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루가 5,1-11)
“Master, we have worked hard all night
and have caught nothing,
but at your command I will lower the net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된다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동차 주행 중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복잡한 결정을 내리는 일을 컴퓨터는 절대 할 수 없다.”
“복잡하고, 감성적이며, 모호한 의미가 담긴 말을 컴퓨터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이 글을 보는 사람은 컴퓨터를 이렇게 과소평가할 수 있냐면서 이 글을 쓴 사람의 무지를 탓하며 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2000년 초에 나왔던, 지금으로부터 불과 20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한 사람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이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프랭크 레비 MIT 교수와 리처드 머네인 하버드 교수가 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사람들이 공감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의 말이었지만 분명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연구도 하지 않았고, 또 깊은 고민도 하지 않은 사람의 말이 사실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계속된 변화의 속도를 우리 인간은 절대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스스로 잘난 체한다고 남이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남이 알아주고, 남이 알아서 그 사람을 높여줍니다. 그래서 나의 말과 행동이 무조건 옳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어느 순간에서도 겸손할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특히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려고 한다면 무조건 겸손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밤새도록 고기잡이가 시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베드로도 어젯밤에 다 해 본 일이었지요. 그러나 존경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순명합니다. 그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물고기도 복종시키는 이 분 앞에서 형편없는 자기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그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베드로에게 보이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합당한 자격은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격이 없음을 또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라고 바오로 사도께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은 겸손의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이런 때 얼굴에서 빛이 난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Soe9pia2yDM
제 유튜브 채널 구독자 중 ‘사랑합니다, 하느님’ 이라는 아이디를 가지신 분의 댓글입니다.
-제가 신앙생활 초기에 체험한 작은 기적이 있어요. 어느 날 성당에 가려는데 갑자기 하느님께 마음속으로 여쭙게 됐어요.
“하느님 오늘은 제가 어떤 옷을 입고 가면 좋으시겠어요? 하느님 뵈러 성당 가니까요. 하느님이 원하시는 옷을 입고 싶어요.”
그러고 옷장을 보니 그동안 한 번도 마음에 안 갔던 옷이 눈에 띄었고 그걸 입고 성당에 걸어갔어요. 그런데 신기한 일이 미사 중에도 미사 후에도 집으로 걸어올 때도 사람들이 얼굴까지 돌려가며 저를 다 쳐다보는 거예요. 정말 거의 모든 사람이요. 입이 떡 벌어지고 눈이 동그래져서요. 무슨 김태희도 아니고….
저는 그런 외모도 아니고 태어나서 이런 경우가 한 번도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요. 집에 와서 보니 진짜 제 얼굴이, 몸이 엄청나게 빛나고 있었어요. 너무 웃기시겠지만 진짜 살 속에서 빛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요. 저도 너무 신기하고 아름다워서 거울을 한참 쳐다봤어요. 그러고 싹 사라졌어요. 그 빛이요.
그때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지나갔는데 최근에 신부님의 강의를 듣고 묵상하다가 너무 오랜만에 딱 생각난 거예요. 하느님의 뜻을 원한 거. 물론 이게 아주 작은 무슨 옷을 입느냐 하는 거였지만요. 그게 하느님께서 마음에 드셨나 봐요. 저는 초신자이고 그리고 주변에 신앙인도 없어서 아무도 저를 이끌어줄 수도 없고…. 그런 상황이니까 하느님께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작은 기적을 선물처럼 주셨던 거 같아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저도 더더욱 믿고 더더욱 하느님의 뜻을 원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정말 얼굴에서 빛이 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도 아주 가끔 빛이 난다는 말을 들어보기는 하였습니다. 그때는 사실 잠을 많이 자서 피부가 좋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잠을 못 자고 지쳐있지만 그래도 신자분들을 위해 무언가 할 때입니다. 그렇게 지쳐있어서 사람들이 나를 피곤하게 보지 않을까 생각할 때 신자들은 빛이 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빛’이 나는 일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도 우영우가 고래들로부터 새로운 영감을 받을 때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빛이 나는 장면이 많습니다. 여기서 고래는 바다의 고래가 아닙니다. 하늘을 나는 고래들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하는 깨달음을 주는 거의 신적인 존재의 상징입니다. 신적인 존재의 뜻이 들어올 때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모세도 하느님과 40일간 대화하고 나서 얼굴에 빛이 나서 수건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우리 신자들은 얼굴에 빛이 나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뽑을 때 먼저 오른쪽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시키십니다. 베드로는 어부이고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생님이기는 하지만 목수이고 고기 잡는 법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그리고는 엄청난 물고기가 잡히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하도 겁이 나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께 처음부터 “물고기가 많이 잡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했고 그 기도가 들어졌다면 이만큼 충격을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량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내가 기도한 것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것보다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분의 뜻을 물어보고 그분의 뜻을 실현하는 가운데서 얻어지는 체험이 훨씬 큰 은총을 선사합니다.
내 안에 성체로 들어오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가로막아 나를 어둡게 만드는 것은 자기 뜻입니다. 기도도 나의 뜻이 이루어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청해서 받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은총을 받습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면 믿겠다는 말은 얼마나 어리석고 어두운 마음입니까?
저도 며칠 전에 피곤하여 가기 귀찮은 곳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주님께서 가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외모에 대한 특별히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저에게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제 외모에 대해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한 수녀님이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는 것이 힘들어서 알프스에서 에델바이스를 보면 견뎌보라는 뜻으로 알겠다고 기도했는데, 결국엔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고 석사까지 버틸 힘을 얻었습니다. 에델바이스는 알프스의 별이라는 꽃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청해 봐야 작은 꽃 한 송이 보게 해 달라는 것이지만 하느님은 비 오는 중에 하늘을 열어 알프스에 별이 쏟아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얼굴이 빛날 수 있습니다. 빛이 은총과 진리로 내 안에 들어와 사시기 전까지 나는 어둠이었습니다. 자아는 어둠입니다. 자아의 뜻이 하느님의 뜻을 가로막지 않도록 합시다. 자주 주님의 뜻을 물어봅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얼굴에서 빛이 난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매력을 풍겨야 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BB8YLYxc3xE
-조재형신부-
컴퓨터 게임을 잘 못하지만 예전에 해 보았던 게임이 있습니다. ‘페르시아 왕자’입니다. 왕자가 긴 여정을 겪으면서 갇혀있는 공주를 구하는 것입니다. 등급이 7가지가 있는데 저는 늘 2번째 등급에서 끝났습니다. 본당 청년들 중에는 7등급까지 가서 게임을 끝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는 게임에 큰 취미도 없고, 등급이 어려워지면서 흥미를 잃었습니다. 영어 공부를 할 때도 문법을 배우는 책이 있었습니다. 제일 처음에 접한 것은 ‘성문기본영어’였습니다. 그다음에는 성문해법영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성문종합영어가 있었습니다. 학원에서 배우기는 했지만 성문기본영어에만 머물다가 졸업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 철학을 배웠습니다. 철학도 등급이 있었습니다. 자연철학, 중세철학, 근대철학, 논리학, 인식론, 형이상학을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흥미가 있었지만 등급이 올라가면서 어려웠습니다. 신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철학을 배워야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눈이 있어서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흘러가는 구름도, 하늘을 나는 새도, 아름다운 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도 행복한 것입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우리는 지식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지식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면 곧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늘을 나는 새의 이름도 구별하게 됩니다. 꽃이 지면 그 자리에 열매가 열린다는 것도 압니다. 이렇게 지식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눈으로 보는 세상에 질서와 조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식의 눈이 질서와 규범을 만든다면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공감의 눈입니다. 아픈 사람, 슬픈 사람, 외로운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겸손의 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만 때문에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트리곤 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눈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눈입니다. 식별의 눈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눈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눈만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도 옳고 그름을 식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또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바로 신앙의 눈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방울과 같습니다. 마치 한 토막 밤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네가 주는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오빠 라자로 때문에 슬퍼하는 마르타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빠 라자로는 죽지 않았다.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마르타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예 부활의 때에는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그리고 죽었던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시련과 고통도 모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천신도, 악신도 그 어떠한 것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나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9월의 첫날입니다. 9월은 순교자의 성월입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좋겠습니다. 그 신앙의 눈으로 순교자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기다리다 보면 거짓말처럼, 기적처럼, 주님께서 다가오실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물때가 좋을 때면 근처 수로로 밤낚시를 나갑니다. 낮에는 잔챙이들이 활개를 치지만, 희한하게도 밤이 되면 씨알 좋은 녀석들이 슬슬 활동을 시작하지요. 밤바다의 고즈넉한 분위기도 참 좋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풍어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해도 허사일 때도 수두룩합니다. 미끼를 싱싱한 것으로 갈아도 끼워보고, 수심도 바꿔보고, 자리도 옮겨보고, 움직임도 줘보고, 별의별 짓을 다해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인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시몬 베드로의 심정이 백이십퍼센트 이해가 갑니다.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딱 그랬습니다. 큰 기대를 안고 밤새도록 애썼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거듭 반복된 헛 그물질에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누군가가 괜히 말 걸었다가는 큰일 날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딱 한마디 건네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복음 5장 4절)
그 말씀을 들은 시몬 베드로는 속으로 웃었을 것입니다. 고기잡이의 문외한인 예수님께서 고기잡이 전문가인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신 것이 참으로 고깝게 들렸을 것입니다. ‘포크레인 앞에 삽질하시나?’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그의 내면의 표현이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복음 5장 5절)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 베드로 사도는 참 착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전문가적 판단에서 도저히 안 될 것이라는 것,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복음 5장 5절)
결과는? 인생 한방이라고, 초대박이 터졌습니다. 그야말로 긴 연장전 승부에 마침표를 찍는 역전 만루 홈런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그물질에 오랜 실패가 만회되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비참한 내 인생,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외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열어주십니다.
‘철저한 실패로구나. 쫄딱 망했구나.’라며 좌절하고 울부짖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저 함께 현존하십니다. 딱 한 말씀으로 그간의 어려웠던 국면을 180도 전환시켜주십니다.
다 끝난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조금 기다려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거짓말처럼, 기적처럼, 주님께서 다가오실 것입니다.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희망해야겠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시몬의 배에 타시어 군중을 가르치시고 난 다음,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루카 5,4)
그러자 시몬이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루카 5,5)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굳이 다시 그물을 치는 일은 귀찮기도 한 일이었지만, 더 깊은 의미로, 그물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부로서의 자신의 앎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고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밤새도록 확인한 그곳에 다시 그물을 친다는 것은 이미 경험을 통하여 확인한 앎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프로였던 베드로는 그렇게 자신의 ‘앎’을 내려놓고 ‘말씀대로’을 따랐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1코린 3,18)
그렇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끌어올린 그물에서 많은 고기와 함께 자신의 앎에 대한 한계도 깨달았고, 무엇보다도 많은 죄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 ~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루카 5,8)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물을 치기 전에는 예수님을 어떤 한 분 ‘스승’(5,5)을 만났을 뿐이었지만, 그물을 치고 난 다음에는 오직 한 분 ‘주님’(5,8)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진정한 인격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변화’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앎’을 버릴 때 찾아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변화는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대상이 될 때에 오는가 봅니다.
곧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존재가 될 때 찾아드나 봅니다.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요, 회개 역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수락에 의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할 때 생겨나는 은총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지만 무능하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동의하지 않을 때에는 무능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의 ‘앎’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나의 배’가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주님의 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항해하는 주님의 배일 뿐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루카 5,5)
주님!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을 내려놓고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시고,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22주 목요일-진정한 자유인, 진정한 주인인 나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9월 53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0) | 2022.09.03 |
---|---|
2022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0) | 2022.09.02 |
2022년 8월 31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0) | 2022.08.31 |
2022년 8월 30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0) | 2022.08.30 |
2022년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0) | 2022.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