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분으로, 갈릴래아의 카나 출신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필립보 사도가 인도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요한 1,45-51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를 참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인도와 터키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다.
☆☆☆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45-51)
"Do you believe
because I told you that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You will see greater things than thi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은 천사에게 이끌려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본다. 도성 성벽의 열두 초석 위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이끌려 온 나타나엘에게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시며,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그들이 보리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분이 “신부님, 이 영화 보셨어요? 정말로 재미있어요.”라며 영화 한 편을 추천해주셨습니다. 솔직히 밀폐된 공간에서 가만히 있으면 거의 100% 잠들기 때문에, 극장에 가지 않은 지 꽤 되었습니다. 불편하게 잠을 자러 극장에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추천해주신 영화는 인터넷 유튜브에서 사서 보았습니다. 이 영화가 특히 재미있다면서 극찬하셨거든요. 재미있다는 말에 코미디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쏙 빼놓는 슬픈 로맨스 영화였습니다. 전혀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의미 있다’가 맞는 표현이 아닐 것 같은데, 우리는 이때에도 ‘재미있다’라고 말합니다. 이 재미라는 용어가 참 다양하게 쓰입니다.
“너 재미없을 줄 알아.”(협박하는 말)
“사업하는 재미가 어때?”(먹고 살기 위한 일인데)
“신혼 재미가 어때?”(재미와 생활이 동의어가 됩니다)
이 밖에도 외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한국말이 있습니다.
“나 머리 자르러 간다.”(단두대가 아닌 이발하러 간다는 것)
“화장이 잘 먹었네.”(화장품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이해하기 힘든 말과 글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함께할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주님을 만나 메시아이심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친구인 나타나엘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성경 지식에 박식한 사람이었기에,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지명인 나자렛 출신의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필립보는 “와서 보시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셨다는 것은 당시의 라삐들이 성경 공부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나타나엘이 성경에 전념하면서 하느님 말씀을 찾고 있다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예수님께 그는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요? 나타나엘이 주님을 향해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만나기 전에 이미 성경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천국의 시작: 내가 벗으면 다른 이도 벗는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5UCnSnHQPcg
너희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되리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iC9f_zWkoA
-조재형신부-
오늘은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저는 2명의 바르톨로메오 사제를 알고 있습니다. 한분은 저보다 4년 먼저 사제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커피의 수요가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스로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가 되었습니다. 직접 원두를 사다가 볶아서 커피를 만들었습니다. 원하는 분들에게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 교육을 시켜주었습니다. 명동 가톨릭회관에 ‘하랑’이라는 커피 매장을 만들었습니다. 하랑은 ‘하느님 사랑’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카페 사목을 하고 싶다고도 하였습니다. 커피를 만들어 주고, 상담을 원하거나 고백성사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고백성사를 주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성당으로 오는 신자들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갈망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사목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건강에 좋은 효소를 만들어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제 앞가림도 하기 벅찬데 신부님은 이웃을 위해서 좋은 것을 보았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터미널 성당으로 자원해서 가셨고 여행자들을 위한 사목을 하였습니다.
다른 한분은 저보다 4년 늦게 사제가 되었습니다. 2002년부터 3년 동안 교구 사목국에서 같이 있었습니다. 신부님도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통합사목연구소’가 있어야 한다고 제언하였습니다. 각자도생이 아니라 각 부서가 서로 협력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상부상조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소공동체 운동의 전도사가 되어 말씀이 공동체에 녹아들도록 하였습니다.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공동체가 변화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변화된 공동체가 지역을 변화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매일미사에 복음 묵상을 나누었습니다. 신부님의 글은 깊은 샘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과 같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의 글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풀었습니다.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쳐갈 때입니다. 신부님께 글을 부탁드렸더니 기꺼이 좋은 글을 신문에 기고해 주었습니다. 갈매기의 꿈에서 높이 날아오르는 조나단처럼 신부님은 늘 새로운 것을 보았고, 찾았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들, 슬픔 중에 있는 이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공감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공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셨습니다. 겸손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희생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순명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우리가 공감의 눈으로, 겸손의 눈으로, 희생의 눈으로, 순명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예수님의 빛나고 기품 있는 얼굴을 뵙자마자 그의 가슴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늘은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추정됩니다.
나타나엘과 예수님의 첫 만남 장면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구세주 그리스도를 직접 뵌 기쁨에 하늘이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인 필립보 사도와는 사뭇 다릅니다.
필립보 사도는 벅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외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요한복음 1장 45절)
그러나 나타나엘의 반응은 의외입니다. 무덤덤하다 못해 시니컬합니다. 흥미 없다는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복음 1장 46절)
별 기대도 바람도 없었지만 친구가 하도 졸라대는 바람에 나타나엘은 예수님의 얼굴을 뵈러 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수님의 빛나고 기품 있는 얼굴을 뵙자마자 그의 가슴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습니다.
암울한 시대를 아무런 희망도 없이 울적하게 살아가던 한 청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활짝 펴지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잔뜩 상기되고 고무된 나타나엘의 가슴에 예수님께서는 활활 불을 지르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복음 1장 47절)
좀 전까지만 해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자렛 출신 어쩌구저쩌구하던 나타나엘은 예수님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180도 태도를 바꿉니다. 태도뿐만 아니라 인생조차 바꿉니다.
정통 유다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던 사람,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의혹과 의심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던 사람, 지극히 냉소적이고 회의적이었던 나타나엘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분의 매력이 흠뻑 빠져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큰 회심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발산하시는 큰 광채 앞에 그의 불신과 냉담함이 순식간에 녹아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첫 만남 장면을 묵상하면서 나와 처음 대면하는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지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큰 광채나 매력이 아니라 스트레스나 우울함을 던져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연륜을 더해갈수록 나 자신만의 고유한 매력을 가꿔나가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통해 깊은 마음의 평화와 위로, 삶의 기쁨을 느끼도록 더 나를 성장시켜야겠습니다. 나를 통해 사람들이 내 뒤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뵙게 해야겠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현재 이란 영토인 메소포타미아·파르티아 그리고 현재 터키에 속하는 키라오니아,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쳐나갔다고 합니다.
그의 선교사업은 가는 곳마다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교 사제들로부터 마법사라고 고발당한 뒤 체포되어 끔찍하게 순교합니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졌을 뿐 아니라 그 상태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거기다 참수형까지 당했답니다. 따라서 그의 상징물은 칼과 벗겨진 살가죽입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증언을 듣고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하며, 필립보의 증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핀잔을 주었지만, 그는 “와서 보시오.”(요한 1,46) 라고 확신에 찬 초대를 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나타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신적인 전지함에 압도당한 나타나엘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48) 하고 당혹하여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요한 1,48)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타나엘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모든 의혹과 편견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믿음과 감격이 솟구쳤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필립보가 부르기도 전에 나를 보고 ‘알았다’는 예지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인 측면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곧 ‘주시하여 바라보고 계셨다’는 ‘사랑’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바라봄입니다.
사랑하면 자꾸 바라보게 되는 거죠.
눈을 뗄 수가 없게 되는 거죠.
바로 지금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스런 바라봄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우리에게도 모든 의혹과 편견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감격이 샘솟을 것입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 나타나엘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자신을 온전히 아시는 구원자요, 주님임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은 자신의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자신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마침내 입술을 타고 신앙고백으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요한 1,49)
이렇게 해서, ‘대전환’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만남의 신비가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빈정거리던 그에게 이제 ‘대역전’이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를 전복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만남의 신비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말합니다.
“두 개성의 만남은 두 화합물질의 만남과 같다.
반응이 이루어지면 둘은 변한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만남의 신비입니다.
진정한 만남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신비입니다.
곧 자신의 존재를 심연으로부터 만난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만남의 신비’가 믿음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통하여 당신 사랑을 퍼부으십니다.
그 사랑을 통하여 하늘과 땅을 이어주십니다.
그 사랑으로 하여 우리를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고, 고백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들 사이의 만남 안에서도 예수님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담아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요한 1,48)
주님!
저를 주목하여 바라보고 계신 당신 눈동자 안에서 진정한 제 자신을 보게 하소서.
제 눈이 맑아져 거짓 없는 진실을 보게 하소서.
하늘이 열리고 진리를 보게 하소서!
제 마음에 거짓이 없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이 퍼부은 사랑을 퍼 올리게 하시고, 당신 만남의 거룩한 신비를 담아내게 하소서!
아멘.
「내가 보았다」
-반영억신부-
‘百聞(백문)이 不如一見(불여일견)’이라 합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래서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다시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거듭 말했습니다. 결국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권고에 따라 발길을 옮겼고,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필립보의 거듭된 권고는 우리에게 주님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인내를 가지고 전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먼저 나타나엘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모든 것을 꿰뚫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의 은총은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도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나의 은혜로움을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삶의 모범을 통해 주님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나의 모습을 이웃이 보게 될 때 주님을 더욱더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 한 논쟁을 피하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내 변화된 모습을 와서 보시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말에서 우리는 고정관념, 선입견이 얼마나 큰 장애를 가져오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이라는 별 볼 일 없는 동네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 메시아는 유다 땅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주님을 알아보는 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안 되나요?’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은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열린 마음으로 상황과 사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을 해 주셨는데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다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조 야곱이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층계를 보았는데, 그 위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내용입니다(창세28,12-13).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은 층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이십니다. 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냥 스쳐보는 것과, 살펴보는 것, 꿰뚫어 보는 것은 의미가 달라집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타나엘을 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람이나 사건,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인 성숙을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들꽃’이라는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것도 좋지만 꿰뚫어 보아야 하느님의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끊임없는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매 미사 안에서 주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통해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구원을 체험하며‘와서 보시오’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라삐 전통에서 “메시아를 갈망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메시아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나타나엘의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나타나엘처럼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나만의 고요한 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은 진실해지고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으며 마침내 그 삶을 주님께서 인정해 줄 것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거짓이 없는 참된 신앙인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타나엘을 부르시다.』
-송영진신부-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요한 1,45-46).”
필립보 사도가 나타나엘(바르톨로메오) 사도를 예수님께 데려간 일은,
안드레아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예수님께 데려간 일과 거의 같습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1,40-41ㄱ).”
필립보 사도의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라는 말과 안드레아 사도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두 사도의 말은 모두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말이기도 하고,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라고 믿는다는
믿음을 증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즉 선교활동은 ‘믿음을 증언하는’ 활동이고,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활동입니다.
따라서 확고한 믿음 없이는 선교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쁜 소식’을 남에게 전하려면, 자신이 먼저 기뻐하고 있어야 합니다.
안드레아 사도와 필립보 사도는 ‘기쁨’에 가득 차서
자신의 ‘믿음’을 증언했고, 그 ‘기쁨’과 ‘믿음’이
베드로 사도와 나타나엘 사도를 예수님에게로 이끌었습니다.
‘기쁨’과 ‘믿음’은 선교활동의 중요한 필수 요소입니다.>
두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고 두 사도가 움직인 이야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통해서 베드로 사도와
나타나엘 사도를 부르신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직접 올 수도 있고,
그렇게 누군가를 통해서 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오든지 간에 ‘부르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필립보 사도의 선포와 증언에 대해서 나타나엘 사도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말은 당시에 갈릴래아 지역을 멸시하고 천대했던
율법학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나타낸 것입니다(요한 7,52).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 말이 아니라,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필립보를 따라나섰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필립보 사도의 ‘기쁨’과 ‘확신’에 가득 찬 모습을 보고
나타나엘 사도의 마음이 크게 감화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7-49)”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타나엘 사도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필립보 사도를 통해서 나타나엘 사도를 부르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참된 신앙인’이라고 나타나엘 사도를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 정도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라는 말씀은,
위선자가 아니라는, 즉 진실한 사람이라는 칭찬입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라는 말씀에는
“너를 부른 것은 필립보가 아니라 나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라는 말씀은,
“성경을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갈망하고 기다리고 있는
너의 심정을 내가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는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눈여겨보셨고,
그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셨고, 그를 제자로 삼으려고 작정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이라는 표현은, 당시 율법학자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과 율법을 공부하던 관습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나타나엘 사도는 자신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되어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50절의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51절의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여기서 천사들이 오르내린다는 말은,
뜻으로는 “주위를(또는 위를) 날아다닌다.”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창세기 28장 12절에 있는,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보다는
이사야서 6장 2절에 있는,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천사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에 더 가깝습니다.
천사들이 예수님 위를 날아다니는 것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모습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날아다니는 천사들이 하는 일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라고 외치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이사 6,3; 묵시 4,8).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으로 시작하는 복음서입니다(요한 1,1).>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 47)
-김찬선신부-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시간이다.
살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아픈 만남도 있었고
우리자신을
성장시키는 만남도
있었다.
만남의 소중함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다.
바르톨로메오가
예수님을 드디어
만난다.
만남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거짓이 없는
사람이
믿음의 진실한
사람이다.
주님의
가르침과
실천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진리의 참맛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길을
찾아주시는
따뜻한 사랑의
주님이시다.
삶의 기쁨을
참된 만남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이시다.
만남은 신앙으로
더 아름다워진다.
모든 아픔과
한계를 넘어서는
진실한 신앙이다.
진실한 신앙은
참된 우리의
모습을 보게한다.
예수님께서는
내면의 길을
만나게 하신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내면의 길은
신비롭고
거짓이 없으며
아름답다.
오늘 우리의
만남이 소중한
신앙으로
내면의 참기쁨을
체험하는 은총과
진리의 시간이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소중한 하늘
소중한 내면
소중한 신앙
소중한 만남이다.
만남을 통하여
알게되는
하늘 나라의
신비이다.
주님 앞에 진실하게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나타나엘에 대해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위선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까?
이방인의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입니까?
우리가 어떤 수도자에 대해 참으로 수도자답다고 할 때,
거기에는 껍데기만 수도자가 아니고
그 됨됨이가 속속들이 진짜 수도자라는 뜻이 있고
거기에는 또 오로지 하느님을 위해 성별된,
오로지 하느님께 바쳐진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에는 마찬가지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이방인처럼 우상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율법 학자들처럼 위선자가 아니라는 뜻에서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보다 사람 눈에 더 들려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려드는 사람이 아니고
겉으로는 거룩하지만 속에는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거짓이 없고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말과 행위,
안과 밖,
행위와 존재가 다르지 않고 일치한다는 인간적 자기완성의 차원이 아니라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한다는 인간관계적 성숙 차원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이고 하느님 앞에서 거짓이 없이 진실한 사람입니다.
어제는 한 수도자를 면담하였습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고 전에도 몇 번 면담을 했던 분입니다.
어렸을 때 가정 폭력을 경험한 분이고
그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아서 공동체 생활에서
다시 그 상처가 건드려져 그 상처가 계속되는 분입니다.
그래서 치유를 받으려고 심리 상담을 받고 했는데
심리 상담도 필요하지만 그 상처를 가지고 주님께 가라고 조언했고
그분도 그러려고 했으며 그래서 정말로 자주 성당을 찾곤 했습니다.
그래서 점차 좋아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어제 와서는 우울증 치료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더 악화된 것이고 자살 충동까지 일 정도인데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제 비로소 제대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정도가 이렇게 심해지기 전까지는 상담을 하고 성당에 갔어도 그저
계속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지 절실하지 않았고 진실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진심으로 자신을 상담자와 하느님께 내놓지 않았었는데
정말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해지자 이제 내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성당에 자주 간 것은 기도 행위를 한 것이지
기도한 것이 아니었고 이제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절실’이 ‘진실’을 견인한 것이고
이제 비로소 하느님 앞에 진실하게 나아가 자신을 온전히 의탁한 것이며
자신의 상처 치유를 하느님 은총과 사랑에 이제 온전히 내맡긴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앞에 자기 상처를 내보이지 않고 자기연민에 빠져있는 것은
치유는 받지 않고 나는 상처받았다며 계속 징징대며 우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약 바르지 않고 자기 상처를 자기 입으로 ‘호’해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나타나엘은 자신을 환히 보시는 주님 앞에서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았는데 우리도 주님 앞에 나갈 때
몸뚱이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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