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마태오 22,1-14)
‘My friend, how is it
that you came in here
without a wedding garmen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어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 주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 비길 수 있다시며,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너무 잘살고 있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행복한 집이 있습니다. 남편은 좋은 직장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고, 자녀들은 모두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입니다. 재테크를 잘해서 재산도 많이 모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정은 행복한 가정일까요?
아내가 보기에 남편은 회사 일 때문에 늘 바빠서 가정일에 소홀히 하고, 남편이 보기에 아내는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지나치게 간섭한다고 생각하고, 부모는 자녀가 전혀 부모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 간에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행복한 가정일까요? 만약 이 가정이 행복한 가정으로 보였다면, 멀리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가까이에서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우울하고 답답합니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인내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약간의 거리를 두어야 더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법입니다. 유럽에 가면 엄청나게 큰 성당들을 봅니다. 이 성당 전체 모습을 사진기에 담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당과의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즉, 성당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전체 모습을 사진기에 담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눈앞의 문제만을 바라보면서 정작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우리가 될 때가 많습니다. 바빠서 신앙생활을 못 하겠다고 말하고, 여유가 될 때 열심히 하겠다는 공수표를 날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에만 집중하게 되면 결국 하느님을 보지 못해서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우선 유다인의 상류 사회에서는 잔치를 베풀고 친지들을 초청할 때 두 번에 걸쳐 초청하는 절차를 밟습니다. 먼저 잔치 준비과정에서 일정한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준비가 다 된 후에 승낙한 사람에게 또다시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잔치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절하면 커다란 실례가 됩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거절하는 사람에 대해 임금이 화내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핑계는 모두 세속생활에 관한 사연이었습니다. 즉, 눈앞에 놓인 물질의 소유나 세상사에 집착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이어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라고 해놓고서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쫓아내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혼인 예복은 바로 충실한 신앙생활을 비유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 비록 자격 없음에도 구원의 잔치에 불렸지만, 그 잔치에서 즐기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충실한 신앙생활이라는 예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떨어져서 하느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예복도 챙겨 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이유: 초대받은 자와 선택받는 자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hBAU_2fEDRY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아무래도 얼굴에 검은 가면을 쓴 ‘다스 베이더’일 것입니다. 다스 베이더는 본래 제다이였다가 악의 힘을 이용하여 악의 주축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이름은 본래 ‘아나킨 스타이워커’입니다. 아나킨은 제다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콰이곤은 아나킨 안에 엄청난 힘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는 우주의 평화를 이끌어줄 예언된 자라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제다이 수장들에게 그를 소개합니다.
하지만 요다 스승만은 그의 마음 안에 두려움과 분노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를 못 볼까 봐 두려운 거니? 두려움은 분노를, 분노는 증오를, 증오는 고통을 낳지.”
이 말은 자신들을 따르려면 세상에서 소중한 것을 잃을 걱정도,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분노를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나킨은 이 규율을 어기고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나쁜 무리에게 심하게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 분노에 찹니다. 다시는 사랑하는 이를 잃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의 마음에서 이런 욕망이 꿈틀대는 것을 본 우주 공화국 부의장은 그에게 어둠의 힘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합니다. 아나킨은 처음에 어둠의 힘을 이용하는 공화국 의장을 자기 스승 중 한 명에게 이야기하고 둘이 결투를 벌이게 됩니다. 펠퍼타인 의장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너의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면 선택을 해야 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메이스 원투가 그를 찌르려고 하자 그를 쳐냅니다.
펠퍼타인 의장은 아나킨 덕분으로 살아나 공화국을 독재 체제로 이끄는 다스 시디어스가 됩니다. 아나킨은 완전히 악한 사람이 되어 제다이를 모조리 죽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과 자기 아내를 갈라놓으려 하는 스승 오비완과 결투하게 되고, 그는 팔다리를 잃고 심한 화상을 입습니다. 그를 다스 시디어스가 다시 살려내 검은 옷을 입힌 것입니다.
제다이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다이가 되도록 부르심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세례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하지만 혼인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는 신랑에게 합당한 신부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세례를 받았더라도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마음이 없다면 결국엔 쫓겨나서 부르심을 거부한 이들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인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부른 많은 아이 중 그분을 닮으려고 의사가 된 이들이 많습니다. 그냥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불러주신 이를 닮으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제자가 되어야 혼인 예복이 입혀집니다. 혼인 예복은 신랑에게 합당한 순결한 신부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우리도 세례만 받았다고 멈추지 말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마지막 때 아무도 낙오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경륜과 의지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Zo9xnXdQd1M
-조재형신부-
신학생 때입니다. 가을이면 북한산으로 교구 신학생들이 소풍을 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산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삼겹살, 김치찌개, 소주 한잔은 산행의 피로를 풀어 주었습니다. 식사 후에 모두 모여서 장기자랑을 하였습니다. 마칠 때는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깨동무를 하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교가’를 부를 때도 있었고, ‘임쓰신 가시관’을 부를 때도 있었고,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부를 때도 있었습니다. 같이 노래를 부르면서 공동체가 하나 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수들의 공연장을 가면 한국의 관객들은 가수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라이터를 켜거나 야광봉을 들고 공연하는 가수와 함께 하려고 합니다. 외국의 가수들은 한국 관객들의 ‘떼창’에 매료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가수는 노래하고, 관객은 감상하는 것을 넘어서 가수와 관객이 공연을 통해서 하나가 되고, 함께 즐기는 것이 한국의 공연문화입니다. 미국에서 야구경기를 두 번 보았습니다. 응원의 열기는 한국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한국은 야구경기에서도 단순히 관람하는 것을 넘어 응원을 통해서 선수들과 하나가 되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한국은 미국과 다른 모습을 봅니다. 피정, 교육, 미사와 전례가 있는 것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본당에 다양한 행사가 있습니다. 전 신자 도보성지 순례를 가기도 합니다. 제가 본당에 있을 때도 수리산 성지, 절두산 성지를 전 신자가 걸어서 순례했습니다. 미사를 마치면 구역별로 음식을 준비해서 나누었습니다. 전 신자가 기차를 타고 성지순례를 하기도 했습니다. 혼자서 갈 수도 있지만 함께 가면서 친교를 나누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기금마련 바자회를 하기도 했고, 체육대회를 하기도 했고, 본당의 날 행사를 하기도 했고, 전 신자가 바닷가로 여행을 가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은 매년 여름캠프를 갔습니다. 구역별로 연도대회, 성가 경연대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장례가 나면 빈소로 가서 함께 연도를 바쳤습니다. 제가 함께하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도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다양한 행사가 있습니다. 장례가 나면 빈소에서 연도를 함께 합니다. 야외미사도 있습니다. 매 주일 미사가 끝나면 친교실에서 음식을 나눕니다. 한국인들은 신앙생활에서도 전례의 엄숙함을 따르기도 하지만 친교와 나눔을 통해서 신앙의 기쁨을 나누기도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종교는, 신앙생활은 어쩌면 하느님과 사람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베들레헴 구유에서 탄생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선으로 넘어오신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감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권한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삶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규정을 넘어서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시곤 했습니다. 등잔에 기름을 잘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이 오면 기쁘게 맞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복을 잘 갖춘 사람은 혼인잔치에서 즐겁게 먹고 마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름은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하는 재물입니다. 기도, 자선, 희생, 나눔입니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예복은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정결, 가난, 순명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하느님 초대에 대한 거듭된 거절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한때 본부에 머물면서 각종 수도회 안팎의 이벤트를 전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뿐 아니라 살레시오 가족들, 청소년들과 교우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들을 기획하고 주관했었는데, 힘겨운 일이었지만 보람도 컸습니다.
대성당을 꽉 채운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표정에 마음이 뿌듯해지기도 했습니다. 기획했던 행사가 잘 치러지고 나면 만족감에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행사가 마음먹은 대로 술술 순조롭게 치러지지는 않았습니다. 때로 기도가 부족했던지, 아니면 홍보가 부족했던지, 그도 아니면 타이밍이 적절하지 않았던지, 행사 시작 시간은 다가오는데, 썰렁한 행사장 분위기에 속이 바싹 들어가던 순간들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들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정성껏 마련된 잔칫상도 준비되었고, 이제 아들의 혼인 예식 시작이 코앞인데, 연회석이 텅텅 빈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초대장을 보냈건만, 어떤 사람은 밭으로 일하러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버렸습니다. 임금의 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영원한 생명의 잔칫상을 거나하게 잘 차리시는 작업을 완수하셨습니다. 이제 남아있는 일이라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잔치에 초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하느님 측의 열렬한 초대 앞에 이스라엘 백성 측의 반응은 냉랭합니다. 정면으로 대놓고 거부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듯합니다. 이번 초대는 가장 결정적인 초대, 마지막 초대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또다시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거절의 이유가 너무나 허무맹랑해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국행 마지막 열차를 준비시켜놓고 지금 당장 결단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것에 현혹된 이스라엘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끝끝내 열차에 올라타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제1차로 선택받은 민족, 민족들의 으뜸이자 장자였던 이스라엘의 운명은 끝장나버렸습니다. 하느님 초대에 대한 거듭된 거절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는 이민족들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잘 차려진 잔치의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면면은 우리 인간들의 상상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100퍼센트 거기 앉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대사제들, 율법의 전문가들, 바리사이들은 단 한 명도 앉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정통 신앙인으로 자처했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이신 포도나무의 원줄기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포도나무에는 이교 민족의 가지가 접목되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포도 열매가 왕성히 열리게 된 것입니다.
먼저 불림받은 사람들,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 정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월감 갖지 말고, 내가 1등이라는 의식도 갖지 말고 늘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할 일입니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이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잔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잔치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는 구원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상하게도 이 천상의 잔치에 초대받고도 응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심부름꾼들마저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초대에 응답한 이들과 응답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응답하지 않은 이들에는 또 다시 두 부류가 있으니, 자신들의 생업을 핑계 삼아 응답하지 않은 이들과 심부름꾼들을 붙잡아 때리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박해자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먼저 하느님께 초대를 초대받았으나 응답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선택받았으나, 세속적인 탐욕과 진리에 대한 곡해로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고 박해하였습니다.
임금은 말합니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이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
(마태 22,8-9)
이는 하느님의 초대에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구원의 초대는 인간적인 기준으로서의 선악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자비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명심해야 할 것은 설령 초대에 응답했다 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지 않으면 잔치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잔치를 베풀 때 대문에다 예복을 미리 준비해두었고, 손님들이 예복을 입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을 모독하는 태도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응답한 이들 중에도 두 부류가 있습니다.
곧 예복을 입은 이와 입지 않은 이입니다.
그렇다면 초대받은 자가 입고 들어가야 하는 예복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그렇습니다.
아버지 뜻의 실천이 곧 예복입니다.
그러니 ‘오늘 당장’ 우리는 ‘아버지의 뜻의 실행’이라는 예복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초대는 먼 훗날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벌어지는 초대인 까닭입니다.
하늘나라의 잔치 역시 먼 훗날의 벌어지는 잔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잔치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의 예복을 갈아입고 이 은혜로운 잔치에 참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대는 혼인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마태 22,12)
주님!
잔치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찬미와 감사의 거룩한 예복을 갖추게 하소서!
행동하는 신앙, 실천하는 사랑, 꺾이지 않는 희망으로 당신의 갑옷을 차려 입게 하소서!
당신 진리의 옷을 입고, 빛을 살게 하소서!
기쁨의 옷을 입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20주 목요일-하느님 체험의 여러 단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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