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야고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이다. 어부인 야고보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동생 요한과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세 제자 가운데 하나이다. 열두 사도에는 야고보가 둘 있는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작은[소] 야고보’와 구분하여 ‘큰[대] 야고보’라고도 부른다. 42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다.
☆☆☆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20,20-28)
whoever wishes to be great among you
shall be your servant;
whoever wishes to be first among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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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는데,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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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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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3살인 어린 딸이 어린이집에서 장래 희망에 대해 들었는지 엄마에게 “엄마! 엄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요?”라고 묻습니다. “글쎄, 난 엄마가 될 거야.”라고 대답하자, 아이는 곧바로 항의하듯, “엄마는 이미 엄마잖아요. 진짜 뭐가 되고 싶냐고요.”라고 다시 묻습니다.
“좋아! 그러면 선생님이 될 거야.”라고 말하자, 아이는 “이것도 안 돼요. 엄마는 벌써 선생님이잖아요.”라고 말합니다.
이 엄마는 비로소 자신이 현재만 바라보며 살고 있을 뿐 꿈이 없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엄마, 아내, 선생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익숙한 것이 편합니다. 그러나 익숙함이 지루함을 만들어 지금을 힘차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며 지금의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새로움 안에서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열쇠를 잃었다면서 가로등 아래에서 열쇠를 찾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열쇠 찾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열쇠 잃어버린 것 맞아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아니라면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가로등 밑이 밝아서 찾아보기가 제일 좋잖아요.”
편하고 쉬운 것,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만 찾는 이가 바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며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살로메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십자가 밑에 있던 부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만큼 예수님 곁에서 열성적으로 시중들었기에, 자기 아들들이 하늘 나라에서 예수님 곁에 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통치자들처럼 백성 위에 군림하고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는 모습만을 생각하며 하늘 나라에서 예수님 곁에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도 이런 모습을 떠올리고 있어서, 이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법칙과 전혀 다른 모습을 이야기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첫째가 되려는 이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높고 낮음을 따지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높고 낮음을 따지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고, 여기에서 세상의 모든 불의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신을 가장 낮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나라입니다. 교만과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결코 갈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를 지향하면서 과연 우리의 모습은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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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직, 섬김의 직분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LxccZl0HCVg
-조재형신부-
우리 속담에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제사 밥에만 관심이 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해서 정치를 하겠다고 하였지만 자신이 이익만을 챙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하지만 상대방의 조건만을 따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야단치셨습니다. 그들은 단식한다고 표는 내지만 단식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습니다. 기도한다고 말은 하지만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했습니다. 자신이 지고가야 할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 넘겼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사제와 레위는 염불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특권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당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이웃은 지금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도 염불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했을 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하느님의 일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사람의 일만 생각했습니다. 수고하지 않고 결실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두려워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야고보 사도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높은 자리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사 밥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려고 했습니다.
김칫국을 마시기 전에 떡줄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떡줄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기꺼이 가주는 것입니다. 왼 뺨을 때리면 오른 뺨까지 내주는 것입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기꺼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진복팔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가난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온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고통까지도 받아들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걸어간 길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가 걸어간 길입니다. 자신의 것을 나누어준 자캐오가 걸어간 길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어머니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높은 권력과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삶입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희생하며,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도 ‘서열’은 꽤 중요했던가 봅니다. 당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 하늘 같은 존재였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했습니다. 장남과 차남 사이의 격차 역시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어느 자리에 앉느냐 하는 문제는 그들에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런 가식적인 행동들이 참으로 한심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더욱 실망하신 것은 그토록 오랜 기간 계속 반복해서 특별교육까지 시킨 제자들마저도 아직 자리다툼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측근 제자들끼리, 그것도 길을 걸어가는 도중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싸웠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한때 야망과 출세욕으로 가득했던 야고보와 요한 사도,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의 미성숙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에브라임에서 예리코로 내려가고 있는 중에 갑자기 그들의 어머니가 나타났습니다. 두 아들을 옆에 세워둔 채 그녀는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일종의 인사청탁을 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인사청탁을 하러 온 어머니가 설마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한손에는 품질 좋은 토종꿀 한병을, 다른 손에는 잘 키운 씨암탉 한 마리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오셨을 것입니다. 사실 그녀가 보인 행동은 꽤나 민망한 모습이었지만, 용서해줄 만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이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로서, 예수님께 좋은 자리를 청탁하는 것은 야망이라기보다 강한 모성애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지닌 사람들은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건설하실 새로운 왕국에 대한 헛된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적 통치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고, 그 나라가 서게 되면 물 좋은 자리, 총리 자리와 당 대표 자리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도가 보여준 모습 중에 꽤나 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24시간 동고동락하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한가한 시간에 스승님께 면담을 신청하고 자신들의 속마음을 직접, 솔직히 표현하고 청했으면 차라리 나았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비겁하게도 어머니를 앞세워 간접적인 인사청탁을 시도한 것입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미성숙한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자괴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예수님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 사명의 핵심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오 복음 20장 26~28절) 우리 교회는 지상적인 영예와 세속적인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추구하는 자는 스승 그리스도를 망신시키고 악용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될 때, 주님께서 참으로 슬퍼하고 분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했습니다.
곧 높은 자리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와 아들들의 열망을 나무라시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청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곧 진정 청해야 할 바가 무엇이고, 진정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이며, 무엇을 먼저 행해야 하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 20,26-27)
이는 우리에게 높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이요, 으뜸인 사람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는 진정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고자 하면,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왕이 되고 싶다면 내 아내를 왕비로 대하고, 내가 왕비처럼 살고 싶다면 내 남편을 임금으로 받들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성인이 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여기고, 내가 예수님이 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예수님으로 바라볼 일입니다.
남을 무시하면 자신도 그렇게 무시당하게 되고, 남을 정당하게 대우하면 정당하게 대우받게 되고, 남을 존중하면 그만큼 존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곧 남을 불신하고 신뢰하지 못하면 자신도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고 불신 받을 것이요, 남에게 자비로우면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면, 필시 그도 나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뻔하고 당연한 이치를 알면서도 살지를 못합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를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으며,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가 버릴 그 제자들을 섬기셨기에 섬김 받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닙니다.
혹은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낮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곧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는 ‘들어 올림’이 없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높이는 데 그 본질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곧 하느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학원'(<규칙서> 머리말 45)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학교에서 ‘주님 섬기기’와 ‘형제 섬기기’를 배우는 학생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섬기면서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마태 20,23)
주님!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청하게 하시고,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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