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도미니코 성인은 1170년 스페인 북부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덕을 쌓는 데 몰두하던 그는 사제가 되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적인 설교로 사람들을 회개의 길로 이끌었다. 도미니코 사제는 1206년 설교와 종교 교육을 주로 담당하는 도미니코 수도회를 세우고 청빈한 삶과 설교로 복음의 진리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강조하였다. 1221년에 선종한 그를 1234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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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마태오 17,22-27)
“What is your opinion, Simon?
From whom do the kings of the earth
take tolls or census tax?
From their subjects or from foreigner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사제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리자, 그는 주님 영광의 형상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임금의 자녀들은 성전 세를 면제받지만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일반 전시실에서 그림 한 점이 없어졌습니다. 난리가 났지만 그림의 행방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야 범인이 잡혔습니다. 이탈리아 사람으로 그는 이렇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이 그림의 화가는 이탈리아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이탈리아의 것이다.”
이 도난 사건으로 인해 되찾은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해졌습니다. 그래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그림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이 사건 전에는 그렇게 관심이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눈썹도 없는 여인의 초상화, 그러나 여기에 스토리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다시 보게 되었고, 의미를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남을 쫓아가며 사는 것 역시 스토리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남과 다른 나만의 멋진 스토리가 이 세상을 사는 의미를 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곳에서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멋진 스토리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런 스토리를 만들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일행이 카파르나움에 이르렀을 때, 성전세 납부에 관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성전세는 성전 유지와 희생 제물의 비용을 충당하는 것으로,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사람이 매년 내는 인두세였습니다. 그러나 성전 주인이나 제관들은 납세 의무가 없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라고 했으니, 주인은 하느님이고 제관들은 그 식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하느님의 아드님이기 때문에 성전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식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낚시해서 성전세를 직접 내게 하십니다.
성전세 내지 않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한 공격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 아니라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부정하는 것으로 죄의 영역에 들어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죄의 영역에 갇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에, 굳이 낼 필요가 없는 성전세를 내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하지 않으려는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의 스토리에 우리는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스토리에 우리는 모든 믿음을 기울이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어찌하다 보니 매달 뉴욕에서 LA로 오게 되었습니다. 5월에는 ‘북미주 파견 사제 협의회’ 총회가 있었습니다. 평화신문은 당연직으로 이사회 임원이 되기 때문에 참석하였습니다. 6월에는 ‘북미주 파견 수녀 협의회’ 피정이 있었습니다. 3년 전에 8일 피정을 함께 해 주기로 했는데 팬데믹으로 연기되었다가 이번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7월에는 ‘미주 엠이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동북부 엠이 대표신부이기에 참석하였습니다. 왕복 12시간이고, 시차가 3시간이 나는 거리입니다. 같은 미국이지만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그럼에도 매번 잘 다녀올 수 있는 것은 저를 도와주시는 ‘수호천사’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숙소를 마련해 주시고, 아침에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십니다. 어떤 분은 차량 봉사를 해 주시고, 집 밥을 해 주십니다. 어떤 분은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을 볼 수 있도록 안내 해 주십니다. 제가 능력이 있고 잘나서가 아닙니다. 제가 서품을 받은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수호천사’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분들이 아직 동부에 오지는 않았지만 언제가 동부로 오시면 저도 ‘수호천사’가 되려고 합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파견된 사제나 수도자들은 비자가 30개월입니다. 예전에는 60개월이었다고 합니다. 60개월이면 5년이기 때문에 임기를 충분히 마치고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비자가 30개월로 줄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기 중에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한번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다. 시간도, 비용도 감수해야 합니다. 미국의 법이 엄격하게 바뀐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비자를 이용해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자 기간이 끝났음에도 더 머물려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비자와 관련해서 미국의 법에 저촉되는 일이 있었다면 미국의 법은 비자기간을 축소하는 결정을 내렸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종교인이기에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종교인이라서 세상의 법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인이라면 하느님의 법도 잘 지켜야 하지만 세상의 법도 잘 지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셨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느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느냐?” 가을을 기다리며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행복한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낮에는 소탈하고 명랑하게, 밤에는 더없이 진지하고 거룩하게!
-양승국신부-
오늘은 스페인 태생의 명설교가이자 정통 가톨릭교회의 수호자이면서 도미니코 수도회 창설자이신 도미니코(1170~1221) 사제의 축일입니다.
도미니코회 역사 자료에 따르면 그는 언제 어디서나 말과 행동으로 자신이 복음의 전달자라는 신원의식을 드러냈습니다. 낮 동안 동료들과 엮어가는 수도 생활 속에서 그는 더없이 명랑하고 소탈했습니다. 얼마나 다정다감하고 붙임성이 많았는지 그의 주변은 언제나 그를 존경하는 동료 수도자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러다가 밤 시간이 다가오면 그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주 밤새워 기도하곤 했는데, 너무 열심히 기도하다 보니 동료 형제들이 그의 기도 소리에 밤잠을 설치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덕행 중에 눈에 띄는 것 한 가지는 그의 과묵함입니다. 그는 수도공동체의 분열과 상처의 주원인이 되는 말을 지극히 아꼈습니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은 주로 이런 때였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할 때. 형제들을 칭찬할 때. 하느님 앞에 형제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드릴 때.
무엇보다도 도미니코는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그의 탁월한 인품과 높은 성덕에 감화를 받은 그 지역 교황대사가 몇 번에 걸쳐 그를 주교품에 올리도록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 마다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 주교직에 오르기보다는 공동체 형제들과 더불어 겸손하고 가난한 한 수도자로 남기를 간절히 염원했습니다.
도미니코 성인이 살아가셨던 12~13세기는 교회, 정치, 경제적으로 급변하던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발달, 여러 국가들의 출현이 있었지만, 그에 따른 빈곤층을 양산했습니다. 십자군은 이슬람과의 끝도 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이런저런 이단으로부터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당시 인간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극단적 청빈주의, 극단적 금욕주의를 지향하는 이단들이 성행했는데, 알비 지방의 카타리파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선물을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가 바로 도미니코였습니다.
도미니코는 여러 이단들로부터 가톨릭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통 교리에 능통한 설교단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유능한 설교자들로 구성된 도미니코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정통 가톨릭 신앙의 파수꾼으로서 선봉에 선 도미니코회 회원들은 언제 어디서건 누군가의 회개를 위해서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들의 모토인 ‘진리를 관상하십시오! 그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십시오!’에 따라 밤낮없이 기도하며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공부하고 그 깨우친 바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도미니코 성인이 남기신 모범 가운데에서 오늘 날 우리 사제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말로서 만의 설교’가 아니라 복음 선포자가 먼저 복음대로 살아감을 통해 가르치는 ‘행동이 뒷받침되는 설교’입니다.
뿐만 아니라 도미니코의 감동적이고 효과적인 설교의 배경에는 늘 깊은 하느님과의 일치와 기도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이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승리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주심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섭리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께서 하느님의 그 계획에 기꺼이 동의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한 준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시는 제자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시는 장면입니다.
성전세는 모세가 “누구나 자기 영혼의 속죄를 위하여 주님께 반 세겔을 내야 한다.”(탈출 30,13)고 말한 대로, 영혼과 육신의 속죄를 위해 내는 세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금은 자신이 다스림을 받는 왕에게 내는 것임을 일깨워주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니 성전세를 면제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곧 ‘어떻게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성전의 주인이심을,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도 성전세로부터 자유로움을 밝히십니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성전세를 내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자신이 옳긴 하지만, 무모한 분쟁을 가질 필요가 없기에 지혜로운 방법으로 세금을 내기로 하십니다.
곧 세금 낼 돈을 호수로 가서 낚시를 해서, 먼저 잡힌 물고기의 입을 벌려 거기에 들어있는 은전으로 세금을 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당신의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당신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그 기적을 이루십니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사랑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물고기입니다.
당신 그물에 걸려든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그리고 제 입에는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이 물려 있습니다.
당신 말씀이 물려 있습니다.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생명의 말씀이 저를 먹여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영혼을 당신께 바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마태 17,27)
주님!
저는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이오니,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을 입에 물고
당신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적절한 순서와 아량」
-반영억신부-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삼가서 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으면 때로는 기다려야 하는 아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은 로마 총독이 로마제국을 위해 거둬들이던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인두세였습니다. 스무 살 이상 성인 유다인 남자라면 누구나 해마다 영혼의 속죄를 위해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임금들은 관세나 인두세를 남에게서 받아내지 자기 가족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성전의 참 주인이시며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12,6).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속죄받을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세도 바치셨습니다(마태17,27). 성전의 참 주인이신 분께서 성전세를 내신 까닭이 어디 있을까요? 그야말로 요즘 표현으로 스캔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바치십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 세를 내십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 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 하신다.’ 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시면서,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꼬인 사람에게는 우선은 한발 물러서는 것이 좋습니다. 원리(原理)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많은 일을 접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릇이 되지 않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더욱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 같이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때로는 비유를 들고, 때로는 비유를 해설해 주시던 예수님, 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을 닦아주시고, 귀구멍을 열어주시던 예수님, 일어서라고 하시며 손을 잡아주시던 예수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 하시던 사랑의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넉넉한 마음으로 지혜를 갈망하는 날 될 수 있길 희망하며 눈높이를 맞춰가는 가운데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봉헌』
-송영진신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마태 17,25)”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6-27).”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일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말씀 실천의 모범’을 보이신 일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계시가 들어 있고,
“봉헌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이라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탈출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스무 살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주님에게 예물을
올려야 한다.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로 주님에게 이 예물을 바칠 때,
부자라고 반 세켈보다 더 많이 내도 안 되고, 가난한 이라고 이보다
덜 내도 안 된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속전을 받아,
만남의 천막 예식 비용으로 쓰도록 내주어라(탈출 30,14-16).”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데도 성전 세를 내신 것은, ‘말씀 실천의 모범’을 보이신 일입니다.
모범을 보이신 일이라는 점에서,
성전 세를 내신 일은 세례를 받으신 일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마태 3,13-15).”
죄 없으신 분이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때에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사람들을 꾸짖으셨다(마태 21,13).
또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말씀도 하셨다(요한 2,19). 바로 그 성전의
유지비로 사용되는 성전 세를 내신 것은 모순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성전 세는 하느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지시하신 규정에 의한 것입니다.
(사제들에게 내는 세금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치는 헌금입니다.)
그리고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꾸짖으신 것은,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말씀은, 성전 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멈추고 본래의 ‘참 신앙’과 ‘참 종교’로
돌아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에서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라는 말씀은,
“종교 권력을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 라는 뜻도 아니고,
“현행법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라는 뜻도 아닙니다.
(세속의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죄짓지 않도록”이라는 뜻입니다.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라는 번역은, 별로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성전 세 자체는 ‘하느님의 법’이고,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정당한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세속의 장사꾼들과 결탁해서 사리사욕을 채우고,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사제들과는 다릅니다.)
탈출기의 ‘성전 세 규정’에 있는, “부자라고 더 많이 내도 안 되고,
가난한 이라고 덜 내도 안 된다.” 라는 말은,
“부자라고 다른 사람의 것을 대신 내게 해도 안 되고,
가난한 이라고 면제해 주는 것도 안 된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전 세’ 라고 부르긴 했지만, 성전 세는 세금이 아니라 헌금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헌금을 대신 내게 하거나, 면제해 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에게는 돈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잡은 물고기를 팔면 될 텐데, 왜 굳이 기적을 행하셨을까?
“봉헌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라고 해석됩니다.
마르코복음 12장과 루카복음 21장에 있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서,
그 과부가 바친 ‘렙톤 두 닢’은 성전에서 준 생활비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린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교회의 ‘의무’입니다.
도움을 받은 것 가운데 일부를 다시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의 ‘사랑’과 ‘정성’입니다.
(‘사랑’과 ‘정성’이기 때문에 면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봉헌을, ‘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원래 ‘나의 것’은 없습니다.
온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 많이 바치면,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봉헌은 하느님을 상대로 거래하는 일이 아니라,
은총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인다(2코린 9,6).’ 라고 말했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봉헌이 아니라 심판 때의 일에 관한 말입니다.
그는 그 말 뒤에 다음 말을 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2코린 9,10).”
하느님은 우리에게 씨앗도 주시고, 열매도 주시는 분입니다.
많이 바치는 사람에게만 은총을 많이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9주 월요일-하느님의 사람의 부끄러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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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9일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0) | 2022.08.09 |
2022년 8월 7일 연중 제19주일 (0) | 2022.08.07 |
2022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0) | 2022.08.06 |
2022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0) | 2022.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