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오 13,24-30)
‘No, if you pull up the weeds
you might uproot the wheat along with them.
Let them grow together until harve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유다의 주민들이 그들의 행실을 고치면 주님의 집에 살게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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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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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왜 저런 거야?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할 텐데….”
이런 식으로 남들에 대해 못마땅함을 표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소위 ‘자뻑’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믿거나 자신에게 반하여 푹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을 잘 보면 오히려 단점이 더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너는 뭐 잘하니?’
솔직히 ‘자뻑’ 보다는 ‘자학’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자존감 떨어지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자학하는 사람이 더 변화의 가능성에 가까이에 있는 사람입니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좌절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는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더 이상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게 하는 ‘자뻑’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며 자기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계속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자학’이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가라지는 성경 원문에서 ‘지자니아’라고 하는 해로운 식물로 밀과 아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밀과 가라지는 모두 커서 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그 누구도 식별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따라서 종들이 가라지를 발견한다는 것은 가라지가 꽤 자랐을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양도 종들이 놀랄 만큼 많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원수가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저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주인에게는 밀 이삭 하나가 아깝고 귀중하기에, 추수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밀과 가라지를 가려내라고 하십니다.
우리 교회 안에 선한 사람만이 있을까요? 주님께서도 우리 공동체 안에 선한 사람만이 아닌, 악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을 뽑아내려다가 선한 사람까지 뽑혀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이 부분은 마지막 날의 하느님 심판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느님 심판 전에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두고서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의 행동에 대해 끈기 있게 기다리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대신 진정으로 회개하면서 자기 자신을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선한 사람이 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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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과 가라지. 리더십의 지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azqb9-5og6s
-조재형신부-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은 자라면 열매를 맺고 양식이 되기 때문에 잘 길러야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자라도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에 뽑아야 합니다. 밀에게도,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런 가라지를 뽑는 것이 좋은지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 때까지는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의 뿌리가 밀의 뿌리와 붙어 있다면 그것을 나누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밀의 열매이기 때문에 추수 때가 되면 밀의 열매는 거두고, 가라지는 버리면 된다고 하십니다. 류시화 작가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신이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라는 책도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나쁜 것 같지만 나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과정인 경우가 있습니다. 잔잔한 파도는 유능한 항해사를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험한 파도를 겪어야만 유능한 항해사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비록 초라하고 남루할지라도 나중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맡기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사회에 ‘왕따’라는 문화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지매’라고 부릅니다. 약하고, 부족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대항 할 힘이 없고, 도와 줄 친구가 없는 사람을 집단으로 괴롭히는 것입니다. 왕따를 경험한 사람은 심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인터넷 검색의 시대에는 ‘악플’로 괴롭히기도 합니다. 좋은지 나쁜지 미리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억지로 마침표를 찍기 때문입니다. 왕따와 이지매가 이념이 되고, 신념이 되면 엄청난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나치의 독일은 유대인, 집시, 사회 부적응 자들을 포로수용소에 가두었고,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이는 인류와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범죄입니다. 교회도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시작했었고, 많은 무고한 이방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범한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주도하는 미국사회에도 여전히 인종차별로 인한 폭력이 있습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런 이유 없이 폭행하기도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라지들은 뽑아서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밀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가끔, 제 몸을 볼 때가 있습니다. 지우고 싶은 흉터도 있습니다. 줄이고 싶은 뱃살도 있습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빼고 싶은 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모두 내 몸의 일부이고, 제 삶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저와 함께 계속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삭제하고 싶은 기억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역사의 기억을 삭제하고 싶으신지요?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시간, 이념과 사상의 갈등으로 벌어진 폭력과 전쟁의 시간, 부끄러운 시간, 치욕의 시간, 분노와 미움의 시간들은 지워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슬프면 슬픈 대로,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잘한 것은 잘한 대로, 잘못한 것은 잘못한 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죄의 역사의 또 다른 모습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제자들의 배반, 박해와 순교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서 잘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고통과 박해의 시간들을 통해서,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통해서도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임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시켜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 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시편의 기도를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으니. 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인간의 호흡은 짧지만 하느님의 호흡은 깁니다!
-양승국신부-
청소년 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을 때 자주 느끼는 바입니다. 한 아이의 인생을 동반해주는 데 있어 ‘기다림’ ‘인내’처럼 중요한 것은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때의 실수를 기다려준 것이 나중에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낳게 하는지 모릅니다. 부족함과 미숙함 앞에 인내하고 또 인내한 결과가 ‘큰 인물’이라는 결실을 낳습니다.
정말이지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태 모범생들이 있습니다. 잔소리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자기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에 대고 외쳐도 듣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한동안 오류에 빠져 속고 나서 나중에 진리의 진가를 깨닫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면 뒤에 숨어있는 악 실체를 확인한 뒤에야 참 아름다움을 깨닫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지어서는 안 될 죄를 짓고, 죄의 악함을 깨달은 뒤에야 하느님의 은총을 겸허하게 수용합니다. 이런 연유로 어떤 죄에 대해 ‘복된 죄(Felix culpa)라고 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때로 아닌 것에 대해서 애초부터 원천을 근절시키기 위한 노력도 중요합니다. 잘 짜인 모범 정답 틀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불어 필요한 노력이 있습니다.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우리 각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당신 의도대로 우리 인간 역사를 하나하나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무조건 그 길을 걷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의 판단, 가치관, 인생관, 결정을 존중해주십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깨닫도록 우리에게 모두 맡겨주십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모든 죄나 실수 앞에서 한없이 기다려주십니다. 참 가치를 깨달을 때 까지, 당신께로 돌아설 때 까지 무조건 인내하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들은 이런 기대를 합니다. 정의의 하느님께서 세상 안에 존재하는 악의 원천들, 그릇된 지도자들을 지체없이 공격하여 하루빨리 진리와 정의가 승리하는 날을 오게 하라는 기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보다 깊게 호흡하시며 보다 큰 걸음을 옮기시는 분입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신자들의 바람도 너무 기대치가 높습니다. 천사 같은 교황님의 얼굴만을 추구합니다. 착한 목자의 화신과도 같은 주교님을 찾습니다. 제2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사제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다. 교황님도 주교님도 사제들도 육을 지닌 한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정신으로는 분명히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지만, 구체적인 삶 안에서는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노력이 기다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방관이 절대로 아닙니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 포기해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무관심의 표현도 아닙니다.
기다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표현입니다. 기다림은 가장 그리스도적인 삶의 방법입니다.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언젠가 분명히 우리에게 주실 구원을 기다리며 오늘 우리의 이 고통, 이 부족함, 때로는 참혹함을 견뎌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놔둔다. 마지막에 가서 가라지만 따로 묶어 불태워버리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먼저 든 생각은 섬뜩함이었습니다. 초반에는 그냥 좀 봐주겠지만 막판에 가서 제대로 손 한번 보시겠다는 말씀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때 마다 순간순간 분노하시고 강력한 처벌을 가하시는 하느님이라면 우리 가운데 과연 남아있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인내하시는 하느님,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느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회개를 바라시는 하느님, 단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고 막차라도 타게 하시려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늘 당신 두 팔을 활짝 벌리시고 우리의 돌아옴을 기다리시는 열려계시는 하느님, 늘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환대의 주님, 우리가 돌아갈 때마다 그저 용서하시고 등 두드려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마태오복음에서 세 번째 설교집인 13장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핵심 메시지인 '하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일곱 가지의 비유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중 두 번째인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마태 13,24)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밭으로 삼아 좋은 씨를 뿌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분명 좋은 씨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신의 밭'에 침입자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마태 13,25).
그렇습니다.
가라지가 뿌려진 것은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벌어진 일입니다.
곧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밭에 뿌려진 '좋은 씨'를 방치한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자신 안에 심어진 말씀의 씨앗에 응답하지 않고 잠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가라지는 뿌려집니다.
그러기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먼저 '좋은 씨'의 존귀함을 깨닫고 깨어 지켜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가라지와 밀을 분별할 줄을 알아야 하고, 가라지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막고 '좋은 씨'가 잘 자라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라고 말하는 종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 13,29-30)
사실 가라지는 밀의 뿌리와 서로 얽혀 있기에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뽑히게 되기 때문에 수확 때에 뿌리를 함께 뽑아서 분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밀’인 사람들에게 수확 때까지 견뎌내는 성실함을 당부함이라 말하며, 한편 히에로니무스는 ‘가라지’인 사람들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 둠을 시사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 베네딕투스는 그의 [수도규칙]에서 말합니다.
“악습은 미워하되 형제들은 사랑할 것이다.
책벌함에 있어서는 현명하게 할 것이며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 것이니, 녹을 너무 지우려다 그릇을 깨뜨리는 격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
(규칙서 64,12)
사실 공동체 안에도, 가정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4)라는 주님께서 가르쳐준 기도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이나 악을 제거하거나 없애주거나 해결해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그것으로부터 구해달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마태 13,25)
주님!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 되게 하소서!
제 안에 하늘이 열리고 당신의 나라가 자라나 온갖 나쁜 것들을 도려내고 당신 형상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이 세상과 형제들과 공동체를 밭으로 주셨으니 제 손이 당신 사랑을 뿌리게 하소서.
오늘, 우리 안에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끝이 좋아야」
-반영억신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
하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원인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사람은 망하는 법입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거두어서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농사일을 하는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뿌린 씨는 좋은 것이었는데 어찌 가라지가 생겼습니까? 가라지를 거두어낼까요?’하고 묻자 주인은 말합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우리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뽑아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추수 때까지 두어서 기회를 주십니다. 결정적으로 알곡은 곳간에 모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수 전에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여 골라내려는 노력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의 계획을 간섭하는 일이 됩니다. 판단의 권리는 주인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12,19) 주인은 가라지와 그로인한 피해를 참아주며 기다립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으십시오. 사실 하느님께서는 무던히도 우리를 기다려 주셨고 참아주셨습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가라지 같은 인생이라면 서둘러 밀과 같은 인생으로 바꿔야 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과거에 안주하지 않으며 하늘을 보고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성경인물 중에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도 한때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방탕한 삶을 끝내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
선과 악은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 구분되듯이 세상 종말에 분명하게 구분될 것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추수 때 따로 베어져 불태워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었던 밀과 같은 선한 사람들은 하늘의 곳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 되는 시련이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나를 견고케 하는 귀한 은총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날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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