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복음서의 여러 군데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십자가 밑에(마태 27,56 참조),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마태 27,61 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 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했던(요한 20,15 참조) 그녀에게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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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요한 20,1-2,11-18)
Jesus said to her, "Mary!"
She turned and said to him in Hebrew,
"Rabbouni," which means Teac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가의 신부는 밤새도록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니다가 야경꾼을 지나치자마자 그를 찾았다고 말한다(제1독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자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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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갑질하는 사람,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아랫사람을 함부로 하는 사람, 익명성이 보장되기에 인터넷 안에서 악성 댓글 달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을 우리는 절대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좋아하십니까? 이런 사람들과 반대의 모습, 즉 겸손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 남을 배려하며 밝게 웃는 사람 등의 모습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래서 갑질하고, 함부로 대하고, 악성 댓글을 남기고, 그 밖의 부정적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으로부터 칭찬과 지지를 받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행동해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욕먹으면 오래 산다’라고 하던데, 이렇게 욕 많이 먹으며 오래 산다고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행복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특히 하늘 나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절대로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부정적 평가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그 사람이 오히려 불쌍한 사람임을 기억하며 측은히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첫 사람을 알려졌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제일 먼저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십자가 밑에 있었고, 부활하신 무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하던 제자들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자마자 뿔뿔이 흩어졌고, 죽음 뒤에는 다락방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그 호언장담은 공허한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과 수난과 죽음에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시지만,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에 함께 있었던 마리아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고, 당신의 부활을 처음으로 전할 수 있는 영광까지 주신 것이었습니다.
유한한 시간인 이 세상 안에서의 행복을 좇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시간인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행복을 좇겠습니까? 후자를 원한다면, 주님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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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뿌니"는 삶의 '빛'이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le75iSRvsMw
실화를 바탕으로 한 ‘위험한 아이들’(1995)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비록 여성이지만 해병대까지 나온 존슨 선생은 문제아들만 모여있는 한 반을 맡게 됩니다. 그 반의 대장은 ‘에밀리오’란 아이인데 선생님께 성희롱까지 합니다. 처음에 존슨 선생은 이런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었지만 아이들을 믿어주기로 합니다.
우선 아이들이 관심 있어 하는 특공 무술 활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면서 공부에도 흥미를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교장 선생님입니다. 교장은 존슨 선생을 교장실로 부릅니다. 그런데 노크하지 않았다며 존슨 선생을 나무랍니다. 그리고 다시는 가라테와 같은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에밀리오와 같은 반 아이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라울이라는 아이입니다. 에밀리오는 반 아이들이 존슨 선생의 뜻에 따라 착해지는 것을 눈 뜨고 못 봐줍니다. 그런데 라울은 선생님 편입니다. 둘은 정학을 맞습니다.
존슨 선생은 먼저 라울의 집에 찾아갑니다. 부모는 사고만 치는 라울 때문에 긴장을 했지만 선생님은 라울에 대해 많은 칭찬을 합니다. 라울은 완전히 선생님 편이 됩니다. 라울은 머리가 좋은 캘리라는 친구와 함께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라울과 두 친구를 불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시켜줍니다. 하지만 라울만 나옵니다. 캘리와 다른 친구는 아르바이트해야 해서 식당에 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라울도 며칠 동안 결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레스토랑에 오기 위해 옷을 사느라고 돈을 빌렸는데 갚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라울에게 자신이 돈을 꾸어주겠다고 합니다. 단 졸업할 때 갚는 조건으로. 라울은 자기가 졸업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습니다. 선생님은 라울이 졸업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존슨 선생은 이제 캘리를 찾아갑니다. 반에서 가장 머리가 좋아서 공부하면 잘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캘리는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임신해서 학교에서 나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존슨 선생은 학교에 아이를 받아달라고 청합니다.
그다음엔 또 에밀리오가 문제입니다. 감옥에 갔다고 돌아온 갱단 일원이 자기 여자 친구를 뺏어간 에밀리오를 죽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밀리오는 자기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며 그 학생을 죽이려 합니다. 선생님은 에밀리오를 설득합니다. 교장 선생님에게 그 갱단 일원이 마약을 판다는 것을 말하면 그가 또 감옥에 가게 될 것이고 그러면 졸업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다음 날 에밀리오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노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에밀리오의 말을 듣지 않고 돌려보냅니다. 그 후 에밀리오는 총에 맞아 죽은 상태로 발견됩니다.
존슨 선생은 충격을 받고 학교를 그만두려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말립니다. 라울은 그러면 자신에게 왜 졸업하라고 했느냐 따지고 임신한 캘리는 다시 학교에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쉽게 보내드릴 수 없어요. 선생님은 우리의 빛이니까요.”
학생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스승이 빛이라는 것을. 자신들이 방황했던 이유는 자신들을 믿어주는 참 스승이 없었다는 것을. 그래서 존슨 선생은 아이들과 함께 하기로 마음을 바꿉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이것으로 오늘 복음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을 왜 마리아 막달레나가 “라뿌니!”, 곧 ‘스승님’으로 불렀는지 이해가 갑니다. 일곱 마귀에 들려 죄에 물들어 있던 마리아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을 믿어주는 스승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냉담하는 어떤 자매에게서 신앙을 강요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인생엔 해답이 없어요. 안 그런가요?”
이 말 안에는 아직 그리스도를 스승이요 빛으로 만나보지 못했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인생은 답이 없기에 어둠 속에서 헤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만나면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승이 없는 삶은 어둠의 삶입니다.
사자 무리가 사냥꾼에게 모조리 살해당했습니다. 새끼 사자만이 간신이 살아남았습니다. 새끼 사자는 양의 무리가 자기를 핥아주니 기분이 나아졌습니다. 그래서 양의 무리와 함께 메에 메에 하며 성장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자의 무리가 양의 무리를 습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무리와 함께 있었던 사자의 뒤통수를 칩니다. 정신 차리라는 것입니다. 사자 무리의 대표는 그 사자를 물가로 끌고 가서 생김새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양의 고기를 먹으라고 합니다. 사자는 자기의 형제들인 양을 못 먹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먹게 되고 그때 사자의 포효를 하게 됩니다.
스승은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믿어주고 그렇게 믿도록 양식을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당신처럼 될 수 있음을 믿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자이시면서 사자인 줄 모르는 우리에게 오셔서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오늘 예수님께 마리아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버지를 자신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어야 그분을 빛이요, 스승이요, 구원자로 만난 것입니다. 마리아도 이렇게 되자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소리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왜 우느냐?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0vLcL_44rsg
-조재형신부-
일본 문화의 특징은 선을 긋는 문화라고 합니다. 한국의 씨름은 씨름판 위에서 삼세판을 하지만 일본의 스모는 스모판에서 몰아내는 단판 승부입니다. 선을 긋는 일본 문화는 좀처럼 타인의 일에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정치에도 좀처럼 관여하지 않습니다. 정치는 정치인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선을 긋는 문화는 상당히 정적입니다. 사회가 정의로울 때는 평화를 유지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일에 전념하기 때문에 기초과학이나 물리학에 큰 성과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을 긋는 문화는 사회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하기 어렵습니다. 선을 긋는 문화는 현대인들에게 고독과 소외를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합니다. 선을 긋는 문화는 상대방의 호의에 마음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이 원한다면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을 자주 넘으려는 한국의 문화는 선을 긋는 일본의 문화의 신중함과 진중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선을 엄격히 긋는 일본의 문화는 선을 넘는 한국 문화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어떤 것인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넘는 경우가 많으셨습니다. 연민과 사랑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과 멀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느님을 뜻을 따를 때까지 기다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지만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선을 넘는 경우가 많으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부르셔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유다를 막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워 도망간 제자들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선택을 존중하셨습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축일입니다. 오늘의 감사송은 막달레나 성녀의 삶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막달레나는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 일수도 있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일수도 있고, 오랜 동안 하혈을 하던 여인 일수도 있고,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 일수도 있고, 부정한 행위를 한 후에 잡혀온 여인 일수도 있습니다. 성서가 전해주는 막달레나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죄 중에 있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막달레나는 지금 우리들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역시 나약하고, 부족하고, 쉽게 넘어지고, 원망과 한이 있습니다.
사도 중의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
-양승국신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니는 아가서 저자의 절절한 모습과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스승 예수님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아가 3장 1절)
사랑하는 스승님이 너무 그리워 밤잠조차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거리와 광장을 울며 돌아다니던 바로 그 모습이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오랜 교회 역사 안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큰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그녀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죄 많은 여인을 동일시 해왔습니다. 회심한 사람의 대명사로 마리아 막달레나를 첫 번째로 꼽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어디에도 마리아 막달레나와 죄 많은 여인이 동일 인물이라는 근거가 없습니다. 복음서가 알려주는 그녀에 대한 기록들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고향은 막달라, 이름은 마리아, 한때 일곱 마귀에 시달리며 고생했으나, 은혜롭게도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받았다는 것, 예수님을 만난 이후 지니고 있던 전 재산을 털어 그분과 사도단의 생계에 힘을 보탰다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는 것, 예수님 부활의 최초 목격자였다는 것.
예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마리아 막달레나였기에 그에 상응하는 큰 사랑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물심양면으로 예수님과 사도단을 도왔고, 예수님 가시는 곳 마다 밀착 동행하면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드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치유된 이후 그녀의 삶은 오로지 예수님이 전부였습니다. 그녀에게서 예수님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우리 교회는 아주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드렸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여제자라고까지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잘 나타난대로 ‘예수님 부활의 최초 목격 증인’으로 불려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께서는 ‘사도 중의 사도’라는 빛나는 칭호를 선물하셨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런 영예로운 칭호를 받기에 합당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셨습니다. 꽤나 부자였던 그녀는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 전체를 모두 털어 예수님과 제자단의 생계를 후원하였습니다. 삼엄하고 살벌했던 예수님의 처형 현장인 골고타 언덕을 성모님과 함께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정성껏 수습했습니다. 장례 절차를 거의 주관하다시피 했습니다. 거기다 빈 무덤을 목격한 후 그 소식을 제자단에 신속히 알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리아 막달레나는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못한 목숨을 하루 하루 부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희망도 없이, 삶의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짐승처럼 살아가던 그녀에게 기적같은 일이 생겨났습니다.
치유자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눈여겨보신 것입니다. 그분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마치 거짓말처럼 그녀의 인생에서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가고, 꿈같은 봄날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녀는 죽음에서 삶에로 건너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전부요 존재의 이유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앞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보여준 태도와 신앙은 제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우세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된 명백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수난의 길을 회피했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시선과 마음을 항상 예수님께로 활짝 열려있었습니다.
사도 중의 사도, 여사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언제 어디서나 스승 예수님께 충실했습니다. 예수님의 인생 곡선이 절정에 도달했던 시절, 잘 나가던 시절, 공생활 기간에도 그분께 충실했지만, 급격히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던 수난의 시기, 특별히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 역시 그분께 충실했습니다.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의 충실성 앞에 스승 예수님께서도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사도들에 앞서 그녀에게 드러내십니다. 당신 부활의 최초 목격 증인이 되게 하시고, 가장 탁월한 복음 선포자가 되게 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이영근신부-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 뵌 분일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전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가리켜 ‘사도 중의 사도’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 새로운 각도에서 '복음'이 바뀐 것에 해당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새로운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시대의 '복음'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이시다.’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사도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요한 20,17)
이는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신 것입니다.
곧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바로 제자들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증언하는 진리요, 부활이 가져온 선물입니다.
곧 우리가 성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고, 우리가 아빠 아버지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요한 20,15)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사실 우리가 지척에서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함은 우리 마음의 귀와 눈이 닫혀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곧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자신의 생각과 편견에 빠져있던 마리아를 빠져나오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이 ‘말씀은 더 이상은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모르는 낮선 분’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반영억신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예상하지 못한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결국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시 이룰 수 없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뀐 여인으로,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분명한 것은 마리아는 세상 온갖 것에 시달리며 기구하게 살아온 슬픈 여인이요, 죄로 얼룩진 상처의 아픔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가족으로부터의 버림과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마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리아는 본모습을 찾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그 은인이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절망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 아직도 어두울 때 누구보다도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누구를 찾느냐?”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고 있었기에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면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을 수 있을까요?
마리아는 절망의 눈물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신을 매장할 때도 거기 있었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수난의 처음부터 죽음의 끝까지 함께한 충실성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수난의
시기에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 부르시며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라뿌니!”, “스승님!”하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알려주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이 말씀은 결국 “마리아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다. 나는 이것을 전하러 세상에 왔고, 너희도 하느님께 올라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부활의 세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천상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흔들림 없이 주님을 찾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천국을 그리워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
-송영진신부-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18-21).”
이 말씀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가장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사도들이 아니고 왜 마리아 막달레나인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답은 간단합니다.
사도들보다 마리아가 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도들도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고 깊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사랑은 사도들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여기서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을,
“너희도 살아 있어야 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이 살아 있어야 ‘살아 있는 신앙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갈 때, 사도들이 함께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시신에 향료를 바르는 일은 여자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시고
시신에 향료를 바른 사람들은 ‘남자들’입니다.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최고의회 의원인 니코데모가
바로 그 일을 했습니다(요한 19,38-40).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의 시신을 모실 때,
여자들이 그것을 지켜보았는데(루카 23,55), 그 자리에 사도들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마리아가 발견하고
베드로 사도와 ‘다른 제자’에게 알렸을 때, 그 두 사람은 곧바로 달려가서
마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긴 했는데,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습니다(요한 20,10).
왜 그랬을까? 당시 상황을 마리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냥 가버린 두 제자가 몹시 야속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도, 두 제자가 무덤에 마리아만 남겨두고
그냥 가버린 것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었다면,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특히 바로 옆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말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부활신앙을 갖지 못한 상태라면,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제자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마리아보다 덜했기 때문에,
그래서 마리아보다 소극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마리아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두 제자보다 컸기 때문에,
그래서 두 제자보다 더 적극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때 두 제자가 그냥 돌아가지 않고 무덤에 남아서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찾았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리아와 함께 만나게 되었을까? 그것은 모릅니다.
어떻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일의 ‘결과’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셨는데,
그 일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일이 아니라,
마리아 쪽에서 이미 그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일곱 마귀’에 들렸다가
예수님 덕분에 해방되었다는 것뿐입니다(루카 8,2).
‘일곱 마귀’를 어떤 윤리적인 죄로 해석하고,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죄인이었던 여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성경에도 근거가 없고,
전승에도 근거가 없는 오해일 뿐입니다.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편견도 작용했을 것이고,
마리아 개인에 대한 시기 질투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일곱 마귀’는 글자 그대로 ‘일곱 마귀’였거나,
아니면 ‘어떤 중병’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 그 일에 대해서, “예수님으로부터 큰 은총을 받았으니까
예수님께 큰 사랑을 드린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큰 은총을 받았다고 해서 항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큰 사랑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큰 은총을 받았지만,
예수님께 감사와 사랑을 드리기는커녕
바로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밀고했습니다(요한 5,15).
<죽었다가 예수님 덕분에 살아난 사람들,
즉 ‘나인 고을의 어떤 과부의 외아들’과(루카 7,14-15)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이(루카 8,54-55)
예수님께 얼마나 사랑을 드렸는지는
복음서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 크게 감사드리기는 했겠지만,
사랑은 복음서에 기록을 남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고, 첫 선포자라는 점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먼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못합니다.
말씀 나누기 - 성녀 막달라 마리아 사도 축일-겹 행복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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