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8월 4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2. 8. 4. 06:38

2022 8 4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1786년 프랑스 리옹의 근교에서 태어났다. 1815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시골 마을 아르스의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겸손하고 충실한 목자로 존경받았다. 그의 고행과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정성을 다하여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평생을 아르스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산 그에게 해마다 2만여 명이 고해성사를 받고자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1859년 선종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시성하고, 4년 뒤에는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오 16,13-23)

 

Who do you say that I a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그날이 오면 당신께서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프로야구를 보다가 예전에 잘 듣지 못했던 용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선발투수가 내려가고 구원투수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투수를 향해 해설자가 ‘추격조’가 올라왔다고 말합니다. 10점 차 이상의 점수 차이로 지고 있었습니다. 보통 약간 실력이 떨어지는 투수를 올립니다. 어떤 때는 투수가 아닌 야수가 투수판에 올라와 공을 던지기도 합니다. 선수 자원을 아끼기 위한 작전입니다. 이때 올리는 선수를 예전에는 ‘패전 처리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추격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패전 처리조’라고 하면, 팬들도 이 투수의 실력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을 갖습니다. 또 선수들도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팀에서 ‘우리는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추격한다’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답니다. 그러자 선수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졌고, 실제로 경기를 뒤집어 승리하는 경우도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단어 하나로도 경기의 승패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쓰는 단어 하나도 중요한 의미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의 마음가짐이 아닌, 긍정의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또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말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나뿐 아니라 주변까지도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당신의 인기를 물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이었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한 말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는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입니다. 이제까지 당신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참 위상을 깨우쳐 주셨는데,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눈이 뜨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제 주님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 문제는 아직 완전하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은 아니어서 수난 예고에 부활의 승리를 덧붙였지만, 부활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치욕의 죽임을 당하리라는 말에만 충격을 받아, 베드로가 나서서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며 유혹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물러가라는 말은 꺼져 없어지라는 뜻이 아니고, 내 앞길을 가로막지 말고 뒤로 물러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뒤로 물러나서 따라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의 마음가짐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뒤에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기쁨을 주는 사람만이 더 많은 기쁨을 즐길 수 있다(알렉산더 듀마).

 우유부단 혼합주의가 지배하는 교회, 햄릿이 될 것인가, 돈치호태가 될 것인가?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qKB-JY1Gy9w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햄릿’의 이야기입니다.
12세기 덴마크 왕국 엘시노어 성에 자정이면 나타나는 죽은 왕의 혼령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유령을 본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는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독일 유학 중이었던 햄릿은 아버지의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를 만납니다.

    유령이 된 아버지는 자신이 뱀에 물려 사고사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당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죄 중에 죽어서 회개할 기회가 없었기에 천국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햄릿이 왕이 되어야 하지만 현재는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 클로디어스가 자신 어머니와 결혼하여 왕이 되어 있었습니다. 범인은 삼촌일 것임이 틀림없었습니다.

    햄릿은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미친 척을 하기 시작합니다. 햄릿은 나라의 광대들을 모으고 ‘쥐덫’이라는 연극을 기획합니다. 왕이 어떻게 살해되는가를 현재의 왕 앞에서 보여주며 현 왕의 표정을 살피려 한 것입니다. 왕은 연극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기도를 합니다.
햄릿은 그때 삼촌을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나, 아버지는 지옥에 갔는데 삼촌이 회개하여 천국에 가면 안 된다고 여겨 잠시 복수를 미룹니다.

    햄릿은 자신도 좋아하고 자신을 좋아하는 오필리아라는 여인에게 “우리는 모두 저주받은 사람들이오. 수녀원으로 들어가시오!”라고 모질게 말합니다. 화가 난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이를 따지기 위해 왔다가 햄릿이 어머니와 하는 이야기를 커튼 속에 숨어 듣게 되었습니다. 햄릿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인 숙부와 결혼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커튼에서 부스럭하는 소리를 듣고는 칼로 찔러버립니다. 오필리아의 아버지는 그렇게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오필리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플로니어스의 아들이자 오필리아의 오빠인 레어티스는 왕 클로디어스와 짜고 햄릿을 죽여 복수하려 합니다. 검술 시합에서 칼에 독을 발라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검술 시합에서 햄릿이 레어티스를 압도합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왕은 포도주에 독을 타서 햄릿에게 마시라고 건넵니다. 그러나 햄릿의 땀을 닦아주던 왕비가 마시고 쓰러집니다. 술에 독을 탄 사실을 안 햄릿은 왕을 찔러 죽입니다. 레어티스도 상처가 심해 죽습니다. 햄릿도 독이 든 칼에 상처를 입은 터라 서서히 죽어갑니다. 처음에 선왕의 유령을 보았다고 알려준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도 자책하며 죽으려 합니다. 햄릿은 죽어가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죽네, 호레이쇼. 아, 내가 진실을 말해줄 수 있으련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오. 이 모진 세상에서 고통의 숨결을 지속하며 내 이야기를 전해주게.”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대사. 이것은 우유부단함과 결정 장애의 극치를 표현한 말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살아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요? 단 두 가지의 경우만 놓고 결정하면 좋은데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선택지를 놓아버리게 된 것입니다. 결정 장애의 원인은 선택지가 많아지는 데 있습니다.

    어느 식료품점에서 매일 무료 잼 시식 행사를 열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여섯 가지 잼이 진열되었고 어떤 날에는 스물네 가지 잼이 진열되었습니다. 과연 어느 경우에 잼이 더 많이 팔렸을까요? 바로 여섯 가지만 진열된 경우였습니다. 스물네 가지를 진열했을 때보다 여섯 가지만 진열했을 경우 잼을 구입할 확률이 무려 열 배나 높았습니다.

    왜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구매할 확률이 줄어드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를 선택할 때 잃어야 하는 선택지가 너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여섯 가지만 있으면 다섯 가지만 못 먹는 아픔이 있지만, 스물네 가지가 있다면 스물세 가지의 잼을 먹지 못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사탄이 자신이 제외당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의 선택권을 많게 하는 방법이 가장 좋습니다. 너무 선택지가 많아서 주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과 악, 빛과 어둠, 천국과 지옥으로 명확히 둘만 구분하십니다.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번역을 보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할 때, 사람의 일을 생각하며 가끔은 하느님의 일도 생각해 줘야 한다는 식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번역되어야 옳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반대됩니다. 선택지는 단 두 개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자녀이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사탄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과 하느님의 일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 헛갈리게 만듭니다. 사람의 일을 도모하면서도 가끔 하느님의 뜻도 생각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일을 선택해도 된다는 식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탐욕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이것과 반대되어 청빈해지고 절제하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혼동시키는 번역은 옳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사탄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선택은 단 두 개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답이 없다느니, 이원론에서 벗어나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듣지 마십시오. 결정 장애에 빠져 무엇이 하느님 뜻인지, 무엇이 사탄의 뜻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선택하려면 선택지를 단 두 개로 좁힐 필요가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범죄도시 2’에서 범인은 20억이 든 가방을 들고 마 형사와 마주칩니다. 이때 제안합니다. “5대5로 나눌까?” 마 형사는 묻습니다. “누가 5야?” 범인은 당황합니다.

마 형사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잡으려는 것 뿐입니다. 선택권이 많아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어린이와 같습니다. 관객은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넌 안 되겠어. 넌 좀 맞아야 해. 맞다가 죽을 거 같으면 벨 눌러. 내리게 해 줄 게.”

    햄릿 증후군과 반대되는 상황이 ‘돈키호테’입니다. 돈키호테는 결정론자입니다. 자신이 기사라고 믿으니 그냥 기사로 삽니다. 당시는 기사가 사라진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술집 여자를 공주로 여깁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술집 여자 알돈자를 회개시킵니다. 둘시네아가 되게 합니다. 이를 위해 풍차와도 싸웁니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믿음을 가진 자를 원하실까요? 하느님을 믿기는 하지만 숙부가 천국에 갈까 봐 기도할 때 죽이지 못하는 햄릿일까요, 아니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바보 기사를 원하실까요? 
    어린이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이들은 단순합니다. 세속-육신-마귀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해서 뭐가 좋을까요? 삶에 답이 없어지는 이유는, ‘욕심’ 때문에 선택지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며 ‘신중’하다고 자기를 높게 평가합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사탄이 됩니다.

    어린이처럼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이렇게 ‘극단적 이원론’을 놓고 선택합시다. 극단적 이원론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욕심이 탄로 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해답을 가지고 삽시다.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DO2OIT1sVsg

 -조재형신부-

 

1986년 군에 입대하면서 1달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주로 육체훈련을 받았습니다제식훈련사격 훈련태권도구보행군화생방 훈련을 받았습니다. 1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으면서 정신교육을 받았습니다군인수첩에는 외워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보초를 서면서쉬는 시간에 군인수첩의 내용을 외워야 했습니다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군인 정신과 군인의 길입니다군인정신은 이렇습니다. “군인정신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다그러므로 군인은 명예를 존중하고 투철한 충성심진정한 용기필승의 신념임전무퇴의 기상과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을 완수하는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굳게 지녀야 한다.” 군인의 길은 이렇습니다. “하나나의 길은 충성에 있다조국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나의 길은 승리에 있다불굴의 투지와 전기를 닦는다나의 길은 통일에 있다기필코 공산 적을 처 부순다나의 길은 군율에 있다엄숙히 예절과 책임을 다한다다섯나의 길은 단결에 있다지휘관을 핵심으로 생사를 같이 한다.” 36년 전의 아련한 추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 ‘엘리야가 왔다고도 합니다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도 합니다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왔다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때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의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흡족해 하시면서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나는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고네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야단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내게서 물러가라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정신교육을 시키시는 것 같습니다그렇습니다천국의 열쇠를 받았어도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에 하느님의 법을 넣어 주신다고 하십니다이스라엘 백성의 가슴에 하느님의 법을 새겨 주신다고 하십니다하느님의 법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았던 십계명입니다십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오늘 우리가 새겨야 할 법은 무엇일까요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입니다맞습니다마음을 다하고정성을 다하고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같은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그러면 우리는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가 될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며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함께 지고 가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그런 사람은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사탄 전락 체험!

 -양승국신부-

 

언젠가 세수를 하다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과중한 업무로 인한 상습 피로에 잔뜩 찌든 탓도 있었겠지만, 누군가를 향한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한 울적한 얼굴이 영락없이 영혼 없는 좀비요, 사탄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천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자칫 방심하면 사탄의 삶으로 전락하고 마는 우리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복음 말미에서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오 복음 16장 23절)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면서 종종 베드로 사도의 ‘사탄 전락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흔들리는 갈대 같은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어제 그리도 굳건히 서 있었는데, 오늘 속절없이 무너져버립니다. 어제 살아있는 천사가 따로 없었는데, 오늘은 영락없는 마귀로 둔갑해있습니다. 어제 구름 위에 떠있는 것 같았는데, 오늘 제대로 된 바닥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솔직히 존경하는 스승님으로부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소리, 결코 듣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 베드로! 최고야, 에이스야, 넘버원이야!‘ 라는 소리 간절히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간절한 열망과는 달리 스승님으로부터 들려온 소리는 사탄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에서 사탄으로 전락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우리에게서 하느님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 하느님의 일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인간의 생각, 인간의 일만 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영적인 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일, 더 큰 가치, 공동선을 위한 일이 모두 빠져나가고 그저 삼시 세끼 먹고 즐기는 일만 남게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탄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 밖의 현실과 철저히 단절된 상태로, 자기 한 몸 챙기기에 빠쁘게 될 때, 우리 역시 사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 봉사자들이 본래 종의 모습을 망각하고 사심으로 가득한 형국으로, ‘내가 원장이야, 내가 시설장이야’라고 외칠 때, 우리는 영락없는 사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예수님은 온데 간데 없고 내 얼굴만, 내 이름만, 내 명함만 크게 드러날 때, 우리는 또 다른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새포도주이신 주님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노력, 새 시대에 적응하려는 노력, 유연성과 탄력성을 거부한 채, 경직되고 고착화된 사고방식을 고수하려는 모습, 어쩌면 이 시대 또 다른 사탄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신 후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은 남들이 이러저러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말고, 네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말하기보다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몽당연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저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주님의 무엇입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을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도 환시를 통해 ‘데레사의 예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가 꾸중을 듣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16,2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관해 가르쳐 주셨지만, 베드로는 그것에 관한 깨우침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으로 말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또 그 신비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생각하고 고백한 그리스도상과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꾸지람을 들을 만합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인간의 원의를 내세우려 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서도 사실은 ‘그분이 원하는 나’를 추구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주님’을 만들어 가려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에 걸맞은 모습, 제자다운 모습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많은 약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직자나 수도자의 허물은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의 약점까지도 당신의 일을 하는 데 쓰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여 이렇게 저렇게 흉을 보거나 잘못을 들춰내어 그리스도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지?”(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도구로 삼아 하십니다. 부족함도 많고 허물투성인 인간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는가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내 원의를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뜻을 찾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 뜻에 꿰맞추려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사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1고린15,58).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16,15-16).”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은, “너희는 왜 나를 따르느냐?”,

또는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으로 생각하면,

“너희는 왜 교회에 다니느냐?”, 또는 “너희는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

무엇을 얻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느냐?”입니다.

(만일에 명확한 이유나 목적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취미생활이 될 뿐입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이유로 교회에서 멀어지면 그냥 그렇게 끝나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은, “저희는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저희는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릅니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아(그리스도)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도들은 그때에는 아직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에 도달하지는 않았고,

예수님 부활 후에야 그 신앙을 고백하게 되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신성을 믿고 있었고, 그 믿음을 고백했습니다(마태 14,33).

 

신약성경에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들이 더 있는데,

모두 다 중요한 고백들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신앙생활의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물론 지금 겪고 있는 어떤 어려움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진짜 목적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여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말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 갖지 않고, 예수님께 현세적인 복이나 비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이 말씀은, 하느님(예수님)께서 특별히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셨고

뽑으셨음을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왜 베드로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와 서간문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실수와 잘못들만 보면서,

사도 자격이 부족하다고 베드로 사도를 깎아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하느님(예수님)께서는 그의 부족한 점이 아니라, 훌륭한 점을 보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그를 선택하신 것은

그가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위대한) 점들이 많았던 사도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뛰어난 점은,

믿음, 사랑, 열정, 헌신, 지도력 등이라고 생각됩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마태 16,18-20).”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은,

베드로라는 한 개인을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기도 하고,

그의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와 그의 신앙고백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승의 세력’은 ‘악의 세력’과 ‘죽음의 세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세력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를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 보호를 잘 받으려면 교회 쪽에서도 잘 살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도 직무’를 뜻합니다.

“땅에서 매면(풀면) 하늘에서도” 라는 표현만 보고서,

주도권이 땅에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사도 직무 수행은 철저하게 주님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늘의 뜻을 땅에서 대행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지시는

‘수난, 죽음,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 침묵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온전히 믿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8주 목요일-따끔한 사랑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8월 9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