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태오 16,24-28)
"Whoever wishes to come after me
must deny himself,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나훔 예언자는 피의 성읍인 니네베의 멸망을 예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올 때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인데,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진심이야, 힘들지 않게 할게, 영원하자, 나는 달라, 믿어줘, 지켜줄게, 행복하게 해줄게, 앞으로 잘할게, 항상 곁에 있을게….”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는 이 말들이 모두 공허하게 느껴진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진심이야’라는 말은 행동 없이 말뿐인 가짜 진심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힘들지 않게 할게’는 너 때문에 더 힘들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원하자’는 그냥 한때의 감정이었고, ‘나는 달라’라고 말했지만 그 역시 다른 사람과 똑같았다고 합니다. ‘믿어줘’라고 했지만 자주 배신했고, ‘지켜줄게’라고 했지만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행복하게 해줄게’라고 했지만, 더 외롭고 불행해졌습니다. ‘앞으로 잘할게’는 역시 말뿐이었고, ‘항상 곁에 있을게’는 시간이 갈수록 곁에 없을 때가 더 많아지다가 결국 떠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말하는 사랑은 거짓이기도 하고, 변함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인 주님 사랑에만 기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보다 세상의 가짜 사랑, 거짓 사랑을 더 좇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유한한 세상 안에서의 사랑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사랑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어떻게든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를 전해줍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의 수난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두 가지 조건을 채워야 하는데, 첫째는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희망과 계획보다 제자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자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목숨까지도 버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손해 보는 일 같기도 합니다.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시지요. 그렇기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아니, 더 큰 이득을 얻게 됩니다. 이 세상의 시간은 유한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의 시간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절대로 손해 볼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위로는 손을 잡고 그 추운 영혼 위에 이불을 덮어 주는 일, 그리고 그 따뜻한 이불이 내 영혼도 덮어 주는 일(송경림).
다정한 것만 살아 남는다. 그런데 다정해지려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mK-HeBpHnOs
송곳니를 드러낸 사자와 이를 피해 달아나는 사슴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구해주고 싶습니까? 세상에 더 많은 사자가 있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착한 사슴이 뛰노는 숲을 원하십니까? 아마 두 종 중 하나가 멸종한다면 사자가 먼저 멸종할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지배하는 인간은 인간처럼 강한 존재가 아닌 다정하고 온화하고 순종적인 사슴과 같은 존재가 세상을 채우기를 원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인간은 사슴 같은 순수하고 착한 것을 살게 하고 싶을까요? 인간은 히틀러처럼 한 민족을 말살하고 싶을 정도로 잔인한 존재인데도 말입니다.
토머스 헉슬리는 『생존을 위한 투쟁: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늑대에게 공격받는 사슴을 보면 동정심이 든다. 사슴 같은 자를 순수하고 착하게, 늑대 같은 자를 독하고 악하게 여길 것이다. 용기와 열정으로 사슴을 지키며, 피가 철철 흐르는 무시무시한 늑대 소굴에서 구해내고 싶을 것이다.”
강한 자의 특징은 의외로 자비심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강한 자는 집단을 형성하는데 그 집단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능력이 자비심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에 대한 자비심이 없다면 무리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상대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자비심입니다. 이 자비심이 클수록 더 큰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네안데르탈인은 그 친화력이 1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그들보다 100배 이상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숫자가 많은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더 많은 호모 사피엔스들이 모이다 보니 언어와 같은 소통 능력과 함께 거주하기 위해 기술적인 능력들이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들에게 신이 모든 인간을 창조했다는 믿음이 있을 수 없기에 히틀러처럼 더 약한 종족을 사정없이 죽이는 잔인함도 동시에 표현되었습니다.
어쨌건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는 이 지구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친화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친화력이란 타인에게 손톱과 이빨을 절제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이 친화력을 마치 늑대가 강아지가 된 것처럼 ‘자기 가축화’(self-domestication)라고 부릅니다.
20세기 러시아 학자 벨라예프와 류드밀라는 동물의 가축화 과정을 알아보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야생 여우 중에 친화력이 강한 여우들을 선택하여 몇 번에 걸쳐 교배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주둥이가 짧아지고 송곳니가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포식성과 호전성이 감소하여 더 귀여운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또한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야생의 보통 여우들보다 5배나 많아졌습니다.
자, 그럼 세로토닌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인간에게 길든 여우는 사람의 손짓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음식이 들어있는 그릇을 사람이 손으로 가리키면 개와 같이 길든 동물은 그 손짓을 알고 음식을 찾지만, 침팬지와 같은 동물은 그것을 믿지 않고 본인 능력에 의존하여 찾으려 합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래서 개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침팬지나 늑대는 사라질 것입니다.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만 가축화 한 것일까요? 이 책에서는 인간도 살아남기 위해 가축화하였다고 합니다. 인간 사회도 더 강한 자가 있고 약한 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송곳니를 숨기고 그 지시하는 바에 순종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자비심입니다.
[참조: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유튜브 채널, ‘요요’]
자비심이 가장 강한 동물이 인간입니다. 자비가 없는 인간은 세상을 파괴하지만, 자비심이 큰 인간은 세상을 창조합니다. 그런데 그 자비심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발톱과 송곳니를 덜어내는 십자가를 통해 형성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밥은 안 먹어도 40일은 살지만, 사랑을 4일만 받지 않아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지금 코로나로 하루에 1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지만 사실 매일 자살로 죽는 사람이 40명 가까이 됩니다. 어느 게 더 큰 병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바이러스일까요, 아니면 우리 마음 깊숙이 있는 사랑 받지 못하는 바이러스일까요?
금쪽같은 내새끼 107회에 ‘소아 무기력증’을 앓고 있는 금쪽이가 나옵니다. 인생이 공허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살고 싶지 않은 모습의 초1 여자아이입니다. 아이가 무기력하고 두렵고 불안해하는 이유는 아이 부모의 부부싸움 때문입니다. 부부는 서로 이혼 직전까지 간 상황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가 헤어질까 봐 더 불안합니다.
싸움은 왜 일어날까요? 내가 죽지 않아서입니다. 피 흘리지 않아서입니다. 친화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친화력은 결국 내 송곳니와 발톱을 자르는 일입니다. 그 일이 아니면 나도 죽고 자녀도 죽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큰 교육은 부모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환경 안에서 자녀들은 나빠질 수 없습니다. 살고 싶어지기에 자녀들도 이를 감춥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살 생명력을 얻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부모는 임종 체험으로 관에 들어감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으로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합니다. 자녀들은 매우 행복해합니다. 무엇이든 흐르지 않으면 생명력을 잃습니다. 돈은 통장에 갇히면 생명력을 잃습니다.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흐르지 않으면 생명도 생명력을 잃습니다. 흐르는 것만 생명력을 갖습니다. 따라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칙입니다. 생명이 흐르려면 죽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주님께 내어줄 수 없어서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가질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선악과를 내어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내어줄 수 없다면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의 소유가 됩니다. 그것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재물도 마찬가지고 생명도 그렇습니다.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입니다. 살려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정해집니다. 다정해야 살아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4-25)
십자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JwEBl-WBjvM
-조재형신부-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 이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천재지변 등 다방면의 자료를 수록한 종합사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일본, 중국, 월남(베트남) 등 유교문화가 퍼진 곳에는 모두 실록이 있는데 편찬된 실록은 후손 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라고 합니다. 이 원칙의 고수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에 대한 왜곡이나 고의적인 탈락이 없어 세계 어느 나라 실록보다 내용 면에서 충실하다고 합니다.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은 본인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서 정확하게 사실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후손 왕이 실록을 볼 수 있다면 허물과 실수를 고치거나 없애려고 할 것입니다. 만일 후손 왕이 실록을 볼 수 있다면 작은 업적을 크게 과장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실록이 아니라 소설이 될 것입니다.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은 양심과 신념에 따라서 기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관직에서 쫓겨나고, 때로는 목숨까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본당에도 여러 기록과 자료가 있습니다. 지금은 전산화 되어서 기록이 간편하지만 예전에는 모든 기록을 수작업으로 했습니다. 자료를 보관하는 창고도 있었습니다. 세례대장, 혼배문서, 건축물 서류, 회계자료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오래된 본당은 10년사, 25년사, 50년사와 같이 본당의 역사를 자료로 만들기도 합니다. 착각 때문에, 때로는 실수로 기록이 누락되기도 하고, 세례명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관계자들의 증언을 듣거나, 사진이 있으면 정정하거나, 수정할 수 있습니다. 저도 본당에 있을 때 기록으로 남긴 것이 있었습니다. 성당 부지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자들도 있었고, 신자가 아닌 분들도 있었습니다. 예전에 있던 신부님이 들어와 살도록 허용한 경우도 있었고, 공소회장님이 들어와 살도록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매년 일정한 비용을 받는다는 서류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점유권이 인정되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서류를 만들었고, 비용을 받았습니다. 다음 신부님은 그 서류를 근거로 성당의 권리를 행사 할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부임한 사제는 지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명확하게 잘못된 것은 분명 수정하고 정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을 드러내거나, 전임 사제를 깎아내리는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기록을 담당하는 책임자도 사제가 바뀔 때마다 원칙과 소신을 바꾼다면 그것 또한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들이 양심과 신념에 따라서, 때로는 목숨을 걸고서 기록을 남겼기에 조선왕조실록은 국가의 보물이 될 수 있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생을 망치는 사람의 실수는 남을 깎아 내리면 내가 돋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새로 온 사제는 신자들을 위한 사목과 본당 어려움을 해결하는 능력과 업적으로 평가 받는 것이 좋습니다. 전임 사제의 허물과 잘못을 밝혀내는 것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어진 현안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모든 책임자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렇게 국가의 기록을 만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남을 험담하고, 시기하고, 깎아 내리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주님만을 믿고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이 참다운 신앙인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과 수난 예고가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일종의 ‘제자 모집 광고’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 16,24)
오늘날 ‘성소자 모집 광고’를 이렇게 낸다면 누가 따라 나설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나를 따르려면'으로 시작되는 것은 곧 어제 예고하신 수난의 길을 함께 가려는 자를 제자로 모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누구든지'라는 말 속에서 보듯이, ‘원하기면 하면 누구나’ 따라 나설 수가 있으니, 곧 그가 이방인이든 죄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병자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곧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두 번째 조건인 ‘제 십자가를 지고’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지 고통을 받아들여 짊어지는 것만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인을 못 박는 사형도구이기에,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곧 죄를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허약함과 무력함을 품고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다’ 라는 말의 원어의 뜻이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끓어 안다’ ‘가장 소중한 것을 가슴에 품다’라는 의미이기에, 십자가는 마지못해 억지로 떠맡아지는 것이 아니라 흔연히 자발적으로 품는 것이요, 사랑으로 끌어 안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곧 자신의 죄와 허약함을 소중히 맞아들여 품고 사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십자가를 지셨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십자가를 만나면, 곧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 자신의 나약함이나 무능력을 만나면, 그것을 제거하고 해결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 십자가를 제거하지도 해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제거할 수 없으면 그것을 피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피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십자가를 피해갈 수 없기에 참고 견디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참고 견디지도 않으시고 기꺼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견디기 힘들어서 건너뛰거나 초월하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십자가를 건너뛰지도 초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십자가와 타협하거나 무관심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과 타협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흔연하게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고 고통 속에서 사랑하는 데에 있는 까닭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바로 그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록 죄와 허약함과 고통 중에 있어도 그것을 벗어나려 하기보다 바로 그 속에서 사랑하라고,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마태 16,2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며,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오직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18주 금요일-누가 주님을 따르고 누가 따르지 않을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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