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3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
(마태오 23,23-26)
You cleanse the outside of cup and dish,
but inside they are
full of plunder and self-indulgen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그들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라고 당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시며,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행하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2,000년 4월, 초등학생이 58만 4천 원이 든 돼지 저금통을 주민 센터 민원실에 맡긴 것을 시작으로, 작년 12월까지 그 금액은 자그마치 8억 872만 원에 이릅니다. 전화 거는 사람이 다양한 것을 보면 온 가족이 함께하는 것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물론 언론에서도 이들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한사코 몸을 숨겼고, 주민 센터 측도 그 의사를 존중해서 신원확인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신원 공개를 거부하고 큰돈을 기부했던 이 가정의 모습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기부금 세금을 감면받을 수 있고, 이를 통해 더 많은 기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세상에 드러내면서 다른 사람의 기부를 더 많이 이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면적 합리성보다 그저 실천하는 사랑 자체에만 집중하고 계셨습니다. 기왕이면 보이기 위한 사랑을 하는 우리 현대인의 마음을 흔드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향한 ‘불행 선언’입니다. 특별히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십일조는 본래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레위족과 불쌍한 과부, 고아, 외국에서 귀화한 이민족들을 돕기 위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일조의 근본정신은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과 같은 하찮은 푸성귀를 바치면서 십일조를 바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작 십일조의 근본정신인 사랑은 전혀 실천하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작은 율법 조항을 지킨다고 자찬하면서도 중대한 하느님의 계명을 소홀히 하기에 불행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겉치레에만 신경 쓰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 지금의 우리 모습은 아닐까요? 지금의 우리 모습을 보시고도 ‘불행 선언’을 선포하시지는 않을까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얼마나 성실했는지를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그마한 실천만으로 모든 사랑을 실천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시작은 마음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 자체만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전운전이 보험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UYC-GXwUdcY
어느 권사님의 가정에 복면강도가 들어왔습니다. 잠자고 있던 권사님이 일어나 보니 복면을 한 사람이 가슴에 칼을 겨누며 말하기를 “조용히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권사님은 태연한 자세로 강도의 손을 잡고 “하나님,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앞으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친 권사님은 강도에게 말하기를 “나는 ㅇㅇ 교회 권사인데 무슨 일로 오셨나요?”라고 묻자 강도는 권사님의 행동에 당황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며칠 전에 교도소에서 출소해 나왔는데, 갈 곳은 없고 직장도 없는지라 손수레를 하나 구해서 장사하면서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이렇게 권사님의 집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강도의 말을 들은 권사님은 손수레값을 주면서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고 부디 성공하여 잘 살아 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강도는 권사님의 말에 감동하여 복면을 벗고 엎드려 절하며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강도가 밖으로 나가자 권사님도 따라 나왔습니다. 날씨도 차가운데 들어가시라 했지만 괜찮다며 사거리까지 나온 권사님은 부디 성공하라며 손을 흔들어주며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즉시 그 옆에 있던 파출소에 들어가 신고하여 그 강도를 잡게 했습니다. 권사님의 얼굴을 본 강도는 어이없어서 입술을 깨물며 지긋이 떨었습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천사 같은 모습으로 기도해주며 성공하라 했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경찰들은 “저런 사람이 무슨 교회 권사야?” 하면서 욕했습니다. 권사님은 돈은 찾았지만 자비와 정의와 사랑은 잃고 말았습니다.
[출처: 외식, 위선에 관한 예화 모음, 한나, 네이버 블로그, ‘With the Lord’]
물론 위 권사님은 그래도 정의는 이뤄져야 한다고 여겼겠지만, 누가 봐도 돈의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에 더 큰 것을 잃게 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꼬집으십니다. 그들은 작은 벌레들은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 23,23)
이는 마치 운전자 보험을 믿고는 난폭운전을 해 대는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 보험이 안전 운전을 해야 한다는 의무를 없애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안전 운전이 자동차 보험을 면제해주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안전 운전하려고 해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리고 운전자 보험이 들어있어야 마음이 편안하여 더 안전 운전을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긴장되어 운전이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톨릭교회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와 같은 것들을 더 강조하며 십일조를 잊어버렸습니다. 사실 십일조를 통해 더 의로워질 수 있고 자비로워질 수 있고 신의를 잘 지키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이라고 하신 말씀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 중요하니 그물을 고치는 것은 나중에 하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촉나라는 땅이 비옥하고 물자가 많기로 소문난 부국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촉나라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진나라 혜왕은 촉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야심은 가득했지만, 촉나라로 향하는 길은 대부분 좁은 벼랑이거나 산길이어서 진나라의 대군이 공격해 들어가기에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진나라 혜왕이 촉나라를 정벌하고 싶어 고민하다 신하들을 모아놓고 전략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 비옥한 촉나라 땅을 얻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소?”
모두 그 답답함에 말을 잊지 못했는데 이를 보던 신하 한 명이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강한 공격보다는 지혜로써 촉나라를 정벌해야 합니다.”
이에 진나라 혜왕이 그 방법을 묻자 신하는 대답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촉나라 왕은 물욕이 대단하다 들었습니다. 임금께서 대단한 선물을 할 것처럼 그 환심을 사고 허점을 파고들면 촉나라를 정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진나라 혜왕은 곧바로 촉나라 왕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 척 작전에 돌입합니다. 먼저 옥이 나오는 산에서 엄청난 큰 옥을 캐어 운반한 다음 황소를 조각합니다. 이후 옥으로 만든 소 안에는 금은보화와 비단을 가득 담고 촉왕에게 전할 것이라고 소문을 냈습니다. 이 소문 때문에 많은 사람이 커다란 옥우를 보러 몰려들었고 촉왕도 이내 그 소문을 접합니다.
“진나라 혜왕이 짐에게 보낼 보물을 만들고 있다고? 기쁘네그려!”
소문을 들은 촉왕은 너무나 들떴고 진나라 혜왕을 믿지 말라는 신하들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나라에서 사신이 도착합니다.
“저희 왕께서 촉나라와 진나라의 관계를 우호로 만들고, 촉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큰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아마 이 세상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큰 옥으로 만든 소로 그 도면과 목록을 들고 먼저 오게 되었습니다.”
보물 목록을 본 촉왕은 기뻐하며 말합니다.
“그 보물을 언제쯤 볼 수 있겠소?”
“보물은 거의 준비가 되었지만 문제는 이곳으로 어떻게 운반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아시다시피 촉나라로 통하는 길은 너무나도 협소하여 계곡에서 잃어버릴 위험이 많고 손상될 것 같아 문제입니다. 이 때문에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 해서 족히 2년은 걸릴 것 같습니다.”
“아니, 귀국이 우리 촉국을 위해 보물을 옮기는데, 힘들면 안 되지. 산을 깎고 계곡을 묻어 큰길을 만들어주겠소.”
이에 진나라 사신은 감사함을 표하며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날부터 촉의 백성은 큰길을 만들고자 죽을 힘을 쏟았습니다. 이에 신하들의 반대 목소리가 컸으나 보물에 눈이 먼 촉왕은 이를 다 무시합니다. 마침내 촉으로 향하는 큰길이 완성되자 진나라 혜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큰 옥우와 함께 이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병사 수만을 호위하게 하였습니다.
촉으로 향하는 진나라의 병사들은 큰 길로 진군할 수 있었고 촉의 도성 안에 쉽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도성 안에 들어온 진나라 군대는 돌변하여 촉나라의 군대를 쳐부수고 촉나라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옥우라는 자신의 나라보다 훨씬 작은 보물에 눈이 멀어 큰 나라를 잃어야 했던 촉왕, 그를 향한 고사성어로 소탐대실(小貪大失)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영혼의 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탐욕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내가 하는 모든 영성 생활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리옷 유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러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보험으로 들어놓으라고 하는 것이 선악과를 봉헌하는 일입니다. 곧 십일조를 바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바치면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이시라는 고백을 하기에 탐욕에 물들어 그리스도를 버리는 일은 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무라시는 것은 십일조를 바치면서도 탐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들의 위선을 짚으시는 것이지 그것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십일조를 올바른 정신으로 바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보험을 들었다고 난폭운전을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 보험을 들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보다도 우선 그 뿌리를 흔들리게 만드는 탐욕을 끊는 보험인 십일조를 봉헌하는 일입니다. 선악과를 바치지 않으면 에덴동산에서는 언제 쫓겨날지 모를 일입니다.
믿음과 품위와 십일조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prUKEXcrvnU
-조재형신부-
오늘 8월 23일은 31년 전에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날입니다. 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오래 전이지만 기억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닥에 엎드려 있을 때입니다. 선배 사제들과 교우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새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성가대는 성인들의 전구를 구하면서 ‘성인호칭기도’를 불렀습니다. 10분가량의 시간이지만 감사와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있을 때입니다. 선배 사제들이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새 사제들의 머리에 안수를 하였습니다. 성인호칭기도 때는 감사와 은총이었다면 선배 사제들의 안수는 공동체와 하나 됨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혼자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함께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품식이 끝나고 야외에서 첫 강복을 줄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과 보좌 신부님이 먼저 무릎을 꿇고 새 사제의 안수를 청하였습니다. 사제의 직무는 나이와 상관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땀을 흘리면서 부모님과 교우 분들에게 안수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새 사제의 첫 번째 사목이 시작되었고, 31년이 흘렀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신학교에서 사제의 직무를 배웠습니다. 첫 번째는 ‘교직’입니다. 복음을 가르치는 직무입니다. 교리를 가르치는 직무입니다. 복음은 강론을 통해서 선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교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예비자들에게 가르칩니다. 견진 성사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신자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을 올바로 숙지해야 합니다. 사순과 대림 특강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전하였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것은 제가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을 저는 삶으로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두 번째는 ‘제사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고, 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사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성사를 통해서 드러내야 합니다. 첫 번째 미사를 봉헌했던 그 마음으로 정성껏 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병자성사와 고백성사를 드려야 합니다. 돌아보면 형식적으로 성사를 드렸던 적이 많습니다. 습관적으로 성사를 드렸던 적도 많았습니다. 세 번째는 ‘예언직’입니다. 사제는 시대의 징표를 잘 알아야 합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고민하고 아파하는 것을 공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경청해야 합니다.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생각하니 저를 필요로 하는 분들보다는 제가 필요해서 만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지난 31년을 돌아보며 앞으로 남은 사제생활을 위해서 예전에 신학교에서 읽었던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라는 글을 마음에 깊이 새기려고 합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기도하는 사제
힘없고 약한 자를 돌보며, 그들의 고통을 나누는 사제
검소하며, 물질에 신경을 안 쓰며, 공금에 명확한 사제
청소년과 친하게 대화하며 교리교육에 힘쓰는 사제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제
웃어른에게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예의를 차리는 사제
독선을 피우지 않는 사제
교구장에게 순명하며, 동료사제들과 원만한 사제
강론을 성실히 준비하는 사제
고백성사나 성사집전을 경건하고 예절답게 하는 사제
후배 사제 양성에 마음 쓰며 생활하는 사제
죽기까지 사제 성직에 충실한 사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가 사제직에 더욱 충실 할 수 있도록, 바른 길을 가도록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잔속을 깨끗이 하여라.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행해야 한다.”
아메리카 대륙 제1의 성녀요, 남아메리카의 꽃 중의 꽃, 로사(Rosa)!
-양승국신부-
오늘은 페루 수도 리마 출신의 성녀 로사(1586~1617)의 축일입니다. 성인의 이름 앞에 도시 이름이 붙어 다닌다는 것, 재미있지 않습니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우리도 언젠가 시복시성이 된다면, 서울의 바오로, 태안의 스테파노 식으로 명명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되어 우리가 살았던 도시 전체를 영광스럽게 만들어야겠습니다.
로사의 원래 세례명은 이사벨라였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용모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마치 한 송이 장미꽃 같았답니다. 그래서 로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로사는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초대를 받았는데, 그것은 어린 소녀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병고, 희생, 보속... 그러나 그녀는 고통이 다가올 때 마다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기꺼이 견뎌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좀 웃기기도 하고,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당시의 풍조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의료 환경이 열악하던 당시 대수술을 받았을 때도, 로사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뎌냈습니다. 또래 환자들은 세상 떠나갈 듯이 울어댔지만, 로사는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끝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병세가 완화되고 나서는 단식과 고행으로 예수님의 고통과 수난에 참여하였습니다. 일주일에 사흘은 물과 빵만 먹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침대 대신 판자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자신의 미모가 뭇 남성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다는 마음에 로사는 자신의 얼굴에 후춧가루를 뿌렸습니다. 윤기나는 머리카락은 가위로 잘라버렸습니다. 정원 한구석에 작은 방을 만들어 그 안에서 몇 시간이고 기도와 묵상으로 보냈습니다. 너무나 혹독하게 자신을 단련하는 그녀의 모습에 걱정이 된 지도 신부는 보속과 극기를 완화시킬 것을 간곡히 권고했습니다.
결혼을 원하던 부모의 간절한 청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던 로사는 스무 살 때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에 가입합니다. 정결 서원을 하고 수도자보다 더 수도자다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로사의 노력에 하느님께서도 크게 응답하셨습니다. 기도와 묵상 중에 그녀는 여러 차례 탈혼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겸손했던 그녀는 자신이 체험했던 신비체험에 대해서 일체 함구했습니다.
끝도 없이 반복된 혹독한 고행과 극기의 결과 안타깝게도 로사는 건강을 잃고 맙니다. 전신을 태우는듯한 고통 앞에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극심한 고통조차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자신이 대신 보속한다는 마음으로 고통을 기꺼이 견뎌내며, 주님께 봉헌했습니다.
병약한 로사였지만 3년에 걸친 투병생활을 기쁘게 견뎌냈습니다. 때가 되었음을 알게된 그녀는 골고타의 예수님 수난을 묵상하던 사흘째 되던 날, 평생 사랑했던 예수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르며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로사의 경탄할만한 신앙과 희생, 보속과 기도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녀는 아메리카 대륙 제1의 성녀요 남아메리카의 꽃 중의 꽃, 로사(Rosa)로 길이길이 찬양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여, 모든 사람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의 입에서 받은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고통을 당하지 않고서는 은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느님의 본성에 긴밀히 참여할 수 있고 하느님 자녀들의 영광과 영혼의 온전한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불행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사실 여러 가지 부패 중에서도 종교적 부패는 항상 가장 신랄한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부패는 더욱 그렇습니다.
또 종교지도자들의 윤리적 부패 못지않게 탐욕에 의한 부패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부패와 분열은 요한 묵시록에서는 세상 종말의 징표로 제시되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불행 선언은 종교지도자들의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네 번째 불행 선언은 그들의 십일조에 대한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었고 철저했고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인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행하는 일은 실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마태 23,23)
그들의 마음을 탐욕으로 채웠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불행 선언은 속은 감추고 은폐하면서 겉은 기만과 허위로 깨끗이 닦는 정결법에 대한 경고입니다.
곧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마태 23,25)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차원을 넘어서, 애초에 그릇 안에 담고 있는 음식을 정당하게 취득하였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방종에 대한 경고입니다.
앞의 첫 번째에서부터 네 번째 불행 선언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냐?’ 하시며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을 깨우쳐주신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마태 23,26)
동시에 루카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깨끗해지는 방법, 곧 더러움을 비워내는 방법도 가르쳐주십니다.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
(루카 11,41)
결국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운 그릇을 비우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정결법의 정신이 자신을 지키는 데 있기보다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잔 속을 깨끗하게 하는 일, 그것은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입니다(루카 11,41).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마태 23,26)
주님!
제 마음 속 탐욕과 방종을 비우소서!
깨끗한 것을 깨끗한 채로, 더러운 것을 더러운 채로 드러내게 하소서!
속은 탐욕과 이기로 채우면서 겉모양만 깨끗이 닦고 치장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채우소서.
제 잔과 접시를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로 채우소서!
제가 당신의 것인 까닭입니다.
제 잔은 당신의 피요, 제 접시는 당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마음은 신용장」
-반영억신부-
매일 같이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옷매무새를 고칩니다. 외출을 하려면 거울을 보고 다시 한번 몸단장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고 외모를 가꾸려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에 비하면 마음을 가꾸는 일에는 너무도 인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표정이 맑고, 얼굴이 빛납니다. 그‘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럼에도 마음을 가꾸는 것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라고 권고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정결 예식에 대한, 법을 지키고 가르치는데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럼에도‘위선자’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컵을 닦고 그릇을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겉을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닦아야 할 속을 버려두고 겉만 닦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잔이 아무리 좋은 잔이고 화려해도 속이 더러우면 쓸 수가 없습니다. 속이 깨끗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형식적 의로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영적이고 참된 의로움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15,19-20).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자신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외적 행동 또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 데 인색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혹여 내가 누구를 속였어도 그것은 내가 빠져나간 것처럼 여길 뿐입니다. 사람들 앞에 선 내 모습이 하느님 앞에 선 모습보다 우선일 때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선 내 모습은 사람들의 평판에서 자유롭습니다. 나 자신을 하느님 앞에 세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잠언 15,13).“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그러니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언제 저에게 오시렵니까? 저의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걷고 불의한 일을 저의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그릇된 마음 제게서 멀리 떨어지고 악한 것을 제가 알지 않으리이다”(시편101,2.4). 삶의 여정 안에서 ‘더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위선』
-송영진신부-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마태 23,23-24).”
이 말씀은, 겉으로 보이는 일들만 잘하고,
보이지 않는 일들은 무시하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일은 ‘눈에 보이는 일’입니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천하는 일은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은 일입니다.
위선자들도 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에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천합니다.
그러다가 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안 합니다.
<단속하는 경찰이 있고, 옆에 사람이 있을 때에는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경찰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고 감시 카메라도 없으면 아무 거리낌 없이
속도위반을 하고 신호위반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옆에 누가 있든지 아무도 없이 혼자만 있든지 간에
‘생각이나 행동’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야 진실한 사람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도 나쁜 쪽으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좋은 쪽’으로 차이가 있는 경우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 라고 말씀하셨는데,
자선을 베풀면서 다른 사람들 모르게 하는 경우는,
즉,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몰래 하는 경우는 ‘위선’이 아니라 ‘겸손’입니다.
위선자들은 온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스스로 나팔을 부는’ 사람들입니다(마태 6,2).>
우리는 ‘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거나 의식하지 않고서 마음과 행동이 풀어져버리면
누구든지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8-9)”
카인은 ‘보는 사람’이 없는 ‘들’로 아벨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범죄를 본 사람이 없으니 ‘아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완전범죄’를 실행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보는 사람’은 없었어도,
하느님께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느님의 질문에 “모릅니다.” 라고 대답한 것은,
하느님도 모르고 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카인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밧 세바’와 함께 죄를 지을 때, 또 밧 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일 때,
하느님께서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몰랐던 것이 아니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나탄’ 예언자를 보내서 꾸짖으시자 그때서야 비로소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보셨고,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2사무 12,7-14).
예수님의 말씀에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이라는 말씀은,
십일조를 인정하신 말씀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내는 일은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천하는 일보다는
‘덜 중요한’ 일입니다.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눈에 보이지만 덜 중요한 일은 실천하면서, 보이지는 않아도
‘더 중요한 일’은 실천하지 않는 위선자들이다.” 라는 뜻입니다.
진실한 신앙인은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똑같이 잘 실천합니다(마태 5,19).
<만일에 반대로, ‘더 중요한 일’만 실천하고 ‘덜 중요한 일’은 무시한다면?
그것도 위선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5-26).”
루카복음을 보면,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식사 전의 정결예식’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8-41)”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 있는 말씀은 모두
“몸만 씻지 말고 마음도 씻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회개’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또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속’이 깨끗하다고 해서 ‘겉’은 더러워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속’이 더 중요하고, ‘속’을 깨끗이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하지만,
‘겉’도 깨끗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말과 행동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예의 없는 짓’이고, 그것은 교만입니다.
신앙인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예의와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사실 예의도 없고 품위도 없는 말과 행동은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그 말과 행동도 깨끗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45).”>
말씀 나누기 - 연중 21주 화요일-욕심의 관심과 사랑의 관심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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