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이 말씀에 따른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축일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루카 9,28ㄴ-36)
While he was praying
his face changed in appearance
and his clothing became dazzling whit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니엘 예언자는, 연로하신 분이 옥좌에 앉으셨는데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고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옷이 새하얗게 빛난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텔레비전을 거꾸로 놓고 본다면 어떨까요? 텔레비전 안에 등장하는 사람의 머리가 화면 아래에 있고, 다리가 화면 위에 있습니다. 해보지는 않았지만, 화면이 거꾸로 놓여 있으면 정신없어서 도저히 볼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도 텔레비전을 거꾸로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거꾸로 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현재 카이스트 총장으로 있는 미래학자 이광형 박사님이십니다.
뇌의 활동을 고정화하면 앞으로 사고의 변화를 가져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거꾸로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습관도 나의 것으로 만들 힘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변화가 어렵다고 하지만, 몸이 적응하기 때문에 충분히 변할 수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 갔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는 시차 때문에 고생합니다. 낮과 밤이 완전히 거꾸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행 내내 힘들까요? 아닙니다. 빠르면 2~3일 이내에 적응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충분히 변화할 수 있습니다.
변화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다 변화시킬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냅니다.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비록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되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영광을 빛내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다는 것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이고, 엘리야는 예언서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죽음으로 완성하여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시는 분입니다. 결국, 이 삼자대면은 구약시대의 유산이 신약 시대로 넘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변모 사건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단순히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기만을 바라는 마음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수난과 죽음을 거쳐서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환하게 드러날 것임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에 머물면,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하늘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됩니다.
미리보는 하느님 나라와 부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8dZlYHrcJGo
-조재형신부-
로마에서 공부하는 신부님이 와서 함께 코네티컷에 있는 신부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같은 교구 사제들이니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코네티컷 신부님도 4월에 한국에서 왔으니 이제 4개월이 넘었습니다. 사제관으로 들어갔는데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신부님의 성격에 따라서 사제관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오래된 식탁에는 하얀 식탁보가 놓였고, 그 위에 아크릴로 된 판이 놓였습니다. 식탁은 마치 새로 산 것 같았습니다. 그 식탁에서 차를 마시니 카페에 온 것 같았습니다. 벽에는 성화를 걸어 놓았습니다. 화장실과 방에는 은은한 커피향이 났습니다. 그릇에 커피를 내렸던 커피가루가 있었습니다. 벽 쪽에 있던 책상도 창가로 옮겨놓았습니다. 책상에서 창밖의 나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전등도 센서 등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나가면 자동으로 불이 켜졌습니다. 냉장고 안에도 음식들이 백화점에 물건 진열된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사제관이 멋지게 변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면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파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싫어했고, 잡아서 감옥에 가두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 행동이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는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하였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들 또한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입니다. 암행어사가 비록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몸속에는 임금의 명을 수행하는 ‘마패’를 가지고 다니듯이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되시어 신적인 권능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오늘 ‘거룩한 변모’를 통해서 하느님께로부터 오셨음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제자들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늘 제자들에게 먼저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은 선생님의 모습을 따라하면서 어느덧 성장 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은 제자들의 현재의 모습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보잘 것 없고, 초라할지라도 그들 안에 있는 가능성을 키워주십니다. 그런 스승이 참다운 스승입니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믿고, 사랑의 물을 준다면, 나눔의 거름을 준다면, 믿음의 빛을 비추어 준다면 그들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들 안에 있는 불신, 분노, 미움의 잡초를 뽑아준다면 그들은 모두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 될 것입니다.
“빛나는 구름 속에서 성령이 나타나시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빛나는 광채를 지닌 주님께서 세상의 악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꽤나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간부급 제자 세 명(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중 제자들은 특별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입고 계시던 의복이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예기치 않은 상황 앞에 당황해하고 있던 제자들이었는데, 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들 앞에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말로만 들어오던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와 대 예언자 엘리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신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수님의 변모 사건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적들에게 체포되고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십자가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얼굴은 또 다른 방식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빛나고 위풍당당하고 말씀 한마디에 뭐든 못할 것이 없는 공생활 기간 동안의 승리의 메시아가 아니라 때리면 맞고 순순히 십자가에 못 박히는 한 나약한 인간의 얼굴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참혹했던 삼일이 지나가면 예수님께서는 원래 지니셨던 영광스런 얼굴을 다시 한 번 회복할 것입니다. 영광-고통-영광의 과정을 거치는 메시아의 운명을 미리 잘 이해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핵심 제자단 세 명만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셨고, 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변모하신 이유가 뚜렷해진 것입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의 영광스런 모습을 핵심 제자단에게 미리 살짝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베푸신 것입니다. 변모 사건은 곧 도래할 예수님 수난의 때,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느라 무기력해질 예수님, 십자가형 앞에 우리 인간과 똑같이 두려워할 예수님 앞에서도 제자들이 그분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주신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곧 다가올 아들의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이 당혹해하지 말고 두려워도 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설 힘과 용기를 지니도록 힘을 주신 것입니다. 비록 꿈결같이 짧은 한 순간의 기억이었지만 이 짤막한 영광의 순간에 하느님의 목소리와 모세와 엘리야의 증언이 덧붙여져 아들 예수가 자신에 대해 예언하는 것을 제자들이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도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과 우리 인간의 죄로 인해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무자비한 폭력이 무죄한 어린 양을 짓밟습니다. 악이 선을 능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얼굴이 있습니다.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주님 얼굴입니다.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날 영광스런 얼굴의 주님께서 반드시 승리하실 것입니다. 빛나는 광채를 지닌 주님께서 세상의 악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그때 끝까지 인내한 우리도 비참하고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럽게 빛나는 주님 얼굴을 닮아있을 것입니다. |
「기쁨이 벅찬 곳」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는데 예수님의 옷은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의 현현이 이루어지는 곳을 말합니다. 또한 흰옷 입은 사람은 하느님(다니7,9)과 천사(마르16,5, 사도1,10)같은 천상적 존재나 종말에 부활할 의인들의 표징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변모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같은 초월적 존재로서 영광스럽게 부활 하시리라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에 싸여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미래를 암시해 줍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인물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을 참된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예언자입니다. 두 인물 모두 하느님의 백성을 올바른 길로, 참된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이 두 인물과 같은 운명, 하느님 백성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고통을 당하는 운명에 놓여있고,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길도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리라는 암시입니다(손희송).
베드로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고 너무도 기뻐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당장은 부활의 영광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이 하늘의 소리와 함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일상,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체험은 체험한 만큼 일상 안에서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황홀한 체험의 산'에만 머물러 있으려고 고집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만난만큼 '광야와 같은 일상에서' 그분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께서 겪게 되는 수난과 죽음이 그 자체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에로 이어져 간다는 확신을 제자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주님을 따르는 길에 있어서 혹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하더라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준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할 수 있는 곳이 우리 성당이기를 바라고 또한 다른 곳이 아닌 주님을 철저히 따르는 우리 각자가 머무는 곳, 삶의 자리이기를 희망합니다. 안주하지 않고 삶의 자리를 머물고 싶은 자리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기쁨에 벅찹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말씀 나누기 -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높여주시도록 낮추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0) | 2022.08.08 |
---|---|
2022년 8월 7일 연중 제19주일 (0) | 2022.08.07 |
2022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0) | 2022.08.05 |
2022년 8월 4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0) | 2022.08.04 |
2022년 8월 3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0) | 2022.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