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7월 29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2. 7. 29. 07:12

2022 7 29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마르타 성녀는 라자로의 동생이자 마리아의 언니로서 예루살렘과 가까운 베타니아에서 살았다. 나흘이나 무덤에 묻혀 있던 라자로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다시 살아난 인물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머무르실 때 언니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으나 동생 마리아는 가만히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루카 10,40)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주님의 이 말씀에 따라 마르타 성녀는 활동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마리아 성녀는 관상 생활의 모범으로 공경받고 있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19-27)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whoever believes in me, 
even if he dies, will live,
and anyone who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서로 사랑하자며,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당신은 부활이요 생명이니, 당신을 믿는 이는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독배인 헴록을 마시고 죽은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말은 많은 이에게 알려진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헴록을 마신 뒤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크리톤, 내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진 것이 있네. 기억해두었다가 갚아주게나.”

임종의 자리에서 외상값을 걱정했던 것이 아닙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의료의 신으로, 사람들은 병을 고쳐 준 의사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닭 한 마리를 봉헌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순간에서 감사하지 못했던 일을 기억했고, 이를 실천하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를 위대한 현인으로 높이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런 남다름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모두가 감사하며 사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것이 오히려 남다름이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주님을 굳게 믿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를 어렵고 힘들다면서 믿음을 갖지 않고 주님의 뜻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남다르게 평가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르타는 남다름을 보여줍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뵙자, 자기 오빠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율법 학자들은 사람이 마지막 숨을 넘기면 영혼이 사흘 동안 육체 주위를 빙빙 돌다가 나흘이 지나면 이제는 영영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르타도 이 가르침에 따라 자기 오빠가 이제 가망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도 원망하지 않고 이런 믿음을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2)

이 믿음에 주님께서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때의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 먼 훗날의 영광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말씀하셨고, 실제로 라자로를 다시 살려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데 어떤 남다름을 가지고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남다른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영예롭게 사는 가장 위대한 길은 우리가 표방하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소크라테스).

 저는 누군가의 신앙을 평가해야 할 때 이것만 봅니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8VbvXpRDj7E

존 록펠러는 23세에 이미 백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43세에 세계에서 가장 큰 독점기업인 스탠다드 오일 컴퍼니를 세웠습니다. 그의 재산은 현 시가로 따지면 500조가 넘습니다. 하지만 53세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히 내는 것은 물론이요, 주일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좋은 신앙을 가졌다고 보아야 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는 늘 긴장하며 걱정으로 가득 찬 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건강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습니다. 록펠러의 전기를 썼던 존 윙클러에 따르면 53세의 그는 “미라처럼 보였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때 그는 알로페시아(alopecia)라는 희소 질환으로 1년 시한부 인생을 통고받았습니다. 윙클러에 따르면,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한때는 모유만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본래 록펠러는 건강 체질이었습니다. 농장에서 자랐기에 강인한 어깨, 꼿꼿한 자세, 힘차고 활달한 걸음걸이를 갖췄습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일, 끝없는 걱정, 끊이지 않는 비난, 불면의 밤들, 운동과 휴식 부족”이 커다란 타격을 입혀서 결국 그를 주저앉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음식을 먹을 수 없어 일주일에 백만 달러를 벌었지만, 식비는 2달러도 지출하지 않았습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비록 십일조를 하고 기도하고 교리 교사 봉사하더라도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익이 생겼을 때는 모자를 바닥에 던지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지만, 손해를 보면 곧바로 병이 났습니다. 돈의 노예였던 것입니다. 

  

    한번은 오대호를 거쳐 4만 달러어치의 곡물을 실어 나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곡물에 보험을 들지 않았습니다. 150달러 정도의 비용이 추가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이리호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파트너였던 조지 가드너가 아침에 사무실로 가보니 록펠러는 화물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가 가드너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너무 늦은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보험을 들 수 있나 알아보게. 어서 빨리!” 

 

    가드너는 서둘러 도시 외곽까지 달려가 보험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록펠러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그사이 화물이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전보가 온 것입니다. 록펠러는 150달러를 낭비했다는 이유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결국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한 해에 5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벌던 그가 자기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데 쓰이는 150달러를 아까워했다는 말은 그가 진정한 신앙인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즐거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근심과 걱정, 두려움 속에서 돈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죽는 게 두려웠는지 신앙생활은 열심히 했지만, 그 신앙이 그의 감정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감정을 바꾸지 못하는 신앙은 거짓 신앙입니다. 

    나중에 한 아이에게 수술비를 지원해 주며 이후 40년을 더 살게 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는 그의 신앙이 그의 감정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음이 확실합니다. 그러니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감정을 바꾸지 못하는 신앙은 가짜입니다. 

  

    오늘은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축일입니다. 셋은 형제입니다. 라자로의 죽음으로 마르타는 예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에도 자신만 일하며 동생은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마르타의 근심을 덜어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이 믿음이 마르타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오빠가 죽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하였을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당연히 우리 감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걱정, 근심, 두려움, 불안이 사라지고 감사와 기쁨과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아직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닙니다. 성당에서 나갈 때 우리 감정을 살펴봅시다.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미사를 의미 없게 한 것입니다. 

  

    한 소녀가 산길을 걷다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버둥대는 것을 발견하고는 가시덤불을 제치고 들어가 거미줄에 걸려있던 나비를 구해주었습니다. 나비는 춤을 추듯 훨훨 날아갔지만, 소녀의 팔과 다리는 가시에 찔려 붉은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멀리 날아간 줄 알았던 나비가 순식간에 천사로 변하더니 소녀에게 다가왔습니다. 천사는 자기를 구해준 은혜에 감사하면서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천사는 소녀의 귀에 무슨 말인가를 소곤거리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소녀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결혼해서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도록 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녀를 사람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우러러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예쁜 소녀가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할머니가 죽기 전에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웃으시며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소녀였을 때 한 나비 천사를 구해 준 적이 있지, 그 대가(代價)로 천사는 나를 평생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 주었어…. 그때 천사가 내게 다가오더니 내 귀에 이렇게 속삭이는 거야. ‘구해주어서 고마워요. 소원을 들어 드릴게요. 무슨 일을 당하든지 감사하다고 말하면 평생 행복하게 될 거예요.’ 그때부터 무슨 일이든지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더니 정말 평생 행복했던 거야. 사실 천사가 내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니야. 누구든지 만족한 줄 알고 매사에 감사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이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할머니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이 가득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을 만났습니다.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상처를 지니고 계셨지만 분명 살아계셨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 미래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쁨과 열정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을 만난 이의 모습입니다.

  

    우리 감정을 바꿔놓지 않는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이 우리 감정을 바꿀 수 없다면, 그것도 지금 당장 바꿀 수 없다면 기도는 헛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 성체를 영하는 순간 기쁘고 행복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의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아직은 부활이요 생명으로 만난 것이 아닙니다. 기분을 바꿔주지 못하는 건 신앙이 아닙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diw6HiEbGKg

 -조재형신부-

 

시편 8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성서는 그 이유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세상 모든 존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그러나 인간은 하느님께서 몸소 행위로 창조하셨습니다진흙으로 사람의 모습을 만들었습니다물론 하느님을 닮은 모습입니다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인간에게는 하느님의 본성이 담겨있습니다다른 모든 존재는 창조되면서 본능에 의해서 살아갑니다그러나 인간에게는 하느님께서 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그 숨은 예술과 문학을 할 수 있는 감성의 숨입니다역사와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지성의 숨입니다영원과 영생을 꿈꾸는 오성의 숨입니다다른 모든 존재는 태어나고늙고병들어 죽으면서 생을 마감합니다그러나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생로병사의 을 벗어 날 수 있습니다우리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입니다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는 가족입니다마르타는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고 음식을 장만하였습니다마리아는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라자로는 죽었지만 예수님의 권능으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그리고 죽음의 저편으로 건너갔던 라자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라자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습니다우리가 주님을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다면 그 주님의 권능으로 우리는 살아서도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라자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려내신 성자께서 복된 마르타의 집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셨으니 저희도 형제들 안에서 성자를 섬기며 마리아와 함께 성자의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정말 근사하지 않습니까? 죽어도 죽지 않는 삶!

 -양승국신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정점(頂點)이라고 한다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사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지금 행하는 모든 신앙 행위나 신심 활동은 즉시 무의미해집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 삶도 즉시 빛을 바래며, 희망이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런 기대나 희망이 없는 삶, 얼마나 무의미하고 지루한 삶이겠습니까?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아도 진정 살아있지 못한 삶, 사나 죽으나 그게 그것인 삶, 참으로 불행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물리치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심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도 희망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고, 기대와 설렘이 생겼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따라 부활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불멸의 힘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활 신앙의 부재와 결핍으로 인해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 잘 견뎌내면 또 다른 세상이 반드시 존재하는데, 힘겹겠지만 잘 극복하고 기다리다 보면 상상을 초월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텐데, 그것을 못 기다립니다. 중도에서 포기하고 딴 길로 걸어가 버립니다.

  

부활하신 주님 덕분에 우리도 언젠가 죽겠지만, 결코 죽지 않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장 25절)

  

정말 근사하지 않습니까? 죽어도 죽지 않는 삶, 이번 생이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 이 세상 잘 견뎌내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상상을 초월하는 풍요롭고 충만한 또 다른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톨릭 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 교리이자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석인 부활 사건 앞에 별 감흥이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 부활 사건 앞에 밋밋한 사람들, 심드렁한 사람들, 대체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신앙생활이 타성에 젖어서 그렇습니다. 신앙에도 뼈를 깎는 쇄신 작업이 필요한데, 그러한 고통스런 과정을 외면해서 그렇습니다. 아무런 투자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 보답은 당연히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이란 당신 인생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십자가 죽음이란 고통스런 과정을 거치셔야 했습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십자가 길을 끝까지 인내하며 순명하며 걸어간 그 결과가 영광스런 부활이었습니다. 결국 십자가 없이 부활의 참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극복 없이 부활의 영광은 없습니다.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니 예수님 부활을 온몸으로 느끼고, 예수님 부활의 영광에 깊이 참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매일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기쁘게 참아내는 사람들, 자신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 시련이 다가올 때 마다 예수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매사에 극도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에게서 예수님 부활은 정말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매일 죽는 사람들, 특히 자신의 죄에서 죽고, 이기심에서 죽고, 교만한 마음에서 죽고, 용서 못하는 마음에서 죽는 사람들에게 부활 예수님께서 주실 은총을 정말 클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진리이자 교리인 부활 신앙,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에 대한 이해가 아주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매일 제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사람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에 담긴 의미를 깊이 헤아리는 사람들, 그 십자가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 그 십자가를 통해 부활과 영생, 구원으로 넘어감을 굳게 믿는 사람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순명하는 사람들,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신앙은 절대로 어려운 교리가 아닐 것입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성녀 마르타와 마리아와 성 라자로를 기념하며, 복음을 통해 부활의 믿음에 대한 초대를 받습니다.

그것은 '나는 안다'에서 '나는 믿는다'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찾아오십니다.

마르타가 집밖으로 뛰쳐나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 11,21)

 

이 인사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마르타의 원망과 섭섭함이 묻어납니다.

마치 오빠가 죽은 이유가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럴 법도 할 것입니다.

임종 때에도, 장례식 때에도 오시지 않고, 사흘이 지나서 이제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섭섭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께 대한 확신에 대한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하느님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요한 11,22)

 

그러나 그분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압니다'(οιδα)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πιστιω)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요한 11,23).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3) 하고, 또 다시 '압니다'라고 고백할 뿐 여전히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6)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내가 부활과 생명을 너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믿을 때라야 그 믿음 안에서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활과 생명은 믿는 이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이들은 그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이미 소유하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비록 이 땅에서는 육체적인 죽음을 겪을지라도 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게 됩니다.

 

마침내 마르타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요한 11,27)

그렇게 하여 마르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믿음에 대한 확증을 일깨워줍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요한 11,40)

 

오늘 독서에서도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1요한 4,16)

 

주님!

오늘 저는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알고 믿습니다.'

하오니 오늘 제가 당신의 생명(부활)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6)

 

주님!

부활을 믿게 하소서!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마침내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아멘.

「주님께 대한 사랑고백은 삶으로 해야한다 」

 -반영억신부-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꼭 말을 해야 하느냐?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일(루카10,40)에 있어서도 그랬고, 오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하며 오빠를 구지 낫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특별한 개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핏줄인 라자로를 살려내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고 여전히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기 전에 함께 계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이 현재 사건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오늘로부터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지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의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할 것은 ‘믿었습니다.’의 고백이 아니라 ‘믿습니다.’하는 현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술에 익숙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히브11,6)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루치아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예이며 또 하느님께 받은 최대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도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만큼 사랑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고백은 말로나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영원한 생명』

 -송영진신부-

 

믿음 없는 사람들의 장례식은 ‘죽은 이들의 죽은 예식’입니다(마태 8,22).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안 믿는 사람들은 죽으면 끝나버릴 짧은 인생을

잠깐 동안 사는 것뿐이니 ‘죽은 이들’일 수밖에 없고, 죽은 이들의 장례식은

인생을 끝내는 일이 될 뿐이니 ‘죽은 예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 신앙인들의 장례 미사는

‘살아 있는 이들의 살아 있는 예식’입니다.

신앙인들은 영원한 생명이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믿고 있고,

그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면서 동시에 지금 그 생명을 누리고 있으니

‘살아 있는 이들’이고, 신앙인들의 장례 미사는 지상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예식이니 ‘살아 있는 예식’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세속 장례에서는 상실감과 허망함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장례에는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고 있어도,

신앙인들도 사별의 슬픔과 아픔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나서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본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부족해서 슬퍼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있어도 슬픈 건 슬픈 거고, 아픈 건 아픈 겁니다.

그래도 신앙인들은 믿음과 희망으로 그 슬픔과 아픔을 극복합니다.

마르타는 슬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마르타의 신앙고백의 내용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요한 11,21-24).”

 

마르타가 바란 것은 오빠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병든 오빠가 죽지 않고 건강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 알렸고(요한 11,3),

예수님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마르타는 왜 그렇게 예수님께서 늦게 오셨는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이라는 말은,

마르타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원망이나 서운함이 들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무엇인가를 해 주시기를 바라는 말인데,

마르타가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뒤의 39절에,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라는

마르타의 말이 있기 때문에,

죽은 라자로가 살아나서 무덤 밖으로 나오기를 기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마르타는 죽은 라자로가 틀림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확인해 주시기를, 또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시기를 청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종말의 부활을 뜻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지금’ 당신이 라자로를 살리시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가시기 전부터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이미 작정하고 계셨습니다(요한 11,11).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당시 유대교 신자들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사두가이파는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했고,

바리사이파는 그것을 다 인정했습니다(사도 23,8).

일반 신자들은 대체로 바리사이파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 생각하는 ‘종말의 부활’은,

우리 교회의 부활과는 여러 가지가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부활이라고 생각했고,

부활하면 곧바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는 심판을 받기 위해서 일단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되고, 심판 때에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들만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두 번째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묵시 20,11-1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5-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을 부활시키는 권한과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라는 말씀과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믿는 대로 충실하게 산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는 “나의 말을 믿어라.”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라는 마르타의 대답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이신 분”이며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마르타의 신앙고백은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마태 16,16)과

같은 가치가 있는, 중요한 신앙고백이고, 그래서 마르타는 우리 교회에서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지금의 우리의 생명은 불완전하고 연약해서,

너무 쉽게 다치고 깨지고 병들고 끊어집니다.

그러나 부활 후에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생명이어서, 부족하거나 약한 점이 하나도 없고,

그래서 다치고 상처받고 병드는 일이 전혀 없는 ‘완전한 생명’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 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