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4일 연중 제17주일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루카 11,1-13)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Give us each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sins
for we ourselves forgive everyone in debt to us,
and do not subject us to the final te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만 찾을 수 있어도 그곳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빚 문서를 지워 버리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청하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끝임없이 믿고 기도하는 삶
-키엣 대주교-
살기 위해서는 숨을 쉬어야하듯이 기도는 영혼을 위한 숨입니다. 기도라는 숨을 통해 나와 주님 사이에 친밀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마음이 편치 않아서, 지치고 힘들어서, 뭐라고 기도해야 할 지 몰라서,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어서라며 기도를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내가 뭔가를 해야 할 세계는 뚜렷이 보이지만 영혼의 세계는 조금만 소홀해도 잊혀지고 살아가는 데 당분간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이기에 기도의 삶은 점점 더 흐려집니다.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를 통해 어떤 기도의 삶을 살아야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인내와 겸손,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한 마음 이것이 기도하는 마음의 기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기 위해 불로 다스리기 전에 의인들을 도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감히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서른 명을, 스무 명을,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그의 간청은 참으로 진지하고, 진실하며, 겸손하였습니다. “비록 제가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결국 안타깝게도 10명도 찾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마다 쏘다니며 살펴보고 알아보아라. 한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는지 광장마다 찾아보아라. 올바르게 행동하고 진실을 찾는 이가 있어 내가 그곳을 용서할 수 있는지 알아보아라.” (예레 5,1)
나의 기도는 나와 가족, 그리고 우리 사회, 더 나아가서는 잘못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주님은 믿음과 신뢰로 진실되이 인내하며 드리는 기도에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Abba, 아버지!
많은 아버지들이 첫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 온 몸에 전율이 흐르고 무한한 행복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신비롭고 친밀한 관계입니다.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은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삶의 토대인 아버지, 모든 시작의 원천이며, 안식처이자 원동력, 이상으로의 초대입니다. 영적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기도 안에서 가까워집니다. 기도는 말하고 듣는 것입니다. 주님께 다가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에 따라 생활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사랑과 신비와 친밀함이 담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다른 종교와 신의 모습과 전혀 다른,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아들과 아버지가 깊은 친밀함 속에 맺어지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Abba’라는 말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뜻은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가득한 자녀가 모든 일을 아버지께 의탁하고 언제나 편안하게 부를 수 있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삶을 위한 기도
기도는 기도뿐만 아니라 예배, 감사, 찬양입니다. 오직 사람만이 기도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죽을 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영혼은 자신을 되돌아볼 수 없기에 얼마나 위험하게 달려가고 있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이신 주님의 아들처럼 거룩하게 살 수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만이 영혼은 생명과 사랑, 지혜, 힘으로 가득 찬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도는 숨을 쉬는 것과 같습니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입니다. 기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형제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어린 자식이 아버지께 드리는 말이라면, 또 전 세계 형제들과 나누는 사랑의 유대감의 표현이라면, 그 말은 아름다운 기도가 되어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더욱 행복하실 것입니다.
주님, 우리의 매일이 아버지와 하나되는 사랑과 희망 안에서 성장하고 살아가야함을 일깨워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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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스런 자녀의 마음으로 아버지이신 주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까?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항상 좋은 것만 주시지는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실패와 고난 앞에서 아버지 주님께 어떠한 마음을 갖게되는 지 되돌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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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도는 나와 가족, 그리고 우리 사회, 더 나아가서는 잘못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나보다 더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함께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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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떻게 지내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농담조로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먹고 자고 화장실 가는 것이 최고로 잘 사는 것 같습니다.
몇 달 전에 장염으로 고생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선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불어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밤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를 못하니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5kg 이상이 빠졌습니다.
기본이 제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본보다 특별한 것만을 청하고 있습니다. 기본은 당연히 주시는 것이고, 사랑한다면 특별한 것을 주셔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순간인데도 이 기본에 감사함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에도 우리는 특별함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먼저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사랑의 길을 따르는 그 기본에 충실할 때, 주님 뜻과 함께 하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이 되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기도의 형식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도 항구하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한밤중에 잠자는 친구 집에 빵을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십니다. 이것이 기본이라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흔히 밤에 여행합니다. 도보로 여행하는데, 더운 낮에는 뜨거운 태양에 도저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행하는 친구가 찾아든 시각은 늦은 밤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보통 해 뜨기 전에 그날 먹을 빵을 굽기에 한밤중에는 빵이 떨어지기 일쑤였지요. 그래서 친구 집을 찾아갔습니다.
아마 문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손바닥으로 문을 두드리거나, 돌멩이를 집어서 문을 두드리면서 큰소리로 집주인을 불렀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깨기에 충분합니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정과 귀찮음의 갈등이 보입니다. 웬만한 우정이 아니면 귀찮음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집요하게 졸라대는 귀찮음에 화를 내지 않고 우정을 발동하여 필요한 것을 줍니다.
이처럼 끝까지 청하고, 끝까지 찾고, 끝까지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기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청하기 전에 미리 주시는 사랑이지만, 우리의 간절함이 더 빨리 하느님의 사랑을 이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어떠한 것일까요?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행하고 있었을까요? 간절한 기도를 통한 기본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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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과 선물 구분법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lepq1PhCBy4 ;
영화 ‘선생 김봉두’(2003)의 내용입니다. 김봉두 선생은 촌지를 밝히는 못된 선생님입니다. 아이들을 차별합니다. 그러다 봉변을 당합니다. 이런 사실이 공공연하게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방탕한 생활과 아버지의 병원비 때문에 학교를 그만둘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그는 사정을 하여 아무도 가기 꺼리는 폐교 직전의 강원도 산골 학교에서 몇 년동안 지내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는 도시에서 촌지를 받던 것과는 사뭇 다른 시골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다섯 아이의 부모가 차려주는 술자리도 고급 주점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담배 살 곳도 없습니다. 그러다 어떤 할아버지에게 담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지만 양담배만 찾다가 물벼락을 맞습니다.
다섯 아이 중 양소석이란 아이는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도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밥도 제대로 못 먹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이 먹던 라면을 그 아이에게 나누어줍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아이들에게 급식을 주게 됩니다. 이에 아이들은 자습만 시키는 선생님에게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김봉두 선생은 이것을 놓치지 않고 아이들에게 봉투 하나씩을 주며 편지와 감사의 마음을 채워오라고 합니다. 부모님과 꼭 상의해서! 그런데 받은 봉투 안에 든 것은 아이들의 진심 어린 마음과 더덕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더는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김 선생은 산골에서 탈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아이들의 장점들을 하나하나 발견하여 아이들을 다 도시로 전학시키면 학교가 폐교될 것이고 그러면 자신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찾아 발전시켜 주는 선생님에게 감동합니다. 부모들도 감사해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식을 듣고 도시에서 부잣집 아이가 이사를 옵니다. 그 부모는 선생님에게 촌지를 줍니다. 그러나 김선생은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에 물들어버렸는지 그 촌지가 썩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 않자 김봉두 선생은 자신을 짜증 나게 하는 아이들의 손바닥을 때립니다. 서울에서 이사 온 아이가 시골 아이들을 깔보며 그들 탓을 하자 싸움이 붙습니다. 서울 아이의 엄마는 이게 알아서 해 주는 것이냐며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을 탓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유 없이 선생님에게 맞았음에도 선생님 편을 들어줍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봉투에 써 왔던 편지를 다시 꺼내 읽어봅니다. 순수하게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각성합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에게 물들어갑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것들을 선생님에게 가져다 바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소석이는 자신이 일해서 번 3만 원을 선생님 집 문에 꽂아둡니다.
김봉두 선생은 소석이를 찾아가서 종아리를 때립니다. 그리고 안아줍니다. 자신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이 타락해가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 후 폐교 결정이 내려집니다. 눈물의 졸업식을 하고 마을 사람들은 돈을 모아 진정으로 감사의 표현을 합니다. 안 받으려고 했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병환에 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도시에서 촌지를 주었던 부모나 학생들은 선생님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지만, 강원도 시골에서 있던 아이들과 그 부모님들만이 선생님에게 조문을 옵니다. 김봉두 선생은 아버지의 영정사진 앞에서 아이들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선물입니다. 우리가 받는 선물에는 선물을 주는 이의 예언이 들어있습니다. “당신은 누구다”라는 말이 쓰여있는 것입니다. 촌지를 주는 사람들은 “당신은 쓰레기야. 돈을 줘야 내 자녀 잘 봐줄 거 아냐?”라는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선물을 받으면 정말 쓰레기가 됩니다. 이런 선물을 ‘뇌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뇌물을 줄 수도 있고 뇌물을 청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김봉두 선생처럼 타락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나를 인정해주기 위해 주는 선물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고 그저 고마워서 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이 선물은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란 믿음이 들어있고 이것을 받으면 존귀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런 존재로 믿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선물이 있는데 이것이 ‘성령’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부분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심이고, 둘째 부분은 벗이 왔다고 빵 세 덩이를 잠자는 친구에게 귀찮게 청하는 내용이며, 세 번째 부분은 성령을 청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세 부분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인정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인정받았습니다. 에덴동산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오히려 덜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교만해졌고, 더 육욕에 빠졌으며, 더 소유하려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그 은총을 거저 주지 않으시고 청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밥을 안 주면 주인을 무는 개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물리는 것이 두려워서 개에게 음식을 준다면 이는 그 개를 겸손하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더 소유욕-식욕-지배욕에 빠지게 만듭니다. 따라서 주인에게 간절히 청하기 전까지는 주인이 주면 안 됩니다. 갑과 을이 바뀌면 개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로 성령의 선물을 청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으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그러하셨듯이 청빈-정결-순명의 세 빵을 갖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이 세 개의 빵을 갖지 못하면 친구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실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꾸준히 하느님 아버지께 성령을 청해 복음삼덕을 키워야 합니다.
기도는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성령으로 삼구가 죽고 복음삼덕이 피어난 에덴동산과 같은 마음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그러려면 내 동산을 망치는 세속-육신-마귀를 죽여야 하는 데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의 기도를 끈질기게 바치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SfVHvd33YmU
-조재형신부-
창세기에 ‘노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타락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던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방주를 만들고 있던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때가 되어 비가 40일 동안 내리고 물의 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와 가족들은 방주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다면 물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몇 번을 청하였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50명만 있다면, 45명만 있다면, 30명만 있다면, 20명만 있다면, 10명만 있다면 심판을 하지 않도록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0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로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노아가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듯이, 소돔과 고모라에 단 한명의 의로운 사람만 있었어도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입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10만 명의 군사를 길러야 한다고 했지만 외면했습니다. 일본이 곧 침략할 것 같다는 의견은 묵살되었습니다. 절체절명이 위기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배가 12척 있습니다.’라는 글을 왕에게 올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죽고자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각오로 우리의 바다를 지켰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노아의 방주를 만들었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외부의 침략이 있을지라도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1997년 ‘IMF’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국가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문들 닫아야 했고, 실직자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때 우리는 ‘금모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2007년 태안에 기름유출 사고가 났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원봉사로 기름을 닦아 냈습니다. 20년이 넘어도 오염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2년 만에 청정한 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위기는 파도처럼 늘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본당이나, 시설에서 사목을 하는 신부님들이 사목적인 비전을 제시하면 좋겠습니다. 사목의 결실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통합되는 시스템이 구축되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이야기하듯이, 무한 경쟁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윤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열정, 신념, 헌신으로 당면한 교회의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야기한대로, 열정적인 사목자가 50명만 있어도, 45명만 있어도, 20명만 있어도, 10명만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교회에 더 많은 축복을 내려 주실 것 같습니다. 참된 신앙인이 50명만 있어도, 45명만 있어도, 20명만 있어도, 10명만 있어도 세상은 좀 더 환하고, 밝아지리라 생각합니다. 냉담하는 신자들은 다시금 주님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활력이 넘쳐나고, 젊은이들은 다시금 교회의 그늘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름이 지나면 입시철이 다가옵니다. 그러면 전국의 사찰과, 교회, 성당에는 많은 분들이 치성과 정성과 기도를 드립니다.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자신들이 믿는 절대자에게 매달리고 청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가 다르다고 입시철이 끝나면 그 많은 사람들이 볼일 다본 것처럼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사찰과 교회 그리고 성당은 피서 끝난 바닷가처럼 썰렁함을 봅니다. 매달림과 청원의 기도가 있다면, 감사와 찬미의 기도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를 봅니다.
무엇이 참다운 기도의 태도인가! 저는 아브라함 링컨의 다음 말이 참다운 기도의 태도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하느님의 편에 서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두 팀 모두 성호경을 그으며 게임에 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다운 기도는 하느님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리라, 내가 하느님 편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때로 외롭고 힘든 골고타 언덕길이라도 주님 가신 그 길을 기쁨으로 따라나서는 것이 참다운 기도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기 위해 하느님과 벌이는 공방전을 감동적이고 신뢰에 찬 극적 장면을 통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탄원과 중재 기도를 통해 선한 사람의 성성(聖性, santita)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말해줍니다.
여기서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되지만, 예언자 예레미아는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한 사람으로 족하리라고 말하며(예레 5,1), 에제키엘도 예루살렘이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죄 없는 사람 한 명을 요구합니다(에제 22,33).
그리고 이사야는 ‘야훼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죄를 짊어지고 가는 죄 없는 사람을 노래합니다.
그 한 사람의 역할은 기다리고 있던 유일한 중재자 예수님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얻어지는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기도의 원형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흔히 ‘주님의 기도’로 불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준 기도’를 전해줍니다.
기도를 가르쳐주시기 전에, 먼저 이 기도의 두 가지 배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루카 11,1)
첫째 배경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제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분의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서 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실 마태오복음의 병렬 복음에 따르면,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주로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 서서 위선자들처럼 드러내 기도하기를 좋아했고, 또 빈 말로 많은 말로 되풀이하며 이방인들처럼 기도했던 것입니다(마태 6,5-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와는 반대로, 골방에 들어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시고, 또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는 아버지시기에 빈 말이나 길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의 관습적이고 의례적인 기도와는 그 모습이 달라도 너무도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의 하나가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묻게 됩니다.
또 하나의 배경은 당시 로마의 억압과 과도한 새금 징수와 종교인들의 부패 속에서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메시아 대망 사상을 담은 부흥 운동 그룹들이 나타나 그들의 열망을 담은 기도문들을 가르쳤고, 세례자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주님의 기도’는 탄생되었습니다.
곧 새 공동체의 원리와 삶과 질서를 담은 새 기도문이 요청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공동체로를 향한 강령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마태오복음에서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윤리와 삶을 이야기 하고 있는 '산상설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기도는 “저희에게 가르쳐주십시오.”라는 청에 대해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라 하고 모범으로 제시된 기도이며, 동시에 개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에 주어진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시작부터가 충격입니다.
하느님을 단지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압바(αββα)'라는 친밀함으로 부르시며,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곧 인간인 저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원과 지위로 들어 올리십니다.
저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시어, 당신과 함께 아들인 성자의 반열에 들게 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시고, 우리를 당신과 하나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이 기도의 열쇠말은 '아빠' 입니다.
결국 이 기도는 '아빠', 아버지이신 그분의 현존 앞에서 벌어지는 기도입니다.
곧 그분을 대면하는 면전에서 벌어지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충격은 그냥 '압바'인 것이 아니라, '우리 압바'인 것입니다.
곧 복수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한 형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우리’에는 시제가 없으니, 이는 과거의 선조들과 예언자들을 포함하여 미래의 하느님의 자녀들까지를 포함하여 '우리'라는 형제 가족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로서의 삶의 원리가 기도로 주어집니다.
곧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이들에게 걸 맞는 자녀로서의 삶이 소명으로 주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다름 아닌 ‘자녀의 길’을 걸어갑니다.
오로지 아빠 아버지께 속해 있는 아들, 딸로서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을 두 가지 비유, 곧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를 통해서는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를 들려주십니다.
두 번째 비유를 통해서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가를 들려주십니다.
그러니, 그토록 넉넉히 들어주시는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루카 11,10)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 '성령'(루카 11,13)을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영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루카 11,2)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성자의 반열로 들어 올리시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들어 올리셨습니다.
이제는 제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제가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를 이루소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생명의 빵이신 아드님을 양식으로 삼아 당신 안에서 영원히 살고,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소서.
다름 아닌 용서를 통하여 그러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 되게 하시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넓고 깊고 높은 사랑입니다. 때로는 품으시고 때로는 침묵하시며 기다리시고 마침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이시간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도 양보하는 힘, 견줄 바 없는 특권, 하늘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이며 세상의 기둥이고, 지혜의 창고이며 영혼의 힘입니다. 낙심의 치료제이며 슬퍼하는 사람들의 위로이며 의로운 사람들의 승리입니다. 하늘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매 순간 기도하며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길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제자는 지금까지 기도를 안 하고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회당의 집회와 가정의 부모로부터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유다의 아이들치고 그런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당시의 율법교사들은 기도에 대하여 매우 자상한 규칙과 절차를 만들어서 어린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기도하는 생활에 젖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새삼스레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을까요?
자기들이 하는 방법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방법이 분명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기도가 아니라 삶으로, 전인격적으로 아버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작업이 기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 수없이 외우는 것으로 족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형식적으로 주기도문을 외운다면 기도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카11,2)하고 기도하는 방법을 모범으로 보여 주신 것이지 그 기도문을 외우고 있으라고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뼈대가 되시고 거기에다 살을 붙이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행동은 주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청해야 하고 죄를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 고 청하되 거기에 걸 맞는 삶의 태도는 우리의 몫이란 말입니다. 사실 “기도의 목적은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데,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기도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길 때 기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잘 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웁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피아노를 자꾸 쳐야 합니다.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도 한밤중에 기도하시고 때로는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 그리고 음식을 잡수실 겨를도 없이 활동하시면서도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건방진 삶을 사는 것인지요?
우리는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로 정의합니다. 대화는 일방적이 통보가 아니라 주고받는 것입니다. 서로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한다는 것이 기도문을 외우는데 급급해 하고 자기의 바람을 청하는데 그치고 맙니다. 주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욕심이 앞서고 떼를 쓰며, 침묵하시는 주님께 투덜대기 일쑤입니다. 때로는 거지처럼 달라고만 하고, 때로는 흥정하고 심지어 협박하기도 합니다. 대화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의 소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만남과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이요 만남입니다.
주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청하지도 않고 받길 원하고, 찾지도 않고 얻길 기대하며 두드리지도 않으면서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혹 청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면 야고보서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1-4). 사실 이럴 때는 구한대로 응답되지 않는 것이 더 고마운 응답입니다.
기도할 때는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 주겠다”(요한14,12).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이미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1요한5,14)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느끼지 못해도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고 인내하면서 갈구해야합니다. 벗을 찾아가 귀찮게 해서라도 빵을 얻어내듯 우리도 참고 기다리며 매달려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되는 상황 안에서 아브라함이 간절한 청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냅니다. 이렇게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줄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도 우리에게는 한없이 약하십니다.
어떤 아가씨가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 제발 신랑감을 보내주세요! 제가 혼기가 꽉 찼습니다. 제발!” 그러나 도대체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찾아가 하느님께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다고 사정을 얘기하였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말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는 응답이 잘 안 되는 거야!” 그래서 그 아가씨는 기도의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하느님, 우리 엄마가 딸을 시집을 보내야 된다고 안달을 하십니다. 제발 사윗감을 보내주세요!” 과연 우리는 어떤 유형으로 기도하는지 점검해 봐야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영혼의 숨결, 호흡’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항구하게 인내를 가지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혹시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숨은 한꺼번에 쉬고 안 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꾸준히 고르게 쉬어야 합니다. 기도는 일정하게 해야 합니다. 하루의 좋은 시간을 하느님을 위한 시간으로 내 놓으시기 바랍니다. 자투리 시간을 내놓지 말고, 시간 뿐 아니라 공간도 내 놓으십시오. 나를 위한 공간 꾸미기에 급급해 하지 말고 기도할 장소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는 이 앞에서 결코 등을 돌리시지 않습니다. 빈손으로 돌려 보내지 않으시고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청하십시오. 옛 말에도 “울어야 젖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를 보아가며 다리를 뻗어라” 라는 말도 있습니다. 형편과 결과를 생각하며 일을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보시기에 청하는 대로 주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급해 하며 답답해하여도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못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릅니다.’(로마8,26) 그래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영적으로 채워주시기 위해서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리고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믿으십시오.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다만 잠시 늦춰질 뿐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기도를 ‘심장과 심장의 만남’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저에게 이야기 하고 저는 그분께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심장의 고요함 안에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귀 기울여 듣습니다. 그다음에 우리 심장이 충만해진 채 우리가 말하고 그분은 귀 기울여 듣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없다면 달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가 없다면 영혼은 죽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순결한 심장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장을 정화합니다. 그리고 순결한 심장만이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하게 됩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제 뜻을 접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폰스).
우리가 많은 경우 우리의 바람을 청하고 있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의 원의를 먼저 알고 계십니다. 묵시록을 보면 주님께서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야 그분의 마음에 드는 기도를 할 수 있고 또 우리의 청원에 대한 응답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모든 기도는 주 하느님께서 듣고 계시고 우리의 기도가 미약하다고 생각될 때에도 여전히 듣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민수14,28). 그러므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우리가 미처 구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의 종들이 내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부터 자유롭게 하소서.
주님의 귀한 선물로 만족하게 하소서.
먼저 주님의 나라를 구할 때,
주님께서 모든 좋은 것으로 더하시리라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총알택시기사와 신부님이 같은 시간에 죽게 되어 하느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택시기사는 천국으로 가고 신부님은 연옥에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이 “아니! 하느님의 일을 해도 내가 더 많이 하였는데 너무하네요!”하고 투덜댔습니다. 그러자 그 옆의 천사가 말하였습니다. “저 총알택시 기사는 손님들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하게 만들었고, 당신의 강론을 듣는 신자들은 다 졸고 있었는데 누가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아야 하겠느냐?”
“인생이 짧든, 길든 무엇인가에 성공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기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알베리오네 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 9)
-한상우신부-
주님 앞에
내놓기
한참 부끄러운
우리들
기도의 삶이다.
기도는
거짓없이
노력하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들 삶을
지켜주는
기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가장 좋은
하느님 사랑을
만난다.
만남은
닮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는
기도는 삶의
가장 아름다운
의미가 된다.
우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자신을
바라보고 만나는
살아있는
기도이다.
기도는 삶의
중심이다.
기도는
믿는 것을
실천하고
바라는 것을
먼저 베푸는
삶의 겸손이다.
기도는
마음의 성화이며
생활의 승화이다.
주님께서는
삶과 함께
기도를 주셨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도
노력하시듯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우리또한
기도로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사람과 기도는
하나이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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