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셨다는 신앙 교의에 따라 성모님의 승천을 기리는 의무 축일이다. 성모님의 승천은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따른 것이다.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승천의 신비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성모 승천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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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루가 1,39-56)
"Blessed are you among women,
and blessed is the fruit of your womb.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은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의 표징을 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찾아가시어,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다는 인사를 들으시고 주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르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빌 게이츠? 그저 운이 좋아 프로그램 하나 만들고 억만장자가 된 사람이잖아.”
“사실 아이폰을 만든 건 스티브 잡스가 아니지. 잡스는 진짜 천재인 워즈니악한테 빨대 꽂은 인간이지.”
“왜 다들 워런 버핏을 현자니, 뭐니 치켜세우는지 이해가 안 돼. 그 사람 그냥 주식으로 해서 돈 번 사람 아닌가? 개미들 피 빨아먹는 투기꾼일 뿐이야.”
어떻습니까? 진짜 공감이 가는 댓글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남을 비판하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가짜 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감할 필요도 없고, 공감할수록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놀라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 판단에 흔들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부족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족한 사람의 평가가 완전할 리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많음을 스스로 깨달으며 자기편을 만들어 갑니다. 이 세상에서 할 새로운 일도 더불어 많아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어머니 성모님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아직 결혼도 하기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분명 기뻐할 일이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면 기뻐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간음죄로 공개적으로 처형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느님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에 집중하는 사람은 세상의 시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엘리사벳 역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분이며, 태중의 아기도 복되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시선에 집중했던 두 사람은 우리 구원의 결정적 역할을 했던 두 사람을 낳게 되었습니다.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시선에 집중하고 있나요? 세상의 시선에 집중할수록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며, 자신을 저버리지 말라(크리스토퍼 리브).
사람은 자기 뜻이 들어있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00nx-whkOYY
카라바조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천재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마지막 작품이고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힙니다.
그는 1600년경에 귀족들의 그림을 도맡아 그리던 가장 유명하고 실력도 완벽한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술만 취하면 욕설과 폭행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돈을 대어 그를 빼내 주고는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간 횟수가 열다섯 번이나 됩니다.
자기 실력을 믿고 그렇게 자만하던 중, 1606년 5월 사소한 말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가 다시 후원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번엔 모두 등을 돌려버리고 맙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탈옥에 성공하여 이태리 가장 남쪽의 섬 몰타로 도주하여 몸을 숨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커서 칼을 차고 신발을 신고 잠을 잘 정도였다고 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지긋지긋한 나머지 유일한 사면권이 있었던 교황을 설득해보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1610년 세계 처음으로 조명을 사람에게 직접 비추는 기법을 이용해 어린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들고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들어 올리는 그림을 완성해냅니다.
이 그림은 교황을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그림 속의 다윗은 어렸을 때의 순수하고 겸손했던 자기 모습을 의미하고 목이 잘린 흉측한 골리앗의 머리는 지금의 자신을 상징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성직자들의 말에 불순종하여 끊임없이 범죄를 저질러왔던 자기 자신을 죽였음을 의미하는 회개의 증거품이었던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그 완성품을 들고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올랐으나 중간에서 경찰들이 카라바조를 연행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를 도둑으로 오인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그만 그림을 배에 떨어뜨리고 맙니다. 경찰들은 카라바조가 도둑이 아닌 것을 알고 놓아줍니다. 그러나 그림을 가지지 않고서는 교황에게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배를 쫓아 걷고 또 걷습니다. 그러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길거리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카라바조는 왜 그 그림에 그렇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그 그림이 아니면 교황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그림 안에 자기 뜻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넣기 위해 피땀을 흘렸습니다. 그러니 소중한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뜻이 들어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부모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를 사랑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가 점점 커감에 따라 부모의 뜻이 아기 안에 더 들어갑니다. 아이를 위해 피땀을 흘리며 부모의 뜻을 아이를 통해 실현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주시는 부모에게 감사해서 그분들 뜻을 따라줍니다. 그렇게 두 발로 걷고 말도 하고 공부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부모는 그 아이 안에서 자기 살과 피로 넣어준 그 뜻, 그 보석을 보며 아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피 흘리고 고생한 자녀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 아니실까요? 인간이라고 해서 다 천국에서 살게 하실 수 있을까요? 그러면 가리옷 유다도 지옥으로 보내면 안 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리옷 유다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넣어주시기는 하였지만, 자신을 죽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그 뜻이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불이 났을 때 내가 들고 나오는 것이 내 피가 가장 많이 섞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체를 영해도 그분 뜻을 실현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께 귀하게 쓰일 수 없습니다.
‘시몬과 페로’라는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나이 든 시몬은 감옥에 갇혀 젊은 여인의 가슴에서 젖을 먹는 음란한 그림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젊은 여인은 시몬의 딸 페로입니다. 페로는 아사형을 받은 아버지를 위해 아기에게 주어야 하는 젖을 아버지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삶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성모님을 부러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성모님을 육체적으로 칭송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모님께서 칭송받으셔야 할 더 큰 의미를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모님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잉태하실 때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서약한 것입니다. 그렇게 페로처럼 비난받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이런 분에게 영광이 주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있습니다. 수수한 옷차림에 커다란 귀걸이를 한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한 영화에서는 이 소녀가 가정부로 묘사됩니다. 아버지가 아프셔서 젊은 나이에 남의 가정부로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것은 가난한 화가뿐입니다. 그 화가도 능력이 부족하여 아내 집에 얹혀삽니다. 아내와 딸, 장모님은 화가가 그 여자와 빠지지 않도록 빈틈없이 감시합니다. 소녀는 그들에게 지쳐갑니다.
그 소녀를 노리는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 화가에게 돈을 대는 부자입니다. 그는 그 소녀를 그리면 돈을 내겠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소녀를 그리는데 화가는 아내의 진주 귀걸이를 귀에 걸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어찌 될지 뻔합니다. 그리고 소녀를 좋아하는 연인도 그 집에서 나오라고 합니다. 그 연인은 그 화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임신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소녀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하는 행동으로 그 화가만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인간적으로 사랑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그를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기로 합니다. 화가는 그 그림으로 매우 유명해집니다. 덕분에 소녀는 쫓겨나고 연인과도 사이가 안 좋아집니다. 몇 년 뒤 화가의 하녀가 그 소녀에게 선물을 전해옵니다. 그 진주 귀걸이입니다. 화가는 자신의 영광을 그 소녀에게 돌린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이런 희생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뜻이 성모님 태중에 잉태되시고 그분의 피 흘림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진주 귀걸이의 영광을 받아도 당연합니다. 그렇게 성모님께서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갑시다. 그 피 흘림이 영원한 승천과 영광의 유일한 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L1RyAswC_dg
-조재형신부-
오늘은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해서 깊은 사랑과 공경을 드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을 각별한 마음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을 지내면서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믿을 교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초대교회는 복음을 선포하셨던 예수님, 많은 표징과 말씀을 전하셨던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으로 믿었습니다. 성부와 성령과 성자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 되셨으니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인 마리아는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두 번째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의 몸은 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 역시 거룩한 몸이라는 믿음입니다. 성모님은 루르드에서 발현하셨을 때에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여인’이라고 벨라뎃다 성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오늘 축일로 지내는 마리아의 승천입니다. 첫 번째 인간인 하와는 죄를 지었고,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었기 때문에 죽음을 거치지 않고 승천하셨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네 번째는 동정이신 마리아입니다. 교회는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루가 복음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믿을 교리도 있지만 성모님께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순명’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들었던 성모님은 당혹스러웠지만 하느님의 뜻임을 알았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순명은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순명은 원하지 않는 것이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따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열정’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리아의 노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열정이 있었고, 가야 할 길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 굶주린 이를 보살피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세 번째는 ‘중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혼인 잔치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지만 성모님의 청을 받아주셨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들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것은 채워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채워지고, 사랑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는 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미래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삶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보다는 이웃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이 세상에 더 많은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은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분단된 조국은 절반의 광복입니다. 언젠가 하나 되는 조국으로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성부께서 간택하신 신부가 하늘의 신방에서 사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양승국신부-
요즘은 성모승천이라고 하는데, 과거에는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 했습니다. 입을 몽자에 부를 소자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부르심을 받았기에 비로소 승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의 지향점은 하느님의 총애를 입으신 성모님께서 하늘로 불러올림을 받으셨다, 즉 구원되셨다는 것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1950년 11월 1일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회칙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통해서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는 현세의 생활을 마치신 후 육신과 함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
성모 승천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대사건입니다. 승천하신 성모님께서는 오늘 지상 순례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에게도 가능한 일이 승천이고 구원이요, 천상 영광에의 참여입니다.”
성모 승천 교리는 하느님께 대한 성모님의 신앙과 순종, 헌신적인 태도가 무위로 돌아가지 않고 구원과 승천이라는 풍성할 결실을 맺었음에 대한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하면서 그분의 구원 의지 실현을 위해 헌신한다면 성모님처럼 구원과 승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모 승천은 지상 순례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징표로 제시됩니다.
아울러 성모님이 도달한 목표는 개인만의 목표가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의 목표, 교회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마리아 안에서 교회는 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목표에 도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후에도 이 목표에서 빗나갈 수 없다. 마리아의 현양은 세상 종말에서 교회 현양을 위한 보증이다.”
이토록 영예롭고 영광된 성모님이시지만, 그분의 삶이 언제나 만사형통하고 승승장구한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분의 삶은 때로 기구하고 때로 혹독했습니다. 때로 삶 전체가 슬픔 덩어리요 고통 덩어리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때 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건네신 언약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자신은 그분의 부족하고 나약한 여종일 뿐이라는 겸손한 신원의식을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은 혼란과 무지의 상태이지만, 언젠가 그분께서 내 눈과 마음을 열어주셔서,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때가 오리라는 것을 희망했습니다. 그 오랜 인내와 기도, 의탁과 희망의 결과가 영광스러운 승천인 것입니다.
성모 승천과 관련된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의 찬미가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창조주를 아기로서 품에 안았던 분이 하느님의 집에 사랑으로 가득 차서 머무는 것을 옳은 일입니다. 성부께서 간택하신 신부가 하늘의 신방에서 사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을 가까이서 보며, 아들을 낳으실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칼날 같은 슬픔을 느낀 이가 자기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이영근신부-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임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기쁨인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1950년 11월 1일, 한국에서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있을 때, 교회는 '성모님의 승천' 교리를 선포함으로써 인간의 미래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천명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승천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진 기쁨인 광복을 기념합니다.
이 광복이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진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이 파티마 성모님의 전구로 종결되었듯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동란 역시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승천대축일에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을 찬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는 첫 여인인 하와와 비교해 보면 잘 드러납니다.
두 분 다, 맨 먼저 먹는 일, 곧 식사에서 출발합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보고 탐욕을 부려 따먹고 자신이 높아지기를 도모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아채고 다른 이들이 마시고 즐거울 수 있도록 도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와는 탐욕을 부리는 인류의 어머니가 되고, 마리아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땅에 묻혀 한 줌 흙이 되어 사라졌지만, 마리아는 하늘에 올라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이토록 불신으로 자신을 배불려 기쁘고자 한 자와 믿음으로 타인을 배불려 기쁘게 하도록 한 분의 결과는 참으로 큽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의 승천이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고 여전히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심을 드러내주듯이, 성모님의 승천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돌보시며 함께 하고 계신다는 축복이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곧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요 사랑이요 선물입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승천은 하늘에 올라감임과 동시에 우리에게로 되돌아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여전히 우리를 돌보심을 말해줍니다.
또한 죽음을 이기시고 하늘에 오르심의 영광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하늘에 오를 것을 보여줍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 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 보여주려고 하셨습니다.”
(에페 2,6-7).
그렇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바로 이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들은 '성모님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일 뿐 아니라 그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한 찬미 노래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성모님의 자애와 돌보심을 찬미해야 할 일입니다.
사부 베네딕도께서도 수도승들이 찬미의 생활을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하느님을 찬미하기를 원하셨고(시전례 성무일도), 특별히 <수도규칙> 머리말에서는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머리말 30절)하는 것을 하느님의 거룩한 장막 안에 머무는 길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막연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구원)을 이루시고 계시는 주님과 주님의 자비를 찬미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그분을 찾아 만나고 그분을 찬미하는 일, 바로 그것이 다름 아닌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주님을 찬송하고, 구원자 주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시고,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 52)
-한상우신부-
하느님을
믿으셨던
성모님의 삶이다.
하늘은
하늘의
마음이 있고
하늘의
삶이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 지를
묻게되는
은총의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
여정의 끝은
새로운
하늘의 시작이다.
견디어 낸
하늘이며
하나되는
사랑이다.
하늘은 사랑을
만들고 땅은
사람을 키운다.
하늘과 땅의
참된 의미를
보여주시는
성모님의
여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사랑의
신비이다.
성모님은
십자가를
끌어안으며
하늘로 오르신다.
십자가도
사랑으로 품으면
하늘이 된다.
이와같이
사랑이 목적이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목적이다.
하느님을 통하여
인생을
가르쳐주시는
어머니이시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
성모 승천은
성모님의 여정을
품고 있다.
성모 승천은
사람과 하늘이
하나되는
기쁨의 길을
보여주신다.
성모 승천은
참 신앙인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하느님 사랑은
한계와 절망까지
뛰어넘으며
우리를 구원하신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의 힘이다.
승천은 말씀과
실천 안에
온전히 존재하는
하느님의 구원이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먼저 하느님을
진실로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다.
빛과 사랑 안에서
성모님이 하늘로
오르신다.
말씀 나누기 - 성모 승천 대축일-승천이라는 나그넷길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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