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8월 20일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2. 8. 20. 06:30

2022 8 20일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베르나르도 성인은 1090년 프랑스 디종 근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시토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뒤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아빠스(대수도원장)가 되었다. 성인은 몸소 모범을 보이며 수도자들을 덕행의 길로 이끌었다. 또한 그는 교회의 분열을 막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신학과 영성 생활에 관한 저서도 많이 남겼다. 1153년에 선종한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1174년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830년 비오 8세 교황은 성인을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마태오 23,1-12)

 

As for you, do not be called ‘Rabbi.'
You have but one teacher, and you are all brother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천사에게 이끌려 주님의 집으로 들어가 주님의 영광을 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며, 그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말라 이르시고,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류시화 시인이 쓴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보면 성지순례를 가고 싶어 하는 유다인에 대한 영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지순례를 가고 싶어 하는 유다인은 매번 성지순례를 가려고 할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려면 멋진 구두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성지순례를 가려면 기타가 있어야 노래 부르며 가지.’

성지순례를 가려고 할 때마다 계속 필요한 무언가가 떠올라서 그것을 준비하느라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유다인들은 학살당하게 됩니다. 수용소로 끌려가던 이 유다인은 말했습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냥 노래 부르며 갔으면 됐을걸.”

필요한 것만을 찾다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을 찾는 것보다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최후의 목적지가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필요한 것만을 찾으면서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지금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인정받을 행동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라는 최종 목적지에 들어갈 유일한 준비물이었습니다. 이 준비물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 율법을 준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모세가 준 율법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지요. 특히 이집트에 민족 전체가 포로로 잡혀갔다 나온 후 이 율법 하나에 의지해서 삶을 지탱했고, 율법을 잘 지키느냐에 따라 하느님을 잘 섬기고 못 섬기는 표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 학자가 민중의 지도자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의 세부 조항까지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이 바로 바리사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지요. 그래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가 말하는 것은 모두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들은 말로만 가르치고 가르치는 것을 정작 본인이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위세를 떨치며,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만 합니다. 바로 위선의 표였습니다. 위선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지 않는 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낮추는 삶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승리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행운이라 부른다. 패배는 미리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불운이라 부른다(로알 아문센).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리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yukU9eKJSUA

 -조재형신부-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업그레이드(upgrade)'라는 용어를 알게 됩니다새로운 기능이나 정보가 있으면 그것을 컴퓨터에 다운 받아야 합니다예전의 용량과 기능으로는 새로운 것을 열수 없기도 하고정보를 확인하기 어렵기도 합니다비밀번호도 6개월에 한번 정도는 바꾸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비밀번호가 해킹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도 가끔씩 업그레이드를 하게 됩니다확인을 누르면 스스로 알아서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습니다제가 있는 부르클린 교구에서 메일을 보내왔습니다교구장이 새로 바뀌었고시간이 지났으니 저에 대한 정보를 다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저에 대한 정보는 제가 속한 서울 대교구에서 보내면 된다고 합니다부르클린 교구에서 보낸 메일을 보면서 저도 업그레이드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저의 영적인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제가 사제로서 결격사유는 없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미국생활에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을 정해주는 것이 비자입니다종교비자는 30개월입니다대부분의 교포사목 신부님들은 5년가량 있기 때문에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서 한국엘 다녀옵니다새로운 비자를 받아야 미국에 계속 체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운전면허증도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새롭게 갱신하지 않으면 운전할 수 없습니다미국은 주민등록증이 없기 때문에 운전면허증을 주민등록증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정수기도 가끔씩 필터를 교환해 주어야 합니다그래야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도 업그레이드는 필요한 것 같습니다편하다고익숙하다고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확인하지 않으면 부부가 아닌 동거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기념일을 잘 챙겨주고축하 카드도 써주고같은 취미를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업그레이드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업그레이드는 우리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업그레이드 할 것들을 말씀하십니다어떤 것들이 있을까요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은 묶어 다른 사람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회장에서는 높은 자리를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사람들에게는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십니다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우리는 모두 형제라고 하십니다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십니다오늘의 사제들도 꼭 업그레이드해야 할 내용입니다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꼭 업그레이드해야 할 사항입니다오늘의 삶이 교만하고나의 일을 남에게 맡기고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따라가는 삶이라면 우리는 모두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해 주신 말씀으로 업그레이드하면 좋겠습니다. 

 늦었지만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높은 자리!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양승국신부-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강력한 질타를 받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처신 하나하나를 묵상하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어찌 그리 제가 살아온 지난 모습과 닮아있는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는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오 복음 23장 5~7절)

  

돌아보니 수도자요 사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젊은 시절부터 윗자리에 자주 앉았습니다. 수도회 내 이런저런 보직을 담당하면서, 마이크를 잡고 한 마디 할 때도 많았습니다. 미사 때면 잠자리 날개처럼 화사하고 질감 좋은 제의를 차려입고 사람들 앞에 자주 섰습니다.

  

그런 삶이 지속되다 보니 부끄럽게도 스스로 뭐라도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난감해하였을까 생각하니 얼굴이 후끈 달아오를 지경입니다.

  

늦었지만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높은 자리!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높은 자리! 다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 결국 그 자리는 낮은 자 되어 이웃을 섬기라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자리라는 것.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오 복음 23장 11~12절)

  

성구갑’이란 성경 구절이 들어있는 작은 통입니다. 유다인들은 작은 성구갑을 이마나 팔에 달고 다녔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는 의미로 성구갑을 몸에 지니고 다녔겠지요. 

 

그런데 정말 웃기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성구갑은 유난히 크고 화려했습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성구갑!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고 싶은 과시욕이 지나쳤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얼마나 깊은지를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의 극치에 달했습니다. 

 

“이것 한번 봐주세요! 이 멋진 성구갑을! 내가 얼마나 하느님 말씀을 애지중지하는지? 내가 얼마나 성경 말씀을 극진히 여기는지를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칭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실상 그들은 가장 하느님과 멀리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에 반하며 사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철저한 이중성, 과시욕과 허영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공허한 의(義)를 가차없이 폭로하십니다. 그들의 공허한 의는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보여주신 참된 의와 극명하게 비교·대조되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신앙과 이중적인 삶, 그로 인한 철저한 몰락과 멸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강력한 경고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둔다」

 -전삼용신부-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 들은 것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하셨습니다.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어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저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을 하면서도 정작 대접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니 큰일입니다. 

 

“백성이 떼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4,5).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둘 것이요,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심든지 정성껏 심어야 하겠습니다. 실행이 해답입니다. 무엇을 하던지 사랑으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마태 23, 3)

-한상우신부-

그 자리가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하진
않는다.

올바른 삶
올바른 행실로
돌아가야 할
올바름의
시간이다.

올바른 삶이란
무겁고 힘겨운 짐을
피하지 않고 자신이
지는 것이다.

보이기 위한
쇼맨십을
멈추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섬기는 것이
올바른 실행이다.

섬기는 실행에
조건이 있을 리
없다.

섬기고
낮아지는 것이
회개의 삶이다.

섬기고
낮아지는 삶이
깨끗하여지는
삶이다.

더 낮은 곳으로
뿌리를 내리는
자연처럼
튼튼한 중심은
아래에 있다.

부실하고
허약한
우리모습을
보게된다.

옳고 그름의
시시비비를 따지다
정작 아무 것도
실행하지 않는
우리들이다.

낮아지는 실행은
욕심을 비워내는
은총이 된다.

낮아지기에
내맡길 수 있다.

잠자는 믿음을
깨우는
낮아지고
낮추는
믿음이다.

믿음은
이와같이
놓아버리는
것이다.

놓아버리면
거짓에서
벗어나는
은총이 된다.

진실한 삶이
바로 섬기고
낮아지고
낮추는
삶임을
예수님 삶으로
보여주신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는
예수님의
실행이 있다.

보이기 위한 삶을 사는 불행

 -김찬선신부-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하는 일은 다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그러니 그들이 하는 말은 실천하되 닮지는 말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보이기 위해 사는 삶의 불행에 대해서 성찰하고 반성코자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무엇을 하는 이유는 말장난 같지만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고 칭찬받기 위해서고

더 나아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며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사람은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첫째는 그런 칭찬과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설사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런 사람과 그런 행복은

남에게 의존하는 인생이고 남에게 좌우되는 행복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칭찬과 사랑과 존경을 받기 위해 보이는 행동을 하지만

실제로는 받지 못하는 불행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됨됨이가 그렇지 못한데 잘 보이려고 할 경우, 우리는 대번에 그것을 알아봅니다.

우리가 흔히 ‘못된 놈’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되지 못한 놈이라는 뜻이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되다 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못난 놈’은 더 심한 경우입니다.

태어나기를 제대로 태어나지 못했기에 됨됨이가 부실하다는 뜻입니다.

 

태어나기를 작은 키로 태어났는데 멋있게 보이기 위해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다 해도 그것을 멋있게 보지 않지요.

키 작은 열등감의 표시밖에 되지 않으니 오히려 안쓰럽습니다.

 

더 멋있는 것은 키 작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당당함이고,

나폴레옹처럼 비록 키가 작아도 다른 면에서 뛰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잘 보이기 위해 겉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은

됨됨이가 제대로 난 놈이든지 된 놈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됨됨이를 바꿀 기회를 놓치게 할 뿐입니다.

 

다음으로 그렇게 하여 칭찬과 사랑과 존경을 받을지라도 불행한 경우입니다.

칭찬과 사랑과 존경을 남에게 받아야 행복한 사람은

그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칭찬과 사랑과 존경에 좌우되는 사람입니다.

 

많은 경우, 이런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아 불행한 것을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 행복한 사람이 되려는 것이요,

자존감은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아 행복한 사람이 되려는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자중자애하라고 할 때의 그 자중자애,

곧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것보다 더 행복의 길입니다.

 

그런데 더 나은 행복의 길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기에

내가 나를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자기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여 사람의 사랑이나 받으려고 하고,

또 그래서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죄는 아닐지 몰라도

그에게는 불행이고 가여움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8월 22일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