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Margaret K 2022. 8. 29. 06:14

2022 8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한은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이러한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였다(마르 6,17-29 참조).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한 것은 4세기 무렵 그의 유해가 있던 사마리아의 지하 경당에서 비롯되었다.

☆☆☆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

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마르코 6,17~29)

 

  Herod feared John,

knowing him to be a righteous and holy ma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당신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유다인들에게 말하라시며, 그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헤로데는 생일에 아내 헤로디아의 딸이 청한 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선물로 준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금 나의 행복감을 상승시킬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방법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라면 어떨까요?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어떤 도구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를 행동 과학 교수인 폴 둘런이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뺄셈’이었습니다. 즉, 내가 없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의 아쉬움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고, 아직 갖지 못해서 행복하지 못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있어서 편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종교의 자유가 있게 된 것은 200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미사를 봉헌할 수 있어서 주님을 통해 얻게 되는 위로와 힘을 공적으로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어떨까요? 편하게 신앙 생활하는 지금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신앙의 차원만이 아닌, 일상 안에서도 ‘마음의 뺄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 가족, 친구, 직장과 일, 삶의 단편 모두가 나의 행복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임금은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의 덧셈’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것만을 떠올렸기 때문에 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떵떵거릴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여기서 조금만 더 가지면 가졌지, 잃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었지만, 결국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서 헤로디아의 딸에게 주게 되게 되지요. ‘마음의 뺄셈’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일 잔칫날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서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한 것입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헛된 맹세를 합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이때 세례자 요한의 목을 청하지요.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 앞에서 한 말 때문에, 그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서 헤로디아의 딸에게 줍니다. 헛된 맹세나 하는 임금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었을테고, 계속 싫은 말을 하는 세례자 요한을 제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계속 더하고만 싶었기에 후회할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세상 것은 빼고, 하늘 나라의 것은 더하는 데에서 행복이 있습니다.
결국 당신이 받은 사랑은 당신이 베푼 사랑과 같아요(폴 메카트니).

 함께 하시는 하느님, 예언자의 십자가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_ukbDun5iNI

 -조재형신부-

 

영화 한산이 미국에서 개봉되었습니다저는 전편인 명량은 한국에서 보았습니다명량과 같이 한산은 이순신 장군이 일본의 수군과 전투에서 승리한 영화입니다명량은 적은 수의 배로 많은 수의 일본 수군을 이긴다는 내용입니다이순신 장군은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 바다의 지형을 잘 이용하였습니다회오리 물살이 이는 곳으로 일본 수군을 유인하였고 일본 수군은 회오리 물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조선의 수군에게 공격당하였습니다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승리하였고우리의 바다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한산은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어 내는 이야기입니다이순신 장군은 바다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학익진을 사용하였습니다마치 그물로 고기를 잡듯이 일본 수군의 배를 포위해서 공격하였고압도적인 승리를 하였습니다조선의 수군은 일본의 보급로를 차단하였고명나라의 참전으로 임진왜란은 끝이 났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영적인 전투에 임하는 것입니다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그리스도의 깃발과 사탄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사탄이 우리를 공격하는 무기는 재물권력성공입니다사탄의 무기는 그 힘이 강력해서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우리의 양심을 무너지게 합니다우리의 공동체를 분열시키고싸우게 만듭니다예수님께서는 사탄의 공격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우리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사탄은 또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다음에 하지남들도 그러는데나는 안 돼와 같은 생각입니다다음에 하지라는 생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멀어지고 있습니다남들도 그러는 데라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합리와 하고 있습니다나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명량과 한산에서 이순신 장군이 승리할 수 있도록 공헌을 한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거북선입니다일본의 수군은 거북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떨었습니다거북선은 갑판에 철갑을 둘렀습니다그래서 백병전에 강한 일본 순군은 거북선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거북선은 두꺼운 용머리가 있었습니다그래서 일본의 배와 충돌하면 일본의 배들은 충격에 부서지고 말았습니다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거북선과 같은 것은 무엇일까요사탄의 세력이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떠는 것은 무엇일까요저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기도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마귀를 쫓아내기 힘들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늘 따로 한 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기도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고난과 시련이 다가와도 기도하는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그 희망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줍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를 본받아 저희도 끝까지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하게 하소서.” 

 우리 인생에 열정이 식어버리면 모든 것이 다 시들해집니다!

 -양승국신부-

 

호사스럽게도 매일 저녁 황홀하고도 감동적인 일몰을 홀로 만끽하며, 김기석 시인의 ‘황홀한 일몰’이란 시에 크게 공감합니다.

  

우리는 모두 상처받은 영혼입니다

  

홀로 지새우는 밤이 있음에
눈부신 아침과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저녁

  

산다는 것은
이 얼마나 황홀한 몰락입니까

  

창을 열면 한줄기 바람되어
목놓아 부르는 나의 노래, 황홀한 일몰

  

황홀한 일몰 하면 즉시 떠오르는 인물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멋진 인물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는 당대 다른 지도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는 하늘을 우러러 단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정도를 걸었고, 길이 아니면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가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는 골수를 파고드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철저하게도 일치시켰습니다. 어찌나 강직하고 당당하던지 그 어떤 권력이나 그 어떤 세력가 앞에서도 주눅 드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 어떤 난관이나 권모술수를 내세운 협박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자 요한은 온 생애가 열정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열정에도 종류가 있더군요.

  

베네딕토 규칙서에 따르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선하고 이로운 열정이 있는가 하면 죽음으로 인도하는 모질고 사악한 열정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열정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향한 열정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교활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헤로디아의 집요한 복수심 앞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입을 다물지 않습니다. 의로움과 정의, 하느님을 향한 열정으로 내면이 용광로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그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내던집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파워를 지니고 있는 위정자, 내 위치, 내 연봉, 내 미래를 송두리째 지니고 있는 CEO 앞에서 그의 인간적 약점, 무엇보다도 감추고 싶은 치명적인 약점을 지적한다는 것,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찼던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자신 한 몸 희생해도 아무런 미련 없었던 세례자 요한,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한 줌 재가 되도 좋다고 백번 천 번 다짐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목숨까지 걸고 할 말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세례자 요한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참혹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그 죽음조차 두렵지 않습니다. 그 죽음이 너무나 어이없어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죽음이었지만 이미 천도의 열기로 활활 타올랐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너무도 당당하게 그 죽음을 맞이합니다. 

 

자신의 최후가 너무나 뜻밖이고 당혹스러운 것이 분명하지만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며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지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황홀하고도 장엄한 일몰을 그린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우리 삶에 ‘열정’이란 단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에 열정이 식어버리면 모든 것이 다 시들해집니다. 우리 내면에서 열정이 사라져버리면 우리는 순식간에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열정이 사라질 때 우리 한 평생도 고작해야 쓸모없는 시작과 무익한 종말 사이에서 소모되는 시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세례자 요한처럼 열정이 살아날 때, 아니 활활 타오를 때 비로소 우리는 참 인간으로 참 삶을 살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가 따분한 생존의 연속이 될 것인가, 하느님 안에 하루하루 흥미진진한 충만한 날들이 될 것인가는 바로 이 열정 유무에 달려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이영근신부-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는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인가 봅니다.

 

그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그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비록 폭군이 그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는 없었습니다.

예언자의 소리는 가로막는다고 가로막히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헤로데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불경스러운 세 가지 죄악에 대해서 듣습니다.

파렴치한 생일잔치, 소녀의 음탕한 춤, 임금의 무모한 맹세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결국 무고한 의인의 죽음을 불러들입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오로지 진실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결국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1945년, 히틀러의 암살계획에 연루되어 나치에 의해 사형 당한 디트리히 본회퍼는 '고난에 관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온 까닭이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 온 바람에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비록 혀가 잘려도, 온몸이 혀가 되어 외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예언자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소리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눈물 흘리는 이들의 소리를 듣고 울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마르 6,25)

 

주님!

제 혀가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 되게 하소서.

타인을 뭉개지 않고, 자신을 뭉개어 내어주게 하소서.

제 혀가 어둠을 가르는 불혀가 되고, 진리를 밝히는 말씀의 쌍날칼이 되게 하소서!

헛된 맹세로 덫에 걸려들지 않고, 침묵에 묶어 두어도 의로움을 외치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성 요한 세례자 수난 축일-주님에게는 추종자 누구에게는 선구자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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