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 쓰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루가 5,33-39)
“No one tears a piece
from a new cloak to patch an old one.
Otherwise, he will tear the new
and the piece from it will not match the old cloak.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말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겠냐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사를 하는데, 누군가가 저만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빤히 보시는 것입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사 후, 곧바로 제의방 거울을 봤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더군요. 성당 입구에서 인사하는데, 저만 바라봤던 자매님이 제 앞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15년 전 갑곶성지에서 신부님을 처음 봤었는데, 어떻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으세요? 저는 이렇게 많이 늙었는데, 신부님은 하나도 늙지 않으셨어요.”
늙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 역시 늙고 있습니다. 주름의 깊이는 더 깊어졌고, 피부의 탄력도 없어졌으며, 검버섯도 보입니다. 젊어 보이는 부분은 제 또래보다 검은 머리가 더 많다는 것뿐입니다. 그밖에도 늙음의 징후는 많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매님은 저를 예전과 똑같다고 생각하실까요? 자기 자신과 저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은 많이 늙었는데, 저는 늙고 있지 않고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비교는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게 합니다. 비교하지 않는 곳에서만 제대로 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이렇게 물으면서 그들은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몰아붙였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신심 행위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열심을 남에게 보이기 위한 노력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하지 못한 사람을 신심 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 자기는 맞고 남은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신앙생활은 인간생활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영성적인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러 오셨지 빼앗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새 옷과 새 부대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새 세대에는 새 기분으로, 새 술은 새 부대에, 이 심정은 예수님께서 새 세대를 열면서 사람들에게 새 희망을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헌 옷에 새 천을 대고 기워보아도 옷은 더 찢어지기만 할 뿐, 헌 것(율법 시대)은 폐기할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로이 임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율법을 빌미로 각종 외부적인 형식으로 경직된 종교가 아니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풀어 나아가는 개방의 종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비교하는 마음으로 인해 새로운 나라를 보여주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특히 남과의 비교는 절대 금지입니다.
이렇게 하면 죽을 때까지 속 좁은 노인아란 소리 안 듣는다
-전 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wwSMv6hPcSE
“라떼는 말이야….” “요즘 애들 이해를 못 하겠어!” 등의 이런 말을 자주 한다면 그 사람은 속 좁은 노인일 확률이 다분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런 노인을 ‘꼰대’라는 용어로 비하합니다. 꼰대는 자신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만약 자녀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은 또 어린 꼰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자기 생각만이 다 맞는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그때그때 받아들여야 할 시대의 표징, 혹은 하느님의 뜻에 귀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꽉 막힌 어른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모가 되어보아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유튜브 채널 ‘달빛 부부’의 ‘12년 동안 가면을 쓰고 생활한 스티븐 연’의 내용입니다. 스티븐 연은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까지 오른 미국 영화계의 큰 인물이 된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하지만 그도 삶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너는 한국인답지 않다”라는 말을 듣고, 나가서는 미국인들에게 “너는 미국인답지 않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 동양인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 좋을 때여서 어쩔 수 없이 그는 밖에서는 미국인답게, 집에서는 한국인답게 생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워킹 데드’라고 하는 시리즈에 거의 주연급으로 많은 인기를 얻기까지는 동양인으로서 많은 차별을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나리’를 찍으면서 당시 이민 1세대의 고통을 그대로 연기에 녹아내며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되었습니다. 왜 그리 힘들게 일해야 했는지, 싸워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영화 시사회를 마치고 아버지는 스티브 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아들은 그동안 아버지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버지 품에 안겨 흐느꼈습니다. 아버지도 그러한 아들을 안고 울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꽉 막힌 근성을 나무라십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틀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맞추려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 5,33)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으면 부대가 터져서 헌 부대인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치 않는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8-39)
그렇다면 옛것은 다 나쁘다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것도 있고 변해야 할 것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변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은 변해야 하는지 아는 지혜입니다.
수십조 개에 이르는 인간의 세포는 7년이면 모두 새것으로 교체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이 변하면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죽어야 하는 세포가 죽지 않으면 암 덩이가 되어 인간이 죽습니다. 변할 것은 변해야 하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고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변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현재 지옥에 관하여, 혹은 십일조에 관하여 말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선악과는 꼭 바쳐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런 것들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변하고 있습니다. 성당에서 장궤틀도 사라지고 십자가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반면 너무 엄숙한 분위기의 미사는 변해야 합니다. 미사는 하느님을 만나는 혼인 잔치입니다. 그런데 너무 제사 분위기이고 형식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으로 돌아가는 느낌입니다. 형식은 철저히 지켜지지만 실상 미사 안에서 얻어야 하는 열매, 곧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믿음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가 죽어갑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임은 스티브 연처럼 그 역할을 수행해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입니다. 이 캐릭터를 소화하면 모든 인간을 이해해서 꼰대라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배역을 있는 그대로 연기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새로운 포도주이십니다. 그분은 유연성 없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 인류의 모델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삶이 그분 안에 스며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안은 성모 마리아께서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 아드님을 팔아넘긴 가리옷 유다도 이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안으신 십자가의 예수님 안에는 가리옷 유다의 수많은 죄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은 곧 모든 인류를 받아들임이고 이해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살게 됨으로써 우리는 내가 만날 모든 이들의 모습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누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루한 어른이 아닌 익어가는 어른이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ua44araXkmk
-조재형신부-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복귀하는 신부님을 위한 송별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자동차로 6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기쁜 마음으로 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교구 사제모임을 하면서 고맙기도 하지만 미안하기도 한 것이 있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제가 나이가 많은 선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침실을 가장 좋은 침실로 정해 줍니다. 식사 준비나 설거지를 하려 해도 후배 신부님들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배려 해주는 후배 신부님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예전에 선배들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선배는 말은 적게 하고, 지갑은 자주 열어야 한다.” 선배들의 말을 실천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미안함 마음은 늘 있습니다. 후배 신부님들과 대화하는 것도 즐거움이지만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아날로그 세대인 저는 디지털 세대인 후배들의 능력에 감탄 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마술사와 같이 손가락 움직임 몇 번으로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기도 하고, 만들어 내는 것을 봅니다. 5년간의 소임을 마치고 홀가분하게 돌아가는 신부님께 수고하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남아 있는 사제들도 소임을 잘 마치고 건강하게 돌아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은 매주 미사 후에 친교를 하고 있습니다. 친교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친교를 위한 비용입니다. 생일, 기일, 백일, 졸업, 연도와 같이 애경사가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친교의 비용을 내어 놓습니다. 늘 2달 정도는 친교 신청이 밀려 있습니다. 저도 곧 어머니의 기일이기에 친교를 신청했습니다. 음식 준비입니다. 국수, 비빔밥, 떡, 빵, 김밥과 같이 다양한 음식을 마련합니다. 본당 성모회의 임원들이 매주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상차림입니다. 친교실 창고에는 의자와 접이식 탁자가 있습니다. 일찍 오는 분들이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습니다. 저도 일찍 성당에 가면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곤 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저보다 일찍 오는 교우들이 먼저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곤 합니다. 의자와 탁자를 꺼내 놓은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성모회에서는 탁자에 식탁보를 깔고 그 위에 꽃병을 놓습니다. 그러면 친교실은 아름다운 연회장으로 모습이 바뀝니다. 각종 야채가 들어간 비빔밥, 시원한 오이냉국, 후식으로 빨간 수박이 준비된 나눔은 부러울 것 하나도 없는 친교의 시간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오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부대는 선배를 배려하는 후배들의 따뜻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새 부대는 매주 친교를 위해서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는 봉사들의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뜻한 마음과 아름다운 마음을 간직한 사람은 모두 새 부대를 준비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새 포도주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우리들의 ‘성실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새 포도주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새 포도주는 무엇인지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으냐?”
(루카 5,3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이는 ‘새로운 때’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신랑이 와 있는 때’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단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새 시대’가 온 까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루카 5,38)
‘새 부대’란 ‘변화된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착한 강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날드 롤하이저)를 들려드립니다.
큰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강에서 세 사람이 떠내려 왔는데,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한 사람은 심하게 부상을 입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아이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강에서 건져내어 죽은 사람은 정성껏 매장해 주고, 부상당한 사람은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어린 아이는 돌볼 가정에 의탁했습니다.
이 마을에 이런 사건들이 수 년 동안 지속되자 사람들은 떠내려 오는 사람들을 잘 건져낼 방법을 고안하고, 그들을 잘 돌볼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런 자선행위에 자부심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무도 강 상류에 올라가 거기에 무슨 일이 있는지, 왜 사람들이 이렇게 죽거나 다쳐서 떠내려 오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의 착한 마을 사람들처럼 되기를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이해대로라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불의한 사회적 환경에 대하여 교회가 갈등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저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떠내려오는 이들만 도우면 될 테니까요.
만약 교회가 이러한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하면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환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그러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의 사명은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식별하며, 이 땅에 정의와 평화, 사랑과 공동선, 인간과 생명이 존중되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는 미워할 수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있다.
세상이 하는 짓이 악해서 내가 그것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요한 7,7)
브라질의 헬더 카마라 대주교는 이런 체험을 전해줍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내가 왜 가난한 이들이 굶주리는가를 물으면 그들은 나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카마라 대주교의 이 말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왜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다치고 아픈지, 왜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가난한 이들이 많아지는지, 왜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착취되는지, 그 원인을 묻고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면 ‘빨갱이,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우리의 현실과 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와 사랑 앞에서 몸을 숨기는 것은 자살행위다.”(272항)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루카 5,38)
주님!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이 새 부대가 되어 당신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어 당신의 사랑을 건네주게 하소서
이 나라 이 땅이 신랑을 맞이한 혼인잔치가 되게 하소서!
오순도순 모여 사랑 가득 채운 술잔을 쳐들게 하소서!
사랑과 웃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로 번지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22주 금요일-나의 정체성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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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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