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6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요아킴 성인과 안나 성녀는 다윗 가문의 유다 지파에서 태어났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 성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나, 요아킴 성인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뒤 하느님의 섭리로 마리아가 탄생하였다. 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6세기부터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어 10세기에는 서방 교회에도 널리 퍼졌다. 요아킴 성인에 대한 공경은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
(마태오 13,36-43)
"He who sows good seed is the Son of Man,
the field is the world,
the good seed the children of the Kingdom.
The weeds are the children of the Evil on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 그들과 맺으신 주님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시라고 탄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며,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애완동물의 수명도 참 많이 늘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키우던 애완동물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키우는 개만 해도 벌써 12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도 건강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전과 달리 몸에 좋지 않은 것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년 예방접종을 하고, 관절에 좋은 비싼 사료를 먹이고, 먹여서는 안 되는 것들은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예를 들어, 파, 양파, 초콜릿, 포도, 빵, 과자 등). 또 보살펴야 할 존재이기에 나름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아마 애완동물 키우는 분들이 모두 이렇지 않을까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자기 몸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몸에 해롭고, 정신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몸 역시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 역할은 바로 ‘나’입니다. 그 누구도 내 몸을 온전하게 보호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나만이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사랑을 쏟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설명해주십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 때에는 악한 자의 자녀들은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 나라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라는 마음으로 악한 자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답게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남들을 바라보면서 또 남들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삶을 통해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는 남에게도 제대로 사랑을 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좋은 씨라 불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자녀입니다. 가라지라고 불리는 악한 자의 자녀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들어갈 불구덩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며, 가장 좋은 선택을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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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밀인지 가라지인지는 '장기적'관점에서 판단해야!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Gx9Zs9z4uU0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2021)는 프랑스에서 있었던 유명한 두 친구의 결투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실화입니다. 두 친구, 카루즈와 자크는 전쟁에서 서로를 구해주는 절친한 친구사이였습니다. 카루즈는 성주이기는 했지만, 피에르라고 하는 영주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다혈질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진 거 없었던 자크는 영주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주는 카루즈의 아버지가 죽자 그 땅을 아들이 아닌 자크에게 주어버립니다. 자크도 친구에겐 미안했지만, 영주의 명이니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입니다. 카루즈는 화가 나 영주를 왕에게 고소합니다. 하지만 왕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장 카루즈는 자신처럼 가문의 회복을 노리는 집안의 딸과 혼인합니다. 카루즈는 마르게리트에게 땅을 회복시켜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를 이을 아들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카루즈의 어머니는 며느리를 못되게 대합니다.
마르게리트는 그래도 절친이었던 자크와 카루즈를 화해시켜 주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과정에서 자크와 마르게리트가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자크는 낭만주의자로서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마르게리트는 카루즈에게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카루즈는 돈을 벌어 땅을 회복해야 했기 때문에 전쟁에 자주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크와 마르게리트는 더 가까워졌습니다. 카루즈가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마르게리트는 남편에게 자신이 자크에게 겁탈당했다고 말합니다. 이에 화가 난 카루즈는 이 이야기를 귀족들을 통해 널리 퍼뜨립니다. 어차피 영주는 자크의 편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재판받으면 승산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카루즈는 왕에게 자크와 결투를 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왕은 그러라고 합니다. 결투 중에 자크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은 결코 무력으로 카루즈의 아내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카루즈는 인정하지 않고 그를 죽입니다.
몇 년 뒤 카루즈도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합니다. 마르게리트는 카루즈 영토의 상속인으로서 누구의 아들인지 모를 아들과 함께 30년 넘게 행복한 생활을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다 된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하기 위해 ‘장기적인 관점’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단기적으로 볼 때 카루즈와 자크는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좋았다가 싫었다가 화해했다가 다시 싸웁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 때 둘은 서로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가라지였다는 것입니다.
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단기적으로 선교도 할 수 있고 단기적으로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5년, 10년 전과 비교해 전체적으로 나아지지 않았다면 단기적 판단으로는 그 사람인지 밀인지 가라지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25살까지 저를 위해 사는 가라지였습니다. 하지만 하.사.시.를 읽고 신학교에 들어오고 나서는 이제 조금씩 더 이웃에게 피를 흘리는 삶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5년, 10년 전보다 지금이 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익어가면 밀일 확률이 매우 큽니다.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다윗은 처음에 하느님의 뜻에 잘 따르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까지 살해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나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탄 예언자의 말을 듣고 회개합니다. 그 이후로는 조금씩 더 온유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자기를 욕하는 사울의 친척도 용서하고 사울도 용서하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압살롬이 죽었다고 할 때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이제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이 아닌 나의 피를 내어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가라지가 밀이 되는 때는 세례를 통해서입니다. 세례는 결단입니다. 자아의 뜻을 따라주며 살 것인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인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면 밀이고 여전히 자신을 위해 살면 가라지입니다.
5년, 10년 전과 비교하여 나 자신보다 이웃 영혼의 구원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면 그렇게 발전하고 있다면 구원을 확신해도 좋습니다. 항상 장기적인 관점에서 1년, 5년, 10년, 20년 전과 나를 비교하고 그리스도를 닮아 이전보다 항상 더 이웃을 위해 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갑시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조부모와 노인을 위하여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PebeC5AXgCg
-조재형신부-
예전에 아메리카 원주민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단다. 하나는 옳은 일을 하고, 남을 돕는 파란 늑대란다. 다른 하나는 나쁜 일을 하고, 남을 해치는 검은 늑대란다.’ 손녀는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가 싸우면 어느 늑대가 이기나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우리의 마음은 일심동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2심동체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다른 내가 그것을 막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우리의 내면에는 거짓된 자아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참된 자아를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두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있어야 하지만, 우리의 나약한 마음은 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사탄의 깃발 아래 있을 때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원주민 할아버지의 ‘통찰’이 맞습니다. 우리가 먹이를 주는 우리의 마음이 선과 악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마음에 먹이를 주면 악한 마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은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의학의 특징은 발병된 부위를 수술이나 약물을 통해서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의학의 장점은 효과를 눈으로 확인하기 쉽고, 조기에 치료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서양의학의 단점은 발병부위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세포를 상하게 하기도 하고, 발병 원인을 파악하기 보다는 발병부위를 제거하기 때문에 다시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동양의학은 우리 몸은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부위에 질병이 발생하면 그곳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우리 몸 전체에 이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질병 부위를 없애거나 잘라내기 보다는 그와 같은 질병이 사라질 수 있도록 몸 전체를 다스리는 처방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몸의 체질을 연구하고, 각 장기의 기능을 연구하는 것이 동양의학의 치료 방법입니다. 당장 눈에 드러나는 증상을 치료하기 보다는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근본적인 치료를 하려고 합니다. 동양의학의 장점은 몸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상처부위를 제거하거나, 질병부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몸의 기능이 건강해지도록 해서 몸 자체가 이겨내도록 저항력을 키워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양의학의 단점도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고, 효과가 즉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시켜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 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전에 이런 실험이 있었습니다. 10명의사람 중에는 열심 한 사람, 대충 일하는 사람, 게으른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모두가 열심 할 것 같지만 열심 한 사람 중에서 또 게으른 사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을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게으른 사람들 또한 부지런한 사람이 되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공동체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 단체들이 있습니다. 각 단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지체들입니다. 어떤 단체는 열심히 봉사를 합니다. 어떤 단체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지내야 합니다. 잘못이 있는 사람, 단체를 배제하고, 공동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주변에 부족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하는 사람들도 보일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이라는 빛나는 열매를 맺게 한 명품 나무였습니다!
-양승국신부-
시들시들 말라비틀어진 나무에서 결코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튼실하고 색상도 좋으며 꽉 찬 열매는 반드시 좋은 나무에서 거둘 수 있습니다.
성모님이라는 역사상 길이 남을 멋진 열매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모님에게도 부모님이 계셨는데, 그 요아킴과 안나입니다. 두 분은 성모님이라는 빛나는 열매를 맺게 한 명품 나무였습니다.
교회는 초 세기부터 이 두 성인을 공경해왔습니다. 성경에는 요아킴과 안나에 대한 언급이 일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전승을 통해서 두 분의 생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요아킴은 나자렛 출신으로 존경받는 부자였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의 신심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두 분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연세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요아킴은 자녀를 청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고, 40일간 단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안나 역시 집에 남아서 탄식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분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들어주셨습니다.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안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안나와 비슷한 환시를 받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요아킴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나는 성문 앞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두 분은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출산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보니, 결과는?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실망했지만,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데려가서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전승에 따른 성모님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와 관련된 행적입니다. 신심 깊은 요아킴과 안나는 지극정성으로 마리아를 양육했고 교육시키셨을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는 또 다른 명품 나무가 되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품 열매를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이영근신부-
우리는 때로는 이 세상에 판치고 있는 폭력과 불의와 죄악을 보면서 곧잘 흥분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보고만 계시는 하느님이 실망스럽고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또 교회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조리와 모순을 보면서 경악하고 환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악한 생각들을 보면서 심히 좌절하기도 합니다.
사실 공동체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당혹스럽고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마태 13,36)라고 청합니다.
왜냐하면 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을 발견한 종들이 집주인에게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묻자, 주인이는 말했습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 13,29-30)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끝날'(마태 13,40)이 되면 밀과 가라지의 분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가라지와 밀을 거두어드릴 ‘때’가 따로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거두어드리는 일을 맡은 ‘일꾼’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밀과 가라지에 대한 주권이 바로 당신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세상의 끝날'이 될 때까지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었다는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 속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앞의 파견 설교에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고 하시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악이 세상 안에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 악에 젖어 들거나 협조하거나 방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악을 피하고 선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악을 뿌리 뽑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악이 번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오히려 악으로부터 선을 보호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악이 더 이상 활개 치지 못하도록 싸워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오늘의 말 · 샘 기도>
“밭의 가라지”
(마태 13,36)
주님!
이 세상에 폭력과 불의와 죄악이 판을 쳐도,
내 안에 미움과 무관심과 온갖 나쁜 생각들이 꿈틀거려도,
비록 가라지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빛을 가리지 못하고 당신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게 하소서.
오늘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꺼지지 않는 빛을 밝혀 사랑의 밀밭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인생의 끝에 서면」
-반영억신부-
인생의 끝에 서면 하루라도 더 세상에 머물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의를 찾고 장수를 위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바오로 사도는 선언합니다.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하게 될 것입니다”(갈라6,8-9).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데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이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쉽게 알아들은 만큼 삶의 모습도 맑고 밝아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마지막 날에 좋은 씨앗인 하늘나라의 자녀 가운데에서도 내적으로는 악한 자의 자녀로 밝혀질까 두렵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라지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가라지를 보고서 흔들려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 담을 쌓고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영혼이 피폐해집니다. 그러니 결코 악에 굴복당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들은 이 세상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지는 것보다 죽음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야말로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먼 훗날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알곡을 만드는 것은 오늘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이건숙씨의 “꼴찌의 간증”에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수비결
“인생은 육십에 시작하는 것이니
칠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잠깐 밖에 나갔다고 전해다오.
팔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아직 이르다고 말해다오.
구십에 와서 가자고 하면
뭘 그리 서두르냐고 달래다오.
백살에 와서 가자고 하면
이제 서서히 좋은 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다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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