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31일 연중 제18주일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13-21)
"Be on your guard
and avoid every kind of greed,
for even though
you have many possessions,
it is not that which gives you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코헬렛의 저자는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하고 말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탐욕을 경계하라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시고,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신다(복음)
돈을 쓰는 방법에 따라 그 결과는 다릅니다.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사용하였다면 영원한 생명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부자가 되는 것에 투자를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것입니다.
욕심은 사람을 조급하게 합니다. 이솝 우화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선 인간의 욕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가난한 노인이 창문 옆 의자에 걸터 앉아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 때, 낯선 사람이 들어와 “이 거위를 잘 돌봐준다면 거위가 당신을 도와줄겁니다”라고 말하며 사라집니다. 그는 거위에게 모이를 주고 깨끗한 새장도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거위는 황금 알을 낳았고 농부는 황금알을 시장에다 팔아 부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고마운 거위라고 생각하고 매일 알을 낳기를 기다렸지만 어느 순간 욕심이 생겼습니다. 배 속에 있는 모든 황금알을 꺼내기 위해 배를 갈랐는데 그 속에는 보통 거위와 다를 바없는 붉은 피와 내장만 쏟아질 뿐이었습니다. 서둘러 거위 배를 다시 꿰매며 제발 꿈이기를 빌었지만 이미 거위는 죽은 후였습니다.
우리의 욕심도 이렇습니다. 조금만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 결과를 알 수 있지만 욕심이 사람의 인지 능력을 마비시켜 머리속을 온통 비워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복음 속 부자는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자 ‘수확한 모든 곡식과 재물을 넣어 둘 큰 곳간을 짓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이제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전쟁에서 죽은 장교의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주님, 저는 무한하신 주님께 의탁한 몸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거두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죽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 온전히 주님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주님, 고통에서 도망치기 위해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더 오래 일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주님, 제발 저에게 힘을 주소서. 아멘’
주님의 아들로 성실한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의 죽음은 언제나 가슴을 울립니다. 그들은 언제나 주님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온전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기다리시는 천국에서 이미 늦었음에 당황하지 않도록 이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는 온전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본인에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고 누가 돈과 명예를 쫒고 있다면 그 사람을 금권주의자라고 말할 것이고, 세상의 부를 위해 너무 많은 노력을 하지 말라고 충고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러한 기회가 온다면 과연 나는 그들과 다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물질과 향락을 추구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저희는 살기 위해 그것들이 꼭 필요합니다. 그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기 위해 필요한, 그 작은 것들을 쫓다보면 어느새 진정한 삶의 목표인 하늘나라로 가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것 조차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또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쫓아가느라 소외된 사람들과 불의의 희생자들을 지나칩니다. 부를 쫓다보니 내가 가는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냥 앞으로만 가고 있습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제 마음 속에 계신 성체이신 주님, 저에게 진정한 부의 가치를 깨닫게하시고 물질에 얽매이지 않은 삶, 하느님 나라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창고를 가득 채워 고귀한 삶을 살아가야함을 일깨워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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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유로운 삶을 위해 꼭 필요한 부는 어느 정도 필요합니까?
2. 그리스도인에게 돈과 재산은 어떤 의미입니까?
3. 다음 내용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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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곳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까? 지금 부족할 때 나눔을 하는 것이 하늘나라의 곳간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미 가득 채웠을 때는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로 나의 이웃에게 작은 나눔을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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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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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이 계속되는 날이 있습니다. 좋은 일만 계속되면 좋겠지만, 나쁜 일이 또 연달아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운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불운과 행운은 크게 차이 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말 한 마리가 달아났습니다. 사람들은 불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이걸 왜 불운이라고 하지?”라고 말했고, 실제로 그 말은 며칠 뒤에 야생마 한 마리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들 행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농부의 아들이 야생마를 길들이겠다고 탔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불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군인들이 전쟁에 징집하러 들이닥쳤습니다. 다친 아들은 전쟁에 나갈 수가 없었지요. 그러자 이웃 사람들은 “정말 행운아예요. 아들은 징집되지 않았으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불운을 불운으로 받아들이면 계속된 불운이 찾아올 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에게 말해야 합니다.
“불운이라며 화를 내면 상황만 더 나빠질 뿐이야. 이미 일어난 일이야. 여기서 최선을 다하면 돼.”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불운인지 행운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처한 상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할 일을 찾아야 전혀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부자가 된다고 해서 행운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돈이나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그보다 더 귀중하고 높은 가치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이야기해주시지요.
그는 수확한 것을 모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소출을 거둡니다. 그에 대한 어떤 비판도 없는 것을 볼 때, 성실하게 일해서 부유함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당하게 모은 재산이라도 여기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수확한 것을 모아 둘 곳이 없으면 옆에 모아 둘 새로운 곳간을 지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는 기존의 곳간을 헐어 내고 더 큰 곳간을 짓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재물을 낭비하는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잉여 곡물을 이웃을 돕는 데 쓰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만을 위한 마음으로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 재산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하게 하는 불운으로 이끌 뿐이었습니다.
진정한 행운아가 되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코헬렛서에서 말하듯, 인간의 모든 것은 허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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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가질수록 더 불안해지는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oI1-m3D5rRg
빅뱅의 지 드래곤은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춤 실력과 랩 실력으로 지금까지 꺾이지 않는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는 가수입니다. 아마 청소년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화려함 이면에는 외로움과 공허함이 가득합니다. 한국 콘서트와 일본에서 진행한 지 드레곤 인터뷰의 요약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덕분에 너무 좋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상당히 어릴 적부터 꿈이었고, 계속해서 쉼 없이 달려오다 보니까 제가 지금 꿈속에서 살고 있다는 기분이 너무 좋은데, 뭐가 꿈인지 현실인지 잘 모르겠는 그런 기분이 가끔 들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뭐가 현실이고 뭐가 꿈인지, 그런 것이 헛갈리는 순간이 엄청 많이 와요. 방송적으로 잘 안되는 것들도 다 경험해 봐야 하는 것들인데 너무 좋은 경험만 하고, 계속 좋은 인생을 살아와서…. 어…. 미쳐가는 것 같아요. 외로워요. 많이 외로워요. 그냥 인생이 너무 외로워요. 그러니깐 화려해서 너무 외로워요.
며칠 전에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다가 제가 스스로 편지를 쓴 적이 있는데 제가 조금 읽어드릴게요. ‘잘하고 있고, 다 잘 될 거야, 니가 그렇게 만들고 있어. 그런데 너도 좀 쉬어라. 널 위해 살아. 니가 없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아, 다 알아서 돌아가는 거니깐. 자연을 보렴. 인간은 정말 작은 존재란다. 오버하지 말고, 일단 올해만 버텨보자.’”
4개월 동안 진행된 월드 투어가 끝난 이후 그는 갑자기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켭니다. 원래 라이브를 하는 사람도 아니었던지라 팬들은 매우 의아했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콘서트가 끝나고 오랜만에 한국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고 외로워서 라이브를 켰어요.”
이는 지 드래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 전 BTS도 데뷔 9년 만에 잠시 쉬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전엔 음악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짜내야 하는 삶에 너무 지친 것입니다. 단체 활동 잠정 중단을 선언하며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게 맞나? 싶어 무섭기도 하고 정답인지 고민이 많았어요. 내가 쉬고 싶다고 하면 미워하실까 봐 사실은….”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형이 유산을 가로챘다고 자신에게도 좀 나누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돈을 갖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며 부자의 비유를 해주십니다. 부자가 곡식을 두기 위해 곳간을 확장하지만 결국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며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예수님은 모든 탐욕은 결국 생명을 유지하려는 마음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욕구는 ‘생존 욕구’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는 게 두려워서 돈을 모읍니다. 그러다 돈이 많으면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돈은 죽음과 함께 썩어버립니다. 돈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돈과 쾌락과 명예는 가지면 가질수록 공허하게 합니다.
예전에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작업하는 인부들이 작업 중 추락하여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큰돈을 들여 아래에 그물망을 설치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에도 떨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인부들이 떨어졌던 것은 생존을 월급에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이 생명을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생존을 책임져주는 그물망이 있으면 오히려 돈도 더 잘 벌립니다.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할 것은 그물망이지 돈이 아닙니다. 돈에 의지할수록 그물망이 필요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물망을 설치하기 전까지는 돈을 많이 받을수록 더 불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그물망 앞에서 돈을 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만 의지하면 돈은 저절로 오게 됩니다. 안 오더라도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게 이젠 생존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놀이가 됩니다.
그런데도 세상 대부분은 예수님께 나아오면서도 아직도 재물에 의존하고 그런 것을 청하러 옵니다. 영원한 생명을 책임져주실 분 앞에서 단 몇 년을 책임질 재물을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만 원만 달라고 하며 부모는 그런 역할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 자체가 안전망입니다.
김준호 씨는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과에 진학하여 공부하다가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복무 19개월이 되던 10월 어느 날 부대에서 관물대 위에 올라가 물건을 정리하다가 실수로 땅바닥에 떨어져 크게 다쳤습니다. 척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경추를 크게 다쳐 전신마비 환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적인 신체장애를 탓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그러자 입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는 네 가지가 감사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내가 전신마비 환자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고 믿게 된 것이 무엇보다 감사하고, 둘째는, 군대에서 다쳤기 때문에 치료비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셋째는 원호병원에 입원하는 중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는데, 아내는 그때 병원의 실습생이었습니다. 넷째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구필화가(입으로 그리는 화가)가 된 것이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인당이라는 화명으로 붓을 입에 물고 글씨나 그림을 그렸고, 1981년도에는 세종문화회관 전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감사가 아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일단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 감사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줄 안전망을 만났을 때 나옵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지 맙시다. 그런 것들은 다 생존을 위해 내가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의존할수록 공허하고 불안하고 외로워집니다. 우리는 그런 공허함의 늪에 빠지며 인생을 허비하지 않도록 영원한 생명의 안전망을 쳐놓고 살 수 있어야겠습니다.
-조재형신부-
로마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키케로는 인생을 망치는 6가지의 잘못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남을 깎아내리면 자기가 올라간다고 착각하고, 바꾸거나 고칠 수 없는 일을 고민하고 걱정한다. 어떤 일을 자기가 이룰 수 없으니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하며, 사소한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한다. 생각의 발전과 진보를 무시하며 독서하고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강요한다." 2000년 전에 한 이야기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대서는 임금님도 욕할 수 있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남을 험담하고, 시기하고, 깎아 내리는 것에 익숙해져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머 특별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 시기와 질투로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94%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걱정이라고 합니다. 40%의 걱정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걱정이고, 30%는 지난 일에 대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4%는 천재지변과 같이 어쩔 수 없는 걱정이고, 4%만이 의미 있는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런 걱정 때문에 지금의 기쁨이 연기처럼 사라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야단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지 않으면서 남들도 못하게 막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에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라라.’고도 하셨습니다.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너는 그것을 빼앗지 못한다.’ 하늘에 있는 달을 보라고 하는데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처럼 작은 것에 매달려서 참된 진리를 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쳤던 사람들,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던 사람들, 예수님을 조롱했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틀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의 규정과 율법을 절대시하던 시대에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던 시대에 안식일의 정신을 알려주셨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참된 행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온유한 사람, 지금 슬퍼하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새 술’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의지는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날개가 되기도 하지만, 그 자유의지는 우리를 끊임없이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날개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을 속박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 병자를 고치는 능력, 복음을 선포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파견하였습니다.
남을 깎아내리면 스스로 올라간다는 적자생존의 착각을 깨닫고 스스로 낮은 곳을 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걱정도 팔자라 바꾸거나 고칠 수 없는 일이라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한 걸음 내 딛으려고 고심 끝에 노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이룰 수 없으니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위대한 착각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있으며, 사상의 진보를 위해 오늘도 진리를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나를 따르라는 구호 아래 모이지 않고 홀로 옳은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함께 합니다. 나의 삶이 인생을 망치는 삶인지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삶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욕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가치 있는 것을 찾도록 합시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참혹한 고통과 슬픔 역시 잠시뿐입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세 개의 독서들은 우리를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이탈과 초월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인간만사 세옹지마라는 것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참혹한 고통과 슬픔 역시 잠시 뿐이라는 것.
그러나 깨지기 쉬운 질그릇같이 나약하고 연약한 우리, 이 세상 모든 것은 유한하다는 영원불멸의 진리를 자주 망각하는 우리이기에, 또다시 작은 것에 연연하고, 별것 아닌 것에 집착하며,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목숨을 걸며, 그렇게 쫌생이처럼 팍팍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코헬렛의 저자는 반복해서 외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렛 1장 2절)
바오로 사도는 허무하고 유한한 이 세상에 목숨을 걸지 말고 또 다른 세상, 저 위의 세상을 희망하고 추구하라고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새서 3장 1절)
루카 복음 사가 역시 오로지 지상 재물의 축척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우리에게 강력한 회심을 촉구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복음 12장 15절)
천천히 코헬렛을 읽다 보면 열심히 한번 살아보겠다는 사람들에게는 ‘김새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인생 뭐있어? 적당히 즐기는 거야”라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하면서 읽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본 현자였습니다. 인생의 높은 정상에도 올라봤지만 가장 밑바닥까지 체험했던 인생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풍부한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생 길어봐야 80년, 90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난다 긴다 하더라도 세월 앞에, 죽음 앞에 장사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깔깔 대고 웃고 즐기지만,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는 것,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으면 기뻐 뛸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기뻐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슬퍼하지도 말며 그저 주어지는 순간순간에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오늘 하루를 만끽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젊음도 권력도 재물도 결국은 다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갈 대상들이니 너무 집착하지도 말고 너무 아쉬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하신 분, 세세대대로 인간 만사를 다스리실 분, 우주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 내어 맡기고 편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큰 부자되십시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들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또 받은 것을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유욕은 인간이 물질을 통해 자기 존재를 공간적으로 확대하려는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 욕심은 만족시켜 주면 시켜줄수록 더해집니다. 더 많이 지배하고 싶은 마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소유하고 지배하는 마음은 결코 만족을 모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기보다 오히려 소유 당하고 지배당하게 됩니다. 물질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 참으로 사람을 빈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베푸는 마음은 베풀면 베풀수록 마음을 부유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도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남에게 베푸는 것에서 만족한 삶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또 그것에 애착을 두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또 가진 것이 적더라도 그것에 애착하고 손에 넣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역시 부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자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알베리오네 신부). 그들은 세상의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들은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주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꼭 들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창세기26장 12절-13절에 보면 “이사악은 땅에 씨를 뿌려, 그 해에 수확을 백배나 올렸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복을 내리시어 그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점점 더 부유해져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 축복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소유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수단이 됩니다. “네 재물과 네 모든 소출의 맏물로 주님께 영광을 드려라. 그러면 네 곳간은 그득 차고 네 술통은 포도즙으로 넘치리라”(잠언3,9) 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축복으로 부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 영광을 드림으로써 곳간을 그득 채울 수 있는 큰 부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재물은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재산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창세기 13장 6-7절에는 재산이 너무 많아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잦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과 소와 천막이 넘쳐 났지만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습니다. 재산이 없어도 문제이지만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시편52,7-9에서는 재산이 많으면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를 천막에서 잡아채고 끌어내시어 생명의 땅에서 너를 없애 버리시리라. 의인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그를 비웃으리라. 보라, 하느님을 제 피신처로 삼지 않고 자기의 큰 재산만을 믿으며 악행으로 제가 강하다고 여기던 사람!”
바오로 사도도 말합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으로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6,9-10)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송영진신부-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3-15)”
‘어떤 사람’이 한 말만 보면, 그 사람의 형이 유산을 가로챈 것으로 보이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어느 한쪽만의 잘못이 아니라,
양쪽 모두 유산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심을 품고서,
서로 다투는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라는
말씀은, 중재를 거절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형과 동생이 모두 잘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세속 일을 해결해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인간들의 영혼을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유산 상속 문제로 형제가 다투는 것은 ‘세속 일’이고,
‘죽은 자들의 죽은 일’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직접 대답하려고 하셨다면
아마도 “둘 다 회개하고, 화해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한쪽만 회개하고 욕심을 버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러면 회개한 쪽이
물질적으로는 손해를 보겠지만, 영적으로는 크게 앞서게 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는 “회개하여라.”입니다.
내가 ‘내 몫’을 차지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이기심’으로 살면서, 세속의 재물을 차지하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일이고,
옳지 않은 일이고, ‘헛된 일’입니다.
(세속의 기준으로 ‘정당한 것’과 하느님의 기준으로 ‘옳은 것’은 다릅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부자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6ㄴ-19)”
여기서 ‘어떤 부유한 사람’은,
원래 부자였는데, 농사가 잘 되어서 더 큰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가 큰 부자가 되는 과정에서 무슨 죄를 지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부자가 된 후에 드러나는 그의 어리석음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그의 고민은 자기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새 곳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바로 그런 사람들을 겨냥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태 6,19-20).”
그 부자는 자기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싫어하고,
빼앗기는 것은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어떻든 그는 ‘더 크고 안전한 곳간’을 새로 짓는 것으로 고민을 해결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재산을 빼앗아가는 일만 생각했고,
하느님께서 되찾아 가신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라는 그의 말은,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라는 말은, 세 번째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영혼 구원’은 생각하지 않고, ‘몸의 쾌락’만 찾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0-21).”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인간의 목숨은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되찾아 가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죽음’은 목숨을 잃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돌려드릴 때 ‘좋은 것’으로 돌려드릴 것인지,
나쁘게 망가진 것으로 돌려드릴 것인지, 그것은 각자에게 맡겨진 숙제입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지금 당장’이 아니라 ‘오늘 밤에’ 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말씀은,
“아무도 그것을 차지하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에게만 소유권이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은,
“이웃에게 인색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 집회서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같은 말이 나옵니다.
“애를 쓰고 인색하게 굴어서 부유해지는 자가 있는데, 그에게 돌아갈 몫은
이러하다. 그가 ‘나는 휴식을 얻게 되었으니, 이제 나의 재산으로 먹고
즐기리라.’ 하지만, 그는 자기 재산을 다른 사람들에게 남기고 죽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지 못한다(집회 11,18-19).”
야고보 사도는,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산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루카 12, 20)
-한상우 신부-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것이다.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신앙의
여정이다.
물질로부터의
자유가 중요하다.
우리 마음을
성찰하고
점검하는
시간이다.
결핍과 갈망을
채워 주시는 분은
오직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소유의
욕망은 무한하고
이 무한한 욕망을
한 번도 비워 본 적이
없는 우리들 삶이다.
지나친 욕심은
언제나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치기 마련이다.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은
어리석은
우리들의 탐욕이다.
탐욕은
무분별한
소유욕이다.
탐욕은 언제나
제몫을 늘리려고
남의 몫을 가로채는
그릇된 욕망이다.
왜곡된 욕망을
멈추는 것이
복음이다.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모습이
아니라
마음이 바로 선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우리자신의 구원을
대신할 수는 없다.
삶다운 삶을
회복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이시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죽음 앞에서
무엇이 그리
귀중하겠는가.
모든 소유물이
모든 애착이
다 소용이
없게된다.
우리의 마지막
호흡이 미련과
애착이 아닌
하느님을 향한
감사이길 기도한다.
삶의 마침표가
기쁨과 자유이길
간절히 바란다.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목숨을 주시고
목숨을 되찾아
가시는 하느님께
오늘의 이 시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맡겨드린다.
소유욕이 아니라
깊어지는 마음의
충만함이다.
생명의
풍요로움은
탐욕과 방향이
다르다.
목숨은 생명은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것이다.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
탐욕을
경계하라는 말씀이
생명을 다시 보게하는
살아있는 마음으로
마음을 울리는
주일이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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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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