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그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능력이
어디서 솟아나겠느냐?
(마태오 14,1-12)
"This man is John the Baptist.
He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that is why mighty powers are at work in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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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신을 사형에 처하려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보내시어 말씀을 전했다고 밝힌다. 예레미야는 아히캄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한다(제1독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생일에 춤을 춘 헤로디아의 딸이 청해서 목을 벤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여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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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린아이가 부모를 따라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을 보았는지 소리 내 웃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 입을 막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성당에서는 웃는 것 아니야.”
지난 부활 대축일 미사 때였습니다. 미사에 오신 신자들을 향해 밝게 웃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신자들 역시 “축하합니다.”라면서 인사했지만,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부가 인사하니 마지못해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앙의 핵심인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큰 슬픔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분이 다시 살아나서 내 앞에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깜짝 놀람과 동시에 큰 기쁨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부활에 큰 기쁨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실감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당에서는 웃는 것이 아니라는 암묵적 암시에 걸려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남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 눈치를 보면서 웃어야 할 때도 웃지 못하고, 울어야 할 때도 울지 못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신앙인은 세상 눈치를 보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을 살피면서 그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헤로데 영주가 헤로디아의 농간에 농락되어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자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기는 했지만, 의인으로 생각하면서 함부로 하지는 못했지요. 그러나 자기 생일잔치에 헤로데의 고관들과 갈릴래아의 내노라는 인사들이 초청된 자리에서 기분이 너무 좋아 헛된 맹세를 합니다. 어떤 청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맹세였습니다. 이때의 청이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군주가 손님들을 초청해서 화려한 잔치를 벌이는 것은 그들에게 자기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예수님의 소문에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고 하면서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나바테아 왕녀를 소박한 것이 빌미가 되어 나바테아 왕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게 되었고, 전쟁 패배로 인해 로마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가서 죽게 됩니다.
세상의 눈치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를 살피면서 그 뜻에 맞게 열심히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눈치는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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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과 정(情)과 흥(興), 역사의 원동력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7iuhTy4pRY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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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조선이 잃어버린 두 가지 기술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 두 가지 기술은 이웃나라인 일본에 전해졌고,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으로 드러났습니다. 첫 번째 기술은 ‘은 제련법’입니다. 연산군 당시에 단천에 은광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술자들은 납과 섞인 은을 추출하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연산군은 그 방법을 장려하였고, 그렇게 조선은 은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연산군은 폭정으로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연산군이 행했던 모든 정책들도 적폐라고 생각하여 없앴습니다. 그렇게 은 제련법은 조선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 제련법이 일본으로 전해졌습니다. 일본은 그렇게 배운 은 제련법으로 막대한 양의 은을 생산하였고, 그 은으로 신식무기인 조총을 구입하였습니다. 그렇게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켰습니다. 조선이 은 제련법을 계속 이어갔다면 역사는 다르게 전개 되었을 거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도자기 기술입니다. 임진왜란의 결과 일본, 조선, 명나라는 국력이 소진되었습니다. 당시 가장 이익을 본 나라는 따로 있었는데 막 시작한 청나라입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명나라는 도자기를 생산하여 유럽으로 수출하였습니다. 그런데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유럽 사람들은 새로운 도자기 생산지를 찾게 되었습니다. 당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명나라와 조선이었습니다. 성리학을 정치의 근간으로 삼은 조선은 도공들의 기술을 천시하였습니다. 전쟁과 가뭄으로 화려한 도자기의 생산을 금하였습니다. 도공들은 도자기를 만들이 못해서 궁핍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도공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도공들에게 집을 주고, 돈을 주면서 도자기를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일본으로 넘어간 도공들은 일본에 도자기 기술을 전해 주었고, 그렇게 배운 도자기 기술로 일본은 명나라를 대신해서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도자기를 팔아서 번 돈으로 일본은 군함을 샀고, 도자기의 제련 기술을 응용하여 제철산업을 일으켰습니다. 군함과 대포로 무장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고, 아시아를 침략하였습니다. 조선이 도공을 잘 대우하고, 도자기를 만들어 유럽에 수출했다면 역사는 또 다르게 변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허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대면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동굴 속에서 보이는 희미한 빛은 진리가 보여주는 여명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굴 밖에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듯이, 우리의 삶은 진리를 향한 여정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에 시련과 아픔, 좌절과 고통은 이겨낼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신화, 종교, 철학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분명한 법칙과 질서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소리, 영적인 세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수학, 과학, 경제는 이런 사고의 틀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세상은 특정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원자들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법칙과 질서를 알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인간 중심의 세상이고,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이 보입니다. 수치화된 디지털의 세상에서는 인격과 도덕, 사랑과 우정이 자리할 틈이 별로 없습니다. 이윤의 창출 앞에는 환경의 파괴도, 전쟁도, 폭력도 용인되는 상황입니다.
공자께서는 성숙한 인간의 나이테를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지학,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의 나이테를 말하였습니다. 학문을 배우고, 뜻을 세우고, 의혹이 없으며, 하늘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 어떤 일을 해도 그르침이 없는 삶입니다. 제 나이가 60이 되었는데, 아직은 세상이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유혹이라는 바람 앞에 늘 흔들리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졌지만,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헤로데는 하늘의 뜻을 몰랐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하였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하늘의 뜻을 알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나이테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삶에로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마치 여명의 눈동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살려준 사판의 아들 요아킴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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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하고 고독한 현실,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양승국신부- 주변을 둘러보면 참으로 이해가지 않는 측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악이란 악은 다 저지르며 살아가는 사람들!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못한 것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들,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들, 이웃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발 벗고 나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초가 참혹할 정도입니다. 이토록 공정하지 못한 현실을 신앙인으로서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까? 오직 하느님의 메시지만을 선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의인들이 이 세상에서 받고 있는 박해와 십자가 길, 그리고 억울한 죽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죄한 이들과 선인(善人)들의 고통과 시련은 또 어떻습니까? 예레미야 예언자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청소년 시절에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소명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유다의 왕과 고관대작들, 당대 권세가들에게 ‘인생 그렇게 살지 말고 제대로 살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던지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미야서 15장 10절)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또 어떻습니까?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처럼 구약시대를 종결짓는 마지막 예언자이자 예언자중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마지막 대예언자의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덧없는 죽음입니다. 그의 목은 베어져 요부(妖婦) 헤로디아의 쟁반 위에 올려 집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예언자로서의 삶과 죽음의 본모습인 듯합니다. 어느 정도 쓸쓸하고 아쉽고 드러나지 않는 삶과 죽음, 자신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주인공이신 주님을 빛내게 해주는 존재로서의 삶과 죽음이 곧 예언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무척이나 신산하고 을씨년스런 삶, 씁쓸하고 고독한 현실,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그것이 참 예언자로서의 삶이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이 대단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예언자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너무나 괴로울 때는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항상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분의 뜻을 찾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또 다른 예언자들인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이 보다 가난해지도록, 그들이 좀 고독해지도록 도와줘야겠습니다. 그들이 갖출 것 안 갖출 것 다 갖추고 떵떵거리며 산다면 그것처럼 예언자로서 부끄럽고 비참한 삶이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예언자로 산다는 것,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박해받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일, 사회 정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외치는 일, 남들이 마다하는 선행과 봉사를 실천하는 일,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볼 때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 손해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 일, 그 일을 하고 계신다면 제대로 된 예언자의 삶을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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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데를 억누르려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을 바로잡으려고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부도덕한 이들은 덕을 달가워하지 않고, 거룩함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은 정결함을 보면 참지 못하고, 방종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를 못합니다.
인정 없는 자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은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나약한 헤로데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오고, 그 반대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으며,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기 죽음을 허용하고 의로움을 이룹니다.
또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왕관이 됩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따르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릅니다.
악인의 혀는 거짓을 꾸미며 속임수를 쓰지만, 의인의 혀는 진실을 말하고, 악인의 혀는 불의를 증언하는 반면에,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증언합니다.
악인의 혀는 자신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침해하지만, 의인의 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줍니다.
결국 폭군의 혀는 의인의 피를 부르고.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외칩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며,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요한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마침내는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사실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고,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표현한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의로움으로 울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성령의 불혀가 되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이 한 몸을 태워 세상의 어둠을 태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마태 14,4)
주님!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제 뼈 속에 새겨진 진실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힘으로 짓눌러 가라앉힐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혀는 멈추어도 결코 멈추지 않는, 목이 베여도 결코 베어지지 않는, 살아있는 말이 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 혀가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눈물 흘리는 이들의 소리를 듣고 울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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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헤로데에게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마태 14, 4)
-한상우신부-
올바른 삶은
우리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가져다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견디고
지켜나가는 이들의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의 열매가 된다.
어중간한 삶을
아프게 반성한다.
문제의식은
너무 무디고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너무 너그럽다.
명백한 과오를 통해
삶을 교정하고 과거의
악순환을 멈추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도리이다.
진리는 아무래도
숨겨지지 않는다.
요한 세례자가
등장한다.
그는 진리로
삶을
이야기한다.
양심을 깨우고
정의의
목마름을 외치고
이기(利己)와 무지를
꾸짖는다.
우리 시대를
바로 보는 것이
예수님을 바로 보는
신앙인의 사명이다.
새로운 삶은
이와같이
어디서 한순간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고 각오와 결심
실천을 통하여
일으켜 지는 것이다.
일으켜 지는 정신이
우리모두를
건강한 삶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올바른 삶은
작은 길도
선명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만든다.
진정한 회개를
다시 품게하는
요즈음이다.
진리이신 주님과
가까워지는 삶인지를
자문하여 본다.
환상적인 만남이
아니라 진실한
만남이 중요하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달라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가치는 우리자신의
진실한 회개이다.
진실한 회개가
우리 시대의
참된 좌우명이 됨을
믿는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순간이
회개의 순간이며
회개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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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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