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마태오 23,1-12)
As for you, do not be called ‘Rabbi.'
You have but one teacher, and you are all brother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이스라엘 집안이 주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살 것이라며 회개하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당신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시며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인간의 상상하는 능력은 행복일까요? 아니면 불행일까요? 상상력을 통해 더 넓은 생각으로 지금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부정적인 상상으로 스스로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형제님이 회사에서 자기 자리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있는데, 직장 상사가 자기 어깨를 툭툭 치면서 “열심히 일합시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이 말과 행동에 크게 신경이 쓰였습니다. ‘직장 상사는 내가 일을 안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상상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상상은 ‘직장 상사가 나를 너무 싫어한다.’라고 정리했습니다. 사실 직장 상사는 아무런 의미 없이 열심히 일하자고 말한 것뿐인데 말입니다.
인간의 문제점은 자기 상상력을 행복이 아닌 불행을 위해 쓴다는 사실입니다. 상상력은 사고의 폭을 넓혀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 결론으로 나아가는 데 상상력을 쓰면 사고의 폭이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불행을 위해 상상력을 쓰는 어리석은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긍정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상상력은 분명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으로 자기 상상력을 잘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어린이’ 입니다. 그래서 자그마한 곳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면서 즐거워합니다.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무시당하는 사람들은 죄인, 신체 불구자, 나병환자, 세리, 과부 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부류가 있는데, 바로 어린이들입니다. 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보았지요. 율법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족한 존재이지만, 부모로부터 가장 큰 사랑을 받는 부류가 바로 이 어린이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해 주시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 어린이들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 바로 예수님 곁에 있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부족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어린이들을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서 꾸짖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부족함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단순함을 통해 상상력을 동원해서 행복으로 나아가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우리 역시 상상력을 행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현명한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행복은 사실 그리 멀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미래 세대에게 전해 주어야 할 진리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8MIrqDF0yxI
-조재형신부-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을 ‘유산’이라고 합니다. 자식은 그것을 ‘상속’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습니다. 유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돈, 부동산, 보석’과 같은 것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유산을 물려받기를 원합니다. 그 눈에 보이는 유산 때문에 때로는 가족들끼리 다투기도 하고, 법정으로 가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집안의 가풍과 가훈입니다. 명망 있는 집안은 눈에 보이는 유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풍과 가훈을 유산으로 물려줍니다. 그런 가풍과 가훈이 있다면 고난이 다가와도, 시련이 다가와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유산은 배고픈 자녀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물고기가 떨어지면 곧 다시 배고프기 마련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배가 고프면 바다에 나가서 그물을 던지면 언제든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눈에 보이는 유산은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은 넘치도록 물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앙’을 물려 주셨습니다. 책을 가까이하는 습관을 물려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신학교에서 학장으로 재직 중인 동창신부님이 보스턴에 모임이 있어서 왔다가 잠시 제가 있는 뉴욕으로 왔습니다. 몇 년 만에 동창 신부님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뉴욕으로 오기 전에 성소국장으로 5년간 있었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성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성소국은 예비 신학생들이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신학교는 성소국에서 보낸 예비 신학생들을 선발하여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생들은 서품식을 통해서 사제가 되어 교구에 소속이 됩니다. 성소국과 신학교는 사제를 양성하는 두 개의 날개와 같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사제성소가 줄어들고 있다고 걱정하였습니다. 이는 서울뿐만이 아니라 다른 교구도 사정은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사제성소가 급감한 유럽과 미국 교회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저 출산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감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유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보다는 눈에 보이는 유산을 물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눈에 보이는 유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을 물려주려고 하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신앙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에 충실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삶입니다. 자녀들의 결혼도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 중에서 선택하도록 하였습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거룩한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배우자가 신앙이 없으면 교리를 받아 세례를 받은 후에 혼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학력과 능력 그리고 재산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심이 깊고, 똘똘한 자녀가 있으면 성직자와 수도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 좋은 것을 제물로 바치듯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서 봉사 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교우들은 함께 모여서 살았습니다. 자연스럽게 교우촌이 되었습니다. 이름은 세례명을 불렀습니다. 교회의 전례가 있으면 옷을 단정하게 입고 모두들 성당으로 갔습니다. 신앙은 곧 삶이며, 신앙은 곧 생활이었습니다. 좋은 땅에서 많은 열매가 맺듯이, 교우촌에서는 많은 성소자가 나왔습니다. 성소자가 나오면 가족들과 교우들은 성소자들을 위해서 더욱 기도하였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하느님나라에서 멀어진다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런 분이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입니다. 그런 분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입니다.
자녀들에게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불평과 불만을 물려주면 안 되겠습니다.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전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신앙의 진리를 먼저 물려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물려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잘못한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법과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사명대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마라. 지금 내가 가는 그 길이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지금 내가 가는 그 길이 뒷사람들에게, 자녀들에게 신앙의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충실하게, 정성을 다해서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대가 지닌 가치와 아름다움에 걸맞은 성(聖)스런 삶을 살아가십시오!
-양승국신부-
어린이들을 대하는 제자들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와 문화의 당시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이스라엘은 철저하게도 가부장 제도에다 남성 성인 위주의 사회였습니다.
당시에는 일단 남자로 태어나야 하고, 또 한 가지 무사히 생명을 보전해서 성인이 되어야만 제대로 된 인간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을 통해서도 이런 씁쓸한 당시 관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셔서 배불리 먹인 사람에 대해서 요즘 같아서는 총 2만 명이라고 할텐데, 복음사가들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남자만 해도 5천 명!” 그러니 여인들이나 어린이들이 당했던 홀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철저하게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분에게는 모든 인간 존재가 다 존귀했습니다. 특별히 나약한 인간 존재가 더욱 그러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우선적 선택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안 그래도 공생활로 바쁘신 스승님께서 별 볼 일 없는 어린이들로 인해 시간을 빼앗기는 것에 대해 마땅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을 제지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꼐서는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오 복음 19장 14절)
예수님의 인간 존재에 대한 극진한 존중과 배려가 눈에 띕니다. 그분께서는 시대를 앞질러 인권의 가치와 소중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당시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던 어린이들, 그들에게도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넘어 영적 차원에서 그들이 지닌 우월성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들의 천진난만함, 영적인 순수함, 맑은 영혼의 가치를 인정하셨습니다.
돈 보스코 역시 인간 존재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데 있어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토리노 시 외곽 벽돌공장에서 노동 착취를 당하는 청소년들, 그 시대 어른들 눈에는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받던 그들을 향해 결연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토리노 시 뒷골목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던 또 다른 청소년들, 당시 기성세대의 시선으로는 기대할 것이 없던 그들을 향해 돈 보스코는 확신 같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럴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아주 병약해 보이는 한 작은 소년에게 돈 보스코는 자신의 손바닥을 펴서 다른 손으로 절반을 나누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모든 것의 절반을 네게 준다. 너는 엄청난 능력과 잠재력의 소유자이다. 너는 앞으로 나와 함께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소년이 바로 돈 보스코가 세상을 떠난 후에 살레시오회 2대 총장이 된 루아 신부입니다.
은혜롭게도 한없이 부족해보이고 나약해 보이는 나를 향한 주님의 시선은 언제나 초 긍정적 시선이요, 초 낙관주의적 시선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관대하고 부드러운 시선을 오늘 병든 나의 영혼을 재조명하고 일어서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숱한 죄와 불충실로 인해 부끄러운 우리지만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그대의 인생은 아주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대의 인생은 그 어떤 보석보다도 더 존귀합니다. 그대는 내게 정말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지닌 가치와 아름다움에 걸맞은 성(聖)스런 삶을 살아가십시오!”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작심하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벌어진 상황에 따라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부자청년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두 이야기를 다 같이 ‘하느님 나라’에 관련하여 이끌어갑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 장(18장)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3)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태 18,3)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친구로 여기건만 제자들은 그들을 업신여기며 그들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 19,14)
이처럼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성경에서 무력하고 힘없는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어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약한 이를 표상하며, 동시에 사회에서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대변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복음의 뒷 장면에서 자기 주장을 하는 부자 청년(19,16-22)과 자신들의 성과에 목소리를 높이는 제자들(19,27)과 대조를 이룹니다.
사실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어린이들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다가가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되게 해 주고, ‘작은 자’ 되게 하고,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가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에게 다가가면, 우리가 그들에게 시혜를 베풀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복음화 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단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나 혹은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교회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단지 ‘어린이에게 다가가라’ 혹은 ‘어린이를 돌보라’고 하지 않으시고 ‘어린이처럼 되어라’, 곧 ‘어린이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 19,14)
주님!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어린이처럼,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기도손이 아름답다」
-반영억신부-
구역미사에 가면 어린이들은 따로 한 방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합니다. 어른들 ‘미사에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하면서 특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미사참례는 어른이나 하는 줄로 압니다. 시끄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좀 더 거룩한 분위기에서 미사봉헌 하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서 거룩한 미사참례의 기회를 빼앗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순수성을 배우려면 그들 곁에 있어봐야 합니다. 진득하게 오래 견디지는 못할지라도 ‘기도손’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진정, 어린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는 3-5살 박이 미카엘라, 젬마, 새랑이도 참석합니다. 모임을 갖는 동안 말썽 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헤어질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에 모으고는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면 십자고상을 가리키고 성모상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을 줄도 압니다.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잘 받아들입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금방 따라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기도의 분위기를 잘 만들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어미새의 소리를 듣고 노래를 배우는 어린 새들과 같이 어린 아이들도 세상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아주 열심한 부모 곁에서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노래와 덕행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또한 우리도 어린이의 단순함과 의존성을 배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어른의 아버지’이기도합니다.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시편131,2) 주님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의존치 않고 의탁하는
-김찬선신부-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늘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어린이와 같은 것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생각게 됩니다.
어린이 하면 떠오르는 것이 힘이 없고 그래서 어른에게 의존하는 존재지요.
그런데 이런 존재가 어찌 하늘나라를 소유한다는 것일까요?
반대로 어른은 왜 하늘나라를 소유할 수 없을까요?
전능하시고 힘세신 하느님은 그 힘으로 사랑하시고, 성인들도 하느님의 힘으로
사랑을 하지만, 보통의 인간은 힘을 가질수록 폭력적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없으면 자기중심적이고 그러니 힘을 자기를 위해 쓰기 때문이지요.
과거 일본이나 독일이 힘을 가지게 되자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하였고,
지금은 미국이나 중국이나 러시아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지금보다 힘세지면 똑같은 짓을 할 것이며
개인도 어른이 되고 힘이 세지면 똑같은 짓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어른은 아이에게 폭력을 가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폭력을 가합니다.
물론 사랑할 때는 결코, 그렇지 않고 그 반대입니다만.
반면에 어린이는 힘도 없고 자기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기 나라를 세우려고도 하지 않고,
집이나 학교에서는 부모와 선생님에게,
성당이나 하늘나라에서는 신부님과 하느님께 순종합니다.
그러니 어린이와 같은 어른은 자기 힘을 쓰려고 하지 않고
하느님께 해주시도록 하느님께 의탁을 하겠지요.
의탁과 의존은 한 끝 차이지요.
인간 세계에서 의존적인 존재는 미성숙한 존재라고 얕보이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 오히려 성숙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의존하지 않고 의탁하는 우리가 되는 것에 대해 묵상해봤습니다.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마태 19, 14)
-한상우신부-
가장 약한 것을
가장 강한
사랑으로
끌어안으시는
하느님이시다.
작은 것이
있기에
큰 것이 있다.
약함과 작음을
가까이
다가오게 하시는
하느님의 참된
사랑이시다.
우리가 겪는
작은 일
큰 일
이 모든 일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시간이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을
멈추게 할 수 없고
막을 순 없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안 되는 것은 없다.
더 가까이
우리에게 오시려
자꾸만 작아지시는
하느님이시다.
신앙은
어린이들같이
딱딱하게
굳어있지 않다.
열려있기에
뜨겁고
순수하기에
진실되다.
어린아이들같이
이 모든 것을
열어보이는
믿음의 시간이다.
가장 약한
부분을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기도의 삶이다.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같이
작아지는
진실한 나라이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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