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7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마태오 13,44-46)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treasure buried in a field,
which a person finds and hides again,
and out of joy goes and sells
all that he has and buys that fiel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두 자신을 저주한다고 하소연하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악한 자들의 손에서 건져 내시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고,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고 하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단히 먹은 마음이 사흘을 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결심이 크지 못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사실 늘 3일이 문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3일만 참으면, 즉 3일 이내에 원하는 성과를 얻게 되면 자기 결심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열정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기도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작심삼일로 끝났다는 분이 많습니다. 원하는 성과가 이 안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열정을 불러일으킬 무엇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금주, 금연하겠다는 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금주, 금연을 통한 성과보다 막연하게 끊겠다는 다짐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정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 일에 한 번 열정을 불러일으킬 무엇을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용기도 북돋아 주고, 동기 부여 해주고, 도와주겠다는 누군가가 있으면 성공적 다짐이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작심삼일로 끝나는 분은 혼자 있는 외로운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아무튼 작심삼일로 끝나는 나의 결심이 아닌, 끝까지 이룰 수 있는 열정을 계속해서 부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도 있고, 자기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들을 계속 찾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진가를 안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하다는 것을 보물과 진주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손에 넣으려는 목표물이 있으면 자기 소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위험해 보이는 과감한 투자까지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처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보물이나 진주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서 하느님 나라를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십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이 비유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요. 남의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상일까요? 보물을 신고해야 정직한 사람이 아닐까요? 세속적인 탐욕이 가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한 노력은 아무리 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모두 가고 싶어 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노력은 어떻습니까? 작심삼일로 끝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 속에서 하느님 나라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다시금 따져보면서,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들어가려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이 의지를 위해 앞서 말씀드린 열정을 계속해서 만들어주십시오. 그 열정과 함께할 나의 이웃을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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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저도 예수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qyV8mkew2hc
밭에 숨겨진 보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SJOvLmiAD2A
-조재형신부-
예전에 아메리카 원주민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단다. 하나는 옳은 일을 하고, 남을 돕는 파란 늑대란다. 다른 하나는 나쁜 일을 하고, 남을 해치는 검은 늑대란다.’ 손녀는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가 싸우면 어느 늑대가 이기나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우리의 마음은 일심동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2심동체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다른 내가 그것을 막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우리의 내면에는 거짓된 자아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참된 자아를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두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있어야 하지만, 우리의 나약한 마음은 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사탄의 깃발 아래 있을 때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원주민 할아버지의 ‘통찰’이 맞습니다. 우리가 먹이를 주는 우리의 마음이 선과 악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마음에 먹이를 주면 악한 마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은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의학의 특징은 발병된 부위를 수술이나 약물을 통해서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의학의 장점은 효과를 눈으로 확인하기 쉽고, 조기에 치료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서양의학의 단점은 발병부위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세포를 상하게 하기도 하고, 발병 원인을 파악하기 보다는 발병부위를 제거하기 때문에 다시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동양의학은 우리 몸은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부위에 질병이 발생하면 그곳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우리 몸 전체에 이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질병 부위를 없애거나 잘라내기 보다는 그와 같은 질병이 사라질 수 있도록 몸 전체를 다스리는 처방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몸의 체질을 연구하고, 각 장기의 기능을 연구하는 것이 동양의학의 치료 방법입니다. 당장 눈에 드러나는 증상을 치료하기 보다는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근본적인 치료를 하려고 합니다. 동양의학의 장점은 몸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상처부위를 제거하거나, 질병부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몸의 기능이 건강해지도록 해서 몸 자체가 이겨내도록 저항력을 키워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양의학의 단점도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고, 효과가 즉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시켜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 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전에 이런 실험이 있었습니다. 10명의사람 중에는 열심 한 사람, 대충 일하는 사람, 게으른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모두가 열심 할 것 같지만 열심 한 사람 중에서 또 게으른 사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을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게으른 사람들 또한 부지런한 사람이 되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공동체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 단체들이 있습니다. 각 단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지체들입니다. 어떤 단체는 열심히 봉사를 합니다. 어떤 단체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지내야 합니다. 잘못이 있는 사람, 단체를 배제하고, 공동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주변에 부족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하는 사람들도 보일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결코 고통에 굴하지 않았으며 당당히 넘어섰습니다!
-양승국신부-
끝도없이 다가오는 이런 고통 저런 고통,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오늘 우리들입니다.
때로 참혹한 고통 앞에서는 그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정쩡한 위로의 말이 오히려 쓰라린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이 사무친 고통, 극심한 고통은 누군가의 더 큰 고통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가 되고 완화가 됩니다.
예언자로서의 하루하루 삶 자체가 고통이었던 예레미야 예언자의 탄원을 묵상할 때 마다 제겐 은근슬쩍 위로가 되니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그는 어느 순간 얼마나 괴로웠던지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극심한 고통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하실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역사상 그토록 혹독한 고통을 겪으신 분이 또 어디 있을까요? 지상에서의 짧은 생을 사셨던 예수님이셨지만 그분처럼 심연의 극한 고통을 겪으신 분은 인류역사상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고통의 극점에 서 계셨던 분이 바로 수난 예수님이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이 견딜수 없을 정도로 극심할때 신앙인으로서 가장 좋은 극복의 비결은 고통의 극점에 서계신 수난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토록 극심하고 혹독한 고통을 겪은 예레미야 예언자였지만 고통에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당당히 넘어섰으며 마침내 멋지게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고백에 이르렀습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이영근신부-
13장에 있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 일곱 개 중에서 오늘 우리가 들은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는 일반 군중에게 하신 앞의 네 개의 비유와는 달리, 제자들에게 하신 비유로 마태오복>에만 전해집니다.
이 비유들은 '대체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깨우쳐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우리의 ‘일터인 밭’에 묻혀 있고, ‘진주를 찾는 행위’ 안에 깃들어 있음을 깨우쳐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진 것을 다 팔아 사들여야 할’ 만큼 가치 있고 중요한 일임을 깨우쳐줍니다.
오늘은 이 두 비유의 서로 다른 특성에 주의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보물의 비유'는 품꾼 혹은 소작인이 남의 밭에 나가 일을 하던 중에 묻혀 있는 보물을 우연히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일하다가 갑작스럽게 횡재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보물을 파내게 되면 당시의 법에 따라 주인의 것이 되기 때문에, 그 보물을 파내거나 몰래 가지고 돌아가지 않고 다시 묻어두고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곧 법과 도덕을 넘어서는 이 품꾼의 태도는 보물의 가치가 그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얻을만한 귀중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보물을 얻기 위해 그 어떤 희생도 치러라”는 강력한 요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마르 10,21)고 강력한 희생을 요청하셨듯이 말입니다.
한편 '진주 상인의 비유'는 우연히 밭을 갈다가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진주를 가진 장사꾼이 마치 진리를 찾아 나선 수도승처럼 더 값진 진주를 찾아 나섰다가 애써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하나'(ενα)란 ‘여럿 중의 하나’라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 곧 ‘하나뿐인 유일한 것’을 의미합니다.
곧 최상의 것으로서, 그것 ‘하나’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요, 다른 모든 것을 합해도 그 보다 낳을 수 없는, 도저히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최상의 값진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다른 모든 것을 버려두고라도 이 값진 진주 하나를 차지하라”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마치 마르타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루가 10,42)인 것을 요청하셨듯이 말입니다.
결국 이 두 비유에서 지칭하는 '밭의 보물'과 '값진 진주 하나'는 '하늘나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꼭 사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앞서 가장 먼저 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마태 6,33)
우리는 이 '보물', 이 '값진 진주'를 오직 한 분, 우리 주님 예수님에게서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신 당신이 바로 우리의 '유일한 보물', '하나뿐인 진주'입니다.
그런데 ‘유일한 보물’이신 당신께서는 ‘먼저’ 우리를 소중한 진주로 여기시고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마태 13,44)
주님!
밭을 일구는 제 손길이 당신의 나라를 찾아 발견하게 하소서.
발견하고서 가진 것을 다 팔아 사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값진,
모든 것을 합해도 그것보다 나을 수 없는,
도저히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최상의 것,
그것을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기에,
목숨을 내어주고서라도 얻게 하소서.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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