세가 넘은 나이였지만 정든 땅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갔습니다. 75세라면 타향으로 갔다가도 고향으로 돌아올 나이입니다. 75세라면 하던 일도 정리하고 노후를 즐길 나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새로운 곳으로 떠났습니다. 신앙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던 일을 정리하고 노후를 즐겁게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이라면 도전과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이라면 편안함과 안락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제단에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셨으니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기꺼이 제물로 바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정든 고향까지 기꺼이 떠날 수 있었기에, 하느님의 뜻이라면 100세의 나이에 얻었던 사랑하는 아들까지 기꺼이 제물로 바칠 수 있었기에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현실에 안주하려고 한 적이 많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제 것을 지키려고 한 적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삶의 태도와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망과 욕심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 하는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슬퍼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고, 그것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에 데려가 준 사마리아 사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레위와 사제는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였습니다. 율법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가장 헐벗은 사람에게, 가장 아픈 사람에게, 이방인에게,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 하느님께서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시간, 나의 재물, 나의 능력을 이웃들에게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늘 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이 올 때를 대비해서 등잔에 기름을 채운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른다며 등잔에 기름을 채우지 못한 처녀들은 신랑이 왔을 때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기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일까요?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병자를 고쳐주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이 나를 변화시켰다면, 변화된 내가 이웃의 아픔에 함께 한다면, 세상의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해야 할 바를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입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제자들에 대한 교육 장면인데, 크게 두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곧 자선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장면(루카 32-34)과 게으름과 자만에 빠지지 말고 주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려야 한다는 장면(35-48)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님의 재림과 관련한 세 가지 비유, 곧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35-38), '도적의 비유'(39-40), '청지기의 비유'(42-48)가 소개됩니다.
먼저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 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루카 12,37)
이 말씀은 '깨어 있음'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그것은 단지 잠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는 것이 깨어 있음이요, 임을 희망하는 것이 깨어 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기다림, 이 희망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을 지향하여 있는 까닭입니다.
바로 그 지향 안에서 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깨어 있음'은 지향, 곧 임의 뜻 안에 깨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깨어 있음'의 표시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루카 12,35)
'허리에 띠를 매고'라는 말은 과월절 음식을 어떻게 먹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주신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곧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는 말씀을 떠올려 줍니다.
곧 깨어 있음은 마치 출애굽의 긴장을 갖추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한편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합니다.
‘등불’은 정신과 마음이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님을 향한 기다림, 곧 지향을 켜놓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깨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이미 등불을 지니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것은 임께서 우리 안에서 빛을 밝히고 계신 까닭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깨어 있을 수 있음'은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까닭입니다.
아니 그렇게 임께서 우리에게 시중들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토록 임께선 이 순간에도 우리를 휩싸고 돕니다.
우리 안에 현존하시며 나와 더불어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은 '깨어나라' 하지 않으시고, '깨어 있어라' 하십니다.
이어서 들려주는 '도적의 비유'(39-40)도 '깨어 있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어 있음,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한 고대와 기다림은 ‘행복’과 동시에 선언됩니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라는 말씀은 어떤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밀려올 그 빛에 기쁘게 마음을 활짝 열어 놓으라는 촉구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청지기'에 비유하십니다.
이 역시 '깨어 있음'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지기'에게 충실함과 슬기로움을 동시에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대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
(루카 12,42)
이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종들이 아니라 주인의 종들이 맡겨졌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들을 돌보는 일이 주인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의 뜻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그 맡겨진 이들을 돌보는 일은 그들을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정해진 양식을 내어줄 수 있는 데'(루카 12,42) 있기 때문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는 솔로몬에게서 보듯이, '듣는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지혜는 먼저 귀 기울여 듣는 이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아는 슬기로움'을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충실함'과 함께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루카 12,47)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으로부터 맡겨진 사명을 받은 청지기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충실함과 슬기로움으로 맡겨진 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사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다름 아닌 주님께서 맡겨준 형제들에게 주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일, 그것이 곧 주님께 대한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새겨 들어 봅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8)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여라. ~ 깨어있는 종들!”
(루카 12,37)
주님!
깨어 있게 하소서!
단지 잠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임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리워하는 임을 이미 품고 있는 까닭입니다.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망을 품고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임이 나를 이미 품고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 임이 날 그리워하는 희망 안에 제가 깨어 있게 하소서!
아멘.
『마라나 타!』
-송영진신부-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1) ‘언제’ 돌아올지 결정하는 것은 주인의 권한입니다.
그리고 주인에게는 그 시간을 종에게 미리 알려줄 의무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그와 같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당신과 신앙인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표현하신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벗’이고(요한 15,15), ‘형제’입니다(요한 20,17).>
“그 시간을 미리 알려주면 좋지 않은가? 왜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이 말씀에서 ‘모른다.’는 ‘말할 수 없다.’로 해석됩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알려주지 않는 것은,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기 위해서이고(루카 3,17),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마음은, 벌을 받을까봐 무서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을 빨리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2-3).”
보기 싫은 주인을 기다리는 것과 보고 싶은 연인을 기다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그 심정을
바오로 사도는 “마라나 타!” 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1코린 16,22).
(‘마라나 타!’는 “저희의 주님, 오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간절하게 보고 싶어 하니까 빨리 오시라고 청하는 말입니다.)
3) 오시는 주님을 깨어서 기다리는 일은 ‘사랑’입니다.
(억지로 수행하는 의무가 아닙니다.)
사랑하니까 기다리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기다립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여기에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주님을 사랑해서 ‘깨어 있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그냥 가버린 사제와 레위인은
‘깨어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랑 없이 의무감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들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생활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주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사제와 레위인은
누가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주님이 보이지 않으니,
주님께서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사제와 레위인도 누군가가 보고 있으면 사랑을 실천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다면 그것은 그냥 ‘위선’입니다.>
4) ‘사랑으로’ 기다리는 사람의 경우에,
기다림은 그 자체로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기다림은 ‘고역’이 될 뿐입니다.
사랑으로 기다리는 사람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들을, ‘정성’을 다 쏟아서 합니다.
바로 그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 일들을 대충 형식적으로 하거나 안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생활,
즉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내가’ 하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자기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래서 억지로 한다면,
신앙생활에 사랑도 없고, 기쁨도 없고, 정성도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이 말씀은 세 가지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1. 주님의 재림과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2. 그 날과 그 시간은 모른다.
3. 대비는 ‘지금’ 해야 한다.
여기서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고 있으면”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도둑처럼’ 오신다는 뜻이 아니고,
‘갑자기’ 오신다는 뜻입니다.
재림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거나 훔치려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려고 오시는 분입니다.
준비를 잘한 사람은 그 은총을 풍성하게 받을 것이고,
반대로, 준비를 안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날과 그 시간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가 되지 않도록
너희는 평소에 준비를 잘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평소에 준비를 잘하고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갑자기 오시더라도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재림이 너무 이르다고 항의하거나, 아니면 너무 늦다고 항의합니다.
‘생각하지도 않은 때’ 라는 말은,
회개와 신앙생활은 바로 ‘지금’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시간’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제19주일-황송한 사랑에 황송한 행복의 관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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