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3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오 15,21-28)
"Please, Lord, for even the dogs eat the scraps
that fall from the table of their masters."
Then Jesus said to her in reply,
"O woman, great is your faith!
Let it be done for you as you wis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당신께서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느님이 되시고 그들은 당신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위하여 자비를 청하는 가나안 부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의 딸을 고쳐 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죽음의 수용소라고 잘 알려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하신 성인으로 대부분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순교자로 에디트 슈타인 성녀도 있습니다. 그녀는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 적극적으로 저항했습니다. 그래서 처참하게 희생당하고 있는 유다인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고, 나치가 저지른 만행의 실상을 교황청에 적어 보내면서 개입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녀는 가톨릭 수녀여서 박해 대상은 아니었지만, 유다인 태생으로 그들과 함께하겠다는 결심을 했고 실제로 1942년 8월 2일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살해되셨습니다. 성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원장 수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 중 다음 구절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내 계획에는 없었던 일이 하느님의 계획에는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저는 온종일 좋으신 우리 주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드러나게 기도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으로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순간이지만, 그 안에서도 하느님의 계획에 순명하고 있기에 계속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불평불만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계획을 찾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이를 위한 우리의 굳은 믿음은 어떤가요?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게 됩니다. 가나안 사람은 예부터 이스라엘 사람이 적대시하던 민족으로, 하느님의 구원영역 밖에 있다고 생각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며 믿음을 표현하는 가나안 부인을 주님께서는 함부로 내치지 않습니다. 옛 유다 문학을 보면, 하느님의 자녀들인 자기들을 ‘자녀’로, 이교인들을 ‘개’로 표현하였으며, 이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교도에 대한 모독적인 표현인 ‘개’보다 부드러운 표현인 ‘강아지’라는 애칭을 사용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인의 믿음입니다. 유다인들은 식탁에서 식사가 끝나면 빵부스러기로 손을 비벼 씻었습니다. 그때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는 강아지 차지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 점을 빌어 자기 간청을 강조해서 말합니다. 이 믿음에 예수님께서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인정하십니다. 베다 성인께서는 이 가나안 여인에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신앙의 모범이 되었고, 끈기에 있어서 인내의 모범이며, 예수님의 냉정한 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겸손의 모범이 되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찾는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가나안 여인에게 자존심과 욕심이 없는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h5ErUmiYZCQ
인류의 목자이신 하느님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V3sS_5VzLcM
-조재형신부-
종로구 낙산 언덕에는 ‘깃대봉 냉면’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정집에서 냉면을 팔았습니다. 물론 간판도 없었습니다.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은 간판도 없는 냉면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집 앞에는 국기를 걸어놓은 깃대봉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간판 없는 냉면집을 깃대봉 냉면이라고 불렀습니다. 입이 얼얼할 정도로 매운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저도 간판 없는 깃대봉 냉면집을 몇 번 찾아갔습니다. 지금은 깃대봉도 없고, 낙산의 냉면집도 없습니다. 냉면집이 언덕 아래 창신동을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간판은 사람들이 부르던 대로 ‘깃대봉 냉면’으로 정하였습니다. 예전에 깃발과 깃대봉 그리고 바람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깃발이 없는 깃대봉은 외로울 것입니다. 깃대봉이 없는 깃발은 몸이 없는 영혼과 같을 것입니다. 깃대봉과 깃발이 있어도 바람이 없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깃발도, 깃대봉도 결국 바람이 있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도 깃대봉이 없다며,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이 없다면 허무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부르셨습니다. 40년간 광야에서 정화의 시간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깃발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깃대봉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장하는 바람과 같았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따뜻한 바람으로 품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교회라는 깃대봉에서 하느님의 나라인 깃발을 휘날렸습니다. 많은 이방인들이 교회라는 깃대봉으로 모였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다산 정약용을 무척 아꼈습니다. 정조는 다산의 학문과 열정을 알아주었습니다. 다산은 정조가 가지고 있던 개혁의 꿈을 알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다산에게 벼슬이라는 날개를 달아 주었습니다. 다산은 실적과 능력으로 정조의 꿈이 현실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학자였던 정인보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정조는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일 수 있었고, 정약용은 정조가 있었기에 정약용일 수 있었다.” 궁합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서로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호박과 계란은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합니다. 호박은 계란의 단백질이 우리 몸에 잘 흡수되도록 한다고 합니다. 계란은 호박에 있는 비타민이 우리 몸에 잘 흡수되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궁합이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먹는 삼겹살과 소주가 그렇습니다. 소주는 삼겹살의 지방이 우리 몸에서 소화되는 것을 막는다고 합니다. 삼겹살은 소주의 숙취가 더 오래 남게 한다고 합니다. 내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즐겨하는 일들이 나를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게 하는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과 궁합이 잘 맞았을까요? 자캐오처럼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린 마리아처럼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처럼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주인이 식탁에서 흘린 것은 개도 먹는다며 주님께 자비를 청했던 이방인여인처럼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했던 율법학자는 예수님과 궁합이 맞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했던 바리사이파도 예수님과 궁합이 맞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사랑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깃발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겸손한 사람에게만 하느님 풍요로운 은총이 폭포수처럼 내릴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오늘따라 예수님의 태도는 꽤나 의아합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알아서 척척 치유해주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때로 이방인, 유다인 가리지 않고 즉석에서 순식간에 소원을 들어주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많이 다르십니다. 마귀들린 딸로 인해 절박한 처지에 놓인 가나안 부인에게 던지는 말씀도 꽤나 굴욕적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그 순간 제가 그 여인이었다면 정말 빈정 상했을 것입니다. 아마 저같았으면 이렇게 투덜거렸을 것입니다.
‘아니,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사랑과 친절, 자비와 온유의 예수님이라면서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말씀을 하실 수 있지? 그럼 내가 강아지보다 못한 존재란 말인가? 그래 우리 딸 상태가 정말 위중하지만 이런 수모까지 받아가면서...난 못해!’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다릅니다. 마지막 배수진을 쳤던지,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도에 지나치는 굴욕적인 발언에도 눈 하나 꿈적하지 않고 또 한 번 크게 자신을 낮춥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여인의 딸을 향한 지극한 사랑, 겸손한 자세,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결국 기적을 불러오게 됩니다.
가끔씩 사람을 키우는 큰 스승님들의 제자 교육방식을 눈여겨봅니다. 때로 칭찬도 필요합니다. 당근과 격려도 필요합니다.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 더 큰 성장, 더 큰 도약을 위해, 더 큰 완성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보라는 차원에서의 자극, 채찍질도 필요한 것입니다. 더 큰 사람이 되라, 스승인 나를 넘어서라는 의미에서 혹독한 과정도 의도적으로 거치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마음이 아니셨을까요? 여인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시기 위해 자극을 주신 것입니다. 더 크게 한 걸음 나아가라고 살짝 튕긴 것입니다.
딸의 치유는 사실 그녀가 얻은 것 가운데 작은 선물이었습니다. 더 큰 선물, 더 큰 깨달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 이 세상에서의 일회적인 치유와 회복뿐이 아니라 영원한 치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 하느님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인의 내면 안에서는 큰 도약과 성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치유자를 넘어 영혼의 치유자란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주인임을 넘어 또 다른 세상의 주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적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강한 확신뿐만 아니라 철저한 겸손의 덕이 요구됩니다.
겸손은 무엇입니까? 나 자신의 처지를 아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나약함, 나 자신의 한계, 나 자신의 무능함, 나 자신의 무기력함, 죄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비참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족한 나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결국 내가 최종적으로 의지할 곳, 마지막으로 매달릴 곳은 하느님뿐이라는 진리를 확신하고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만 신앙의 진리가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만 하느님 풍요로운 은총이 폭포수처럼 내릴 것입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다」
-반영억신부-
우리 옛 속담에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또는 “마음이 흔들비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다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을 드러내고 말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본마음을 알게 됩니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자기 딸을 살려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마태15,21)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애원하였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15,22).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그들의 태도가 마땅찮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그랬을까? 이방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겸손하게 끝까지 간청하였고, 마침내 응답을 얻어냈습니다. “믿음과 겸손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하고 겸손함이 배어있는 믿음만이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함께야).
예수님을 위하는 방법을 잘 찾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생긴 여인을 보살펴 주시도록 안내할 수 있는 마음을 잘 지킨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5-16).
예수님께서는“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5,22.25)하고 애원하는 여인의 간절한 바람과 원의에 대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깊은 만큼 풍성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11,6).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5,4). 간사한 마음을 다스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나안 여자의 변화』
-송영진신부-
자기 자신이나 사랑하는 가족이, ‘고치기 힘든 어떤 중병’에 걸렸을 때,
이 종교 저 종교 돌아다니면서 “병을 낫게 해 주시면,
제가 이 종교를 열심히 믿겠습니다.” 같은 기도를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절박함과 간절함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종교 저 종교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병을 낫게 해 주시면’이라고 ‘조건’을 먼저 거는 것도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바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그냥 ‘흥정’일 뿐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어떤 가나안 여자’는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물리치지 않으셨고, 그 여자에게
‘믿음의 은총’을 주셨고, 또 여자가 청하는 ‘치유의 은총’도 주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이 이야기에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내용을 생각하면 ‘가나안 여자의 변화’ 라고 제목을 바꿔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려면, 바로 이 믿음을 바탕으로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1-23)”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이방인이고, ‘이교도’입니다(마르 7,26).
(여자는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에 속해 있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간청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첫 번째 거절’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생활과 내면을 살펴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호칭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신앙고백과도 같은 호칭입니다.)
예수님의 반응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여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긴 했지만, 여러 우상들 가운데 하나를 찾아온 것일 뿐이고, 예수님을
부를 때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누군가에게서 미리 배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방인이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빈말’일 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침묵을 거절로 이해했고,
그래서 여자를 돌려보내자고 건의합니다.
(제자들이 한 말의 실제 뜻은, “시끄럽고 귀찮으니 쫓아버립시다.”입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4-28).”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두 번째 거절’입니다.
뜻으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하면
먼저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여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양’이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양’이 되기를 자기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스스로 하느님의 양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으면서도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여기서 ‘길 잃은 양들’이라는 말은,
‘능동적으로 하느님을 찾는 양들(회개하는 사람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여자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면서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간청하는 장면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말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과 여자의 간청 사이에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믿겠습니다.” 라는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세 번째 거절’이고, 뜻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면
우상 숭배를 버려라.(강아지 상태에서 벗어나서 참된 자녀가 되어라.)”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개들, 돼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배려하셔서
‘개들’을 ‘강아지들’로, 조금 부드럽게 바꾸셨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라는 여자의 말은, 자기가 강아지 상태에 있음을,
즉 우상을 숭배하고 있음을 인정한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상 숭배를 버리겠다고 약속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말은, “이제부터는 강아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겠습니다.
그러니 우선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라는 간청입니다.
여자가 너무 절박한 상황에서 마음에도 없이
급하게 약속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딸의 치유도 분명히 절박한 일이지만, 여자는 자기가 그동안 우상 숭배자로
살았던 것을 뉘우쳤을 것이고, 참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서 살기를 희망했을
것이고, 그것이 더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인도하는 대로 잘 따라와서 변화된 것을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믿음과 간절함과 겸손으로 원하는 것을 얻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신 이야기입니다.
(여자의 딸의 치유는 부수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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