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2. 7. 21. 06:21

2022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을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마태오 13,10-17)


Gross is the heart of this people,
they will hardly hear with their ears,
they have closed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and hear with their ears
and understand with their hearts and be converted
and I heal th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은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저버리고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친구들과 등산을 갔던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처음 가는 등산이었기에 큰 기대가 있었지만, 산 정상까지의 등산은 그에게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힘들다는 생각이 계속되면서 정상에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입니다. 다리도 풀려서 더는 앞으로 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또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함께하는 친구에게 커다란 피해를 줄 것이 분명했습니다.


친구들에게 “먼저 가! 나는 틀렸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 떼어 놓고 가면 우리 마음이 좋겠니? 그리고 이 정도까지 왔으면 정상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어. 지금까지도 잘했잖아. 그러니 잠깐 쉬었다가 다시 힘내서 올라가자.”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준 친구들 덕분에 생애 첫 등산에 성공했습니다. 이런 친구와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일까요? 솔직히 긍정적으로 나를 끌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기 삶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나를 주저앉게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자기의 모습을 되돌아보십시오. 나는 내 이웃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을까요?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포기하고 좌절하게 했던 것은 아닐까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 곁에는 역시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내 주위를 바꾸고, 결국 나를 변화시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늘 긍정적인 방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포기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늘 희망을 간직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몇몇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어렵고 복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어떤 이도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다녀온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더 알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면서 율법의 조항들을 더 복잡하게 만들면서, 하느님 나라에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일상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소재를 따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일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깨달을 수 있는 단순하고 긍정적인 마음이 필요합니다. 일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 또 하느님 나라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절대로 어렵고 복잡한 곳이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같이 살아라. 언젠가는 그날들 가운데 진짜 마지막 날이 있을 테니까(레오 부스칼리아).

 또다른 심판의 기준: 비유가 이해되는가?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sPSV5pPJNq4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비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곧 ‘심판’과 직결됨을 말씀하십니다. 심판의 기준은 사랑인데,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도 하나의 비유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좀비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좀비는 아버지와 딸처럼 보입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놀이기구를 태워줍니다. 딸이 놀이기구에서 떨어져 손뼈가 부러지자 아버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하지만 모습은 영락없는 좀비이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 좀비를 향해 총을 쏩니다. 아버지 좀비는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그러자 딸 좀비가 쓰러진 아버지 좀비 앞에 서서 아버지를 보호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비유입니다. 여러분이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라면 딸도 쏠 수 있습니까? 만약 쏠 수 있다면 여러분이 좀비입니다. 좀비는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타인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는 모기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비록 좀비처럼 보이지만 아빠와 딸은 상대의 고통을 느낍니다. 대신 고통을 감내하려 합니다. 그런데도 딸까지 쏜다면 내가 사랑이 없는 좀비임이 드러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도 사랑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성경 말씀을 무시한다면 내가 좀비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말씀은 살려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라고 하신 어머니의 말씀도 비유입니다. 이 비유 말씀을 이해할 때 나도 어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가정을 꾸릴 수준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진짜 어머니를 찾기 위해 다리 밑을 찾아다닌다면 나는 영원히 그 가정의 일원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성경 말씀과 비유를 이해하지 못할까요?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사랑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형과 싸우는 금쪽이를 아빠가 말릴 때 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치고받고 싸우게 놔두지, 그랬어!”

금쪽이는 분노로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소리 지릅니다. 

    “날 죽이려는 거잖아. 난 아들이 아니라는 거잖아. 말이 충격적인 게 아니라 뜻이 충격적인 거잖아.”

엄마는 황당해서 말합니다. 

    “야, 내가 너 죽이라고 했어?!”

  

    도대체 금쪽이는 왜 엄마 말을 비유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걸까요? 엄마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금쪽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 심한 학대를 당하였는데 그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금쪽이는 30cm 자로 폭력을 당했고 어두운 작은 공간에 자주 감금당했었다고 합니다. 물론 금쪽이 형이 말해준 것이라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황상 학교에서는 착한 아이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싸우면 말려야지, 왜 보호해주지 않아? 그때도 그랬잖아? 난 자식 아니야?”

  

    그러나 부모도 금쪽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도 난리를 치니까 미운 마음이 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를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해줍니다. 아이는 그제야 부모가 자신을 보호해주는 사람임을 느끼고 진짜 싸우다 죽으라고 한 말이 아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랑은 이해하게 합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와서 성체를 영했을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성경의 비유가 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섬겼던 ‘금송아지’처럼 제가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당신 위해 다 포기하고 들어왔으니 당신도 나를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고 불만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물 줄 테니 밭 갈라는 식으로 하느님을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는 성경을 상징으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들을 귀가 생겼다는 증거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사랑합니까? 비유가 이해됩니까? 아니면 곧이곧대로 문자대로만 해석합니까?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영적으로 해석이 되면 성경이 비유로 보입니다. 상징으로 보입니다. 상징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나에게 말씀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죽이고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비유가 이해됩니다. 저는 책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많이 높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을 더 사랑합시다. 그러면 성경의 비유가 이해될 것입니다.

 뭍지 않는 사제들, 보고 들을 수 있어 행복한 제자들

-이가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ktTVCuFOVck

 -조재형신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도 있습니다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입니다과부 마음은 과부가 안다고 하고며느리 마음은 며느리가 안다고 합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린다는 의미입니다미국에서 두 가문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1740년대에 두 명이 아일랜드에서 미국 동부로 이민 왔습니다한 명은 뚜렷한 목표가 없이 살았습니다주어지는 환경에 따라 살았습니다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습니다다른 한 명은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살았습니다환경을 개척하면서 살았습니다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면서 살았습니다. 260년이 지난 2000년도에 두 가문의 자녀들의 삶을 추적했다고 합니다목표가 없었던 가문의 자녀들은 사회의 공헌도가 낮았다고 합니다교도소에 가는 사람도 많았고도박과 알코올에 의존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뚜렷한 직업이 없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목표가 있었던 가문의 자녀들은 사회의 공헌도가 컸다고 합니다정치인법률가교수의사가 많았다고 합니다존경받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시작은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과는 달랐습니다삶의 태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서산대사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답설야중거 할 땐 불수호난행하라 금일아행적이 수작후인정 할 것이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신중하게 하라지금의 발걸음이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김구선생님도 이 말씀을 평생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피의 순교로 사제들에게 좋은 이정표를 보여주었습니다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땀의 순교로 사제들에게 좋은 이정표를 보여주었습니다신앙의 선조들은 뜨거운 신앙의 열정으로 박해를 견디어내며 순교함으로써 좋은 이정표를 보여주었습니다한국 교회는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를 통해서 박해받던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가 되었음을 선포하였습니다당시 김수환 추기경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교회사를 기릴 뿐 아니라 민족의 현재를 변혁시키는 누룩이 되고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빛이 되고자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빛과 땅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1984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주례로 103위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103위 성인과 순교자들은 이 땅의 빛이 되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44차 세계 성체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성체대회가 열렸고변방의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의 일원이 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2022년입니다자랑스러운 선조들이 보여주었던 이정표를 우리가 충실히 따라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교회의 통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신앙의 선조들이 밀을 심었는데 우리는 어느새 가라지를 심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목숨을 걸고 미사참례를 했는데 지금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성당이 있음에도 주일 미사 참례자는 10%대로 떨어졌습니다. 90%의 신자는 주일 미사 참례를 안 하고 있습니다주님의 성체를 모시지 않고 있습니다아이들은 가정에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주일학교에서 교리를 배우면서 첫영성체를 하였습니다성당에서 준비한 여름 행사에 참여하였습니다신앙은 곧 삶이 되었습니다그런데 아이들은 가정에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스펙을 쌓는 데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아이들의 첫영성체 교리에는 관심이 줄어들고 있습니다학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은 장려하면서 아이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모른척하고 있습니다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가난한 이아픈 이장애인고독한 이들이 성당의 문턱이 높다고 호소합니다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습니다우리의 후손들이 따라올 수 있는 참된 신앙의 이정표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독서의 내용은 21 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해당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우리들 또한 주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이정표 삼아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충만하게 살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통’하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시골 영감들이 주류인 저희 공동체이지만, 살레시오회 고유의 청소년 사목을 위해 다들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이번 주말부터 찾아오게 될 수많은 청소년들이 머물 숙소를 준비하고, 그들이 안전하게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해변 정리정돈, 쉼터 조성, 예초 등등으로 하루하루가 분주합니다.

  

오늘은 저희 공동체 큰 경당을 이번 여름 오게 될 청소년들이 사용할 주 프로그램 장소로 바꾸기 위해 다들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장의자를 뒤로 밀치고, 잡동사니들도 싹 치우고, 널찍한 프로그램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공부와 세파에 지친 청소년들이 시원한 공간에서 마음껏 즐길 것을 생각하니 피곤이 싹 가셨습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도 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모습을 보시고, 껄껄 웃으시며 너그럽게 수용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분이셨습니다. 형식적이고 이중적이며 경직된 것들을 도무지 수용하실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참으로 딱딱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기가 막힌 사람들입니다. 귀가 막히고, 눈이 멀고, 마음이 닫히고, 영혼의 상태는 캄캄한 암흑이고, 그 어떤 조언이나 동반도 먹혀들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이 그릇되고 과도한 자기 확신이나 신념에 잔뜩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추구하고 있는 노선이 얼마나 웃기고 엉뚱한 것인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지금 걷고 있는 길이 멸망으로 향하는 길임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나는 새로 태어난 아기라고 여기고,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복음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건강하고 충만하게 살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통’하는 것입니다. 기가 통하고, 호흡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고, 정신이 통하며, 영혼이 통하고, 오장육부가 원활히 통해야 만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활짝 열린 마음과 영혼으로 당신께 나아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눈이 활짝 열리고, 귀가 활짝 열리고, 마음도 활짝 열리고, 온몸과 정신이 활짝 열려, 매일 매 순간 사랑 그 자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뚜렷이 뵐 수 있는 눈을 간절히 청합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고 가르치신 것이 '하늘나라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대한 것을 땅에서 가르치셨으니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의 낯익은 사물이나 상황으로 예를 들어 쉽게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지 않고는 ~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마태 13,34)라고 할 정도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10)하고 여쭙자, 먼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 13,11)

 

참 이상한 일입니다.

만약 이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는 군중들에게 하늘나라를 주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사실 이 말씀은 '하늘나라'가 신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주시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없는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의 신비'가 모두에게 가려져 있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곧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그 '신비'를 아는 일이 허락되어 있고, 반면에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그 은혜를 거역하기에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태 13,12)

 

이는 마치 불공평한 처사처럼 여겨집니다.

‘가진 것을 나누어 아무도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사도 4,34)는 초대교회의 모습에 견주어보아도 너무도 빗나간 처사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불공평한 처사를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똑같이 하늘나라를 가르쳐 주고 기적을 보여주시지만,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자는 더 받아들여 넉넉하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탤런트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마태 25,28-29 참조),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에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통해 밝히십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마태 13,14-15; 이사 6,9-10)

 

위의 두 번째 문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어가 '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로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원하지 않고 거부한 완고함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완고한 마음을 주신 것(탈출 4,21)이 이집트인들에게 당신이 ‘하느님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셨듯이(탈출 14,4.18),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하느님 백성의 눈과 귀를 닫는 것은 ‘진정한 하느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제자들에게 선언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마태 13,16)

 

이는 이미 온 ‘하늘나라’를 믿음으로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을 듣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믿고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태 13,13)

 

주님!

제가 보아도 보지 못함은 보여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이 가려 있기 때문입니다.

들어도 듣지 못함은 들려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귀가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보여지고, 받아들여야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주님, 믿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주시어 하늘나라의 신비를 제 눈이 볼 수 있고, 제 귀가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16주 목요일-자기에게 행하는 악행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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