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7월 17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Margaret K 2022. 7. 17. 06:34

2022 7 17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가 10,38-42)

 

   “Martha, Martha, you are anxious

and worried about many things. 
There is need of onl y one  thing. 
Mary has chosen the better part
and it will not be taken from 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환대를 받으시고, 내년 이때에 부인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드러났는데, 그 신비는 그리스도이시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보시고,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하신다(복음).

주님 곁에서, 주님 안에서 쉬는 '기도'

-키엣 대주교-

 

지난 주 ‘사마리아인’에서는 자비심, 봉사를 보여주었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규범 안에서의 섬김과 봉사입니다.

섬김은 나를 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섬김은 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바리사이는 성전에 올라가서 ‘오, 하느님!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라고 기도하였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자만스러운 태도를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제단 위의 촛불이 자신을 태우지 않고 옆에 있는 아름다운 꽃을 태운다면 참으로 안타까울 것입니다. 촛불은 다른 것이 아닌 자신을 태울 때 가장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면서도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쉽게 시기와 자만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는 것처럼 드러내지않고 경쟁하지 않고 오직 주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한 순종하는 겸손한 마음과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7, 10).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바오로 성인은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떠한 섬김이든 나 자신을 잊는 자비로운 마음이 없다면 무의미합니다.

내가 섬겨야 할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섬겨야 할 대상의 요구와 상황에 따라 적절한 시간과 장소, 방법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봉사의 자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복음과 기도를 통해, 성체성사 안에서 주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가는 길을 비춰주실 것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안내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영혼을 위해 쉬어야 함을 아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같아 가족을 위해, 친구를 위해 시간을 낼 수도 없고 신앙생활을 할 시간은 더 더구나 없다고 생각합니다. 쉬지 않고 일하는 기계도 쉬지 않으면 고장이 나는데 하물며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면서도 걱정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마치 마르타와 같습니다. 오늘도 마르타에게 “너무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행한 일을 경고한 것이 아니라 바쁘게 지내고 지나치게 걱정하는 태도를 경고한 것입니다. 마르타에게는 자신의 영혼을 위한 ‘쉼’이 필요합니다.

기도를 통해 휴식을 갖고 균형된 생활을 유지하며,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기도는 바로 주님 곁에서, 주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주고, 이를 통하여보다 성숙된 종교 생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곁에서 기도하며 쉼으로써 다시 활력을 되 찾을 수 있고, 주님의 뜻에 따라 올바른 섬김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하셨던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사는 것에 대해 너무 염려하고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 곁에서 쉬어라. 아버지는 너에게 힘을 보태 줄 것이다. 마리아처럼 가장 좋은 부분을 선택해라. 그것이 영원히 존재하는 보물창고이다.”

주님, 당신 곁에서 쉬라는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여 주소서. 주님과 함께하는 편안함 삶 속에서 주님의 뜻에 따라 저의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성경을 습관적으로 읽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을 읽고 어떤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까? 성경을 읽는 나의 모습을 돌아보십시오.
2. 다른 사람을 섬기거나 도움을 줄 때, 나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나를 위한 마음이 남아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의 실천

1. 기도는 주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것입니다. 기도의 시간은 효성스러운 아들의 마음으로 아버지이신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긴 시간 열심히 기도하는 것 보다 기도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기도의 모습을 돌아보고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 쉼을 가져보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잘 지내시죠? 어떻게 지내세요?” 등의 말로 묻곤 합니다. 이 물음에 “너무 잘 지내고 있죠. 아주 좋아요.”라고 답하시는 분도 있지만, 이렇게 대답하시는 분도 참 많습니다.


“요즘 너무 힘들어요. 마지못해 살고 있어요. 그저 그래요….”

이 둘의 표정을 비교하면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좋다며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이는 사람 대부분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감사의 효과는 실험을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한 그룹은 감사한 일을 기록하고 다른 그룹은 골치 아프고 힘든 일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3주 뒤, 감사한 일을 기록했던 사람이 힘든 일을 기록한 사람보다 의욕이 충만하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잠도 깊이 자는 것입니다. 또 감사한 일을 기록한 사람이 이웃을 향한 사랑 실천에서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결국 감사하는 사람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감사할 일이 없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감사할 일을 찾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자기를 더 안 좋은 쪽으로 이끌 뿐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십니다. 여기서 ‘모셔 들였다’라는 성경 구절은 그저 ‘손님을 대접한다’라는 정도의 뜻이 아니고, ‘주님을 모시고 모든 봉사를 한다’라는 신앙적인 뜻을 지닙니다. 즉, 마르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와 반대로 여동생 마리아는 명상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새기는 영성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시 여성의 지위는 높지 않았습니다. 특히 공식적인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지 않았고, 오로지 가사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미덕이었습니다. 탈무드에서도 여성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을 볼 때,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을 보고서 그 누구도 좋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마르타가 예수님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질투의 마음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시선을 염두에 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딱 한 가지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것들에 이것저것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경청하는 사람은 그만큼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기쁘고 행복하게 주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낙하산과 같아서 활짝 펼쳤을 때 제 기능을 발휘한다(토머스 듀어).

 상대의 마음을 읽는 방법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VkEP_7p1op8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서 아무 일도 안 합니다. 이에 열이 받은 마르타는 예수님께 이렇게 고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타를 부드럽게 꾸짖으시고 마리아를 칭찬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마르타가 아닌 마리아를 칭찬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마르타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예수님께 봉사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말씀을 드리려고 왔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듣지 않아서 잘 나가다 망하는 사람, 기업, 나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이폰을 비롯한 카메라 내장형 휴대전화가 세상에 나오면서 필름 업체들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코닥은 망했고 글로벌 2위 업체였던 후지필름은 살아남았습니다. 이들의 성패를 가른 것은 바로 혁신이었습니다. 혁신은 고객의 마음을 듣는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코닥은 최초의 디지털카메라 초기 모델을 발명한 회사입니다. 그러나 필름이 필요 없는 카메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디지털카메라의 상용화에 미온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구매자들은 이미 필름은 원치 않고 종이로 인화되는 사진도 원치 않았습니다. 그 마음을 읽을 수 없어서 코닥은 망했습니다. 

    하지만 후지필름은 달랐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기술을 이용해 구매자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화장품, 건강관리, 반도체 소재 등 신사업에 진출하며 혁신을 거듭했습니다. 혁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생각만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에게는 들어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감정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마르타는 나의 감정을 강요하려 하였습니다. 내가 상대의 감정을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내 감정이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렇게 해 주면 행복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대의 감정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평안해집니다. 

    하와가 하느님의 마음을 읽지 못한 이유는 뱀의 유혹 때문입니다. 뱀이 하느님께 불만을 품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바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불만을 느끼면 상대의 마음에는 귀를 막는 사람이 됩니다. 감사해야 들을 귀가 열립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자기 아이들에게 새엄마가 낳은 아이들의 육아를 강요하는 아빠가 나왔습니다. 이전 혼인에서 낳은 삼 남매는 아버지의 육아 강요에 매우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호강에 겨워가지고 이것들이!”라고 하며 화를 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된 데에는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어 매우 가난하게 커야 했습니다. 물이 새는 집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자야 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집에 살게 해 줄 아버지가 너무 그리웠습니다. 자기는 그런 아버지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돈만 벌어다주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집에 살게 해 주었는데 자녀들이 동생들을 돌보려 하지 않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이 좋은 점은 코끼리 인형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코끼리 인형에게 말을 하도록 합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말들도 다 털어놓습니다. 왜냐하면 코끼리는 자기들에게 원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코끼리에게 털어놓는 말들을 들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돈만 바라다가 자녀 모두를 잃을 것 같다는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독립시켜주고 육아는 아빠가 책임지기로 합니다. 자녀들은 너무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빠를 위해 이벤트까지 해 줍니다. 다시 가족이 화목해 진 것입니다.  

 

    소통의 핵심은 상대의 마음을 읽어주는 마음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상대에 대한 고마운 감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고마워야 내 감정이 우선되지 않고 상대의 감정을 먼저 들어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줄 수 있고 관계가 회복됩니다.    

 

    교회는 이런 것에 매우 서툴렀습니다. 마르타와 같았습니다. 2천 년 가까이 라틴어로 신자들이 미사를 하게 했습니다. 신자들의 마음을 읽어줄 준비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사제로 신자들에게 해 주며 그것으로 충분히 준다고 여겼습니다. 마르타처럼 불만을 품고 신자들을 대한 것입니다. 

    교회가 쇄신되려면 성직자들이 신자들에게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자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마르타처럼 다가가는지, 마리아처럼 다가가는지 생각해봅시다. 

 감추어져 있던 신비, 선포되는 말씀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8smXl4C50z8

 -조재형신부-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적선지가는 선을 쌓은 집안곧 일과성으로 그치는 선행이 아닌 생활의 가치가 선행(善行)을 실천에 옮기는 자세를 지닌 집안과 그 구성원의 행위를 뜻합니다필유여경은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뜻입니다곧 경사스러운 복()이 자신의 세대뿐만 아니라 자손들까지 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결과를 얻는다는 의미입니다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의 선행을 보았습니다아브라함은 한번만 선행을 보인 것이 아닙니다늘 선행을 베풀었습니다그리고 아내 사라가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셨고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번성하게 해 주셨고아브라함의 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이보다 더 큰 복은 없을 것입니다.

 

적선지가필유여경의 본보기를 경주 최부자의 가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경주의 최부자는 몇 백 년 동안 부를 유지하며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그 이유는 재물을 채우려고만 하지 않았고재물을 기꺼이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집안의 며느리들은 시집오면 3년간은 무명옷을 입었다고 합니다비록 부유할지라도 사치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흉년이 들면 곳간을 열어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소작인들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흉년에는 헐값에 땅을 사지 않았습니다오히려 곡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땅은 농부들의 생명과 같았기 때문입니다이렇게 선을 베풀었기에 민란이 났을 때도 최부자 집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마을 사람들이 지켜주었기 때문입니다나라가 일본에게 넘어가 망하자 최부자 집은 재산을 처분해서 독립자금에 보태었다고 합니다나라가 독립되어야 백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선을 베풀어 복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황금유향몰약을 선물로 가져왔습니다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하느님의 아들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지금 강도당한 이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에게 따뜻한 이웃이 되어주었습니다사랑을 실천하였고 그의 행위는 성경에 남아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야기도 하셨습니다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빚진 것이 있다면 4갑절로 갚겠다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 그렇습니다선을 행하는 집은 구원을 받습니다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우리들 또한 선을 베풀어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야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선을 베풀고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그러나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선을 베푸는 것을 넘어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오늘 바오로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송영진신부-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이 이야기를, 마르타와 마리아를 대조해서 보는 관점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을 대조해서 보는 관점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르타와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좀 더 잘 알아들으려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을 대조해서 보는 관점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려고 오신 분입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초대를 받아들이신 것은,

마르타로부터 ‘섬김’을 받으려고 하신 일이 아니라, 마르타의 집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은 바로 ‘말씀’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물론 마르타의 입장에서는 주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싶어서 한 일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싶어서 한 일입니다.

마르타의 그 순수한 마음을 폄하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섬김’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곧 주님을 잘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은총’을 잘 받는 것이 주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려고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을 받아먹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이 말은, ‘말씀’에도 또 ‘성체성사’에도 모두 적용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아먹는 것이 예수님을 잘 대접하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자기가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만 생각하다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먹는 일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고,

마르타가 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이고,

마르타가 하는 일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말리는 베드로 사도에게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마태 16,23).

마르타의 경우는 그렇게 혼날 정도로 잘못한 일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막으려고 했다는 점은 비슷합니다.

(물론 마르타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직접 막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은

예수님의 일을 막은 것과 같습니다.

듣는 사람이 있어야 ‘말씀’을 전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요한 6,68), 즉 ‘생명의 양식’입니다.

마르타가 준비한 음식은 ‘그냥 먹어서 없어질 양식’입니다(요한 6,27).

물론 마르타 자신이 먹으려고 준비한 음식이 아니라

예수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음식이지만, 그래도 ‘없어질 양식’입니다.

그러면 마르타는 아예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가?

(예수님을 모셔 들이지 말았어야 했는가?)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먼저 했어야 합니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5)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라는 말씀에서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물론 마르타는 자기 자신이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좀 더 잘 대접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마르타 자신이 하는 일’을 걱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의 궁극 목적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르타가 하는 일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 일 자체가 신앙의(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몸을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일이지만, 영혼을 위해서

말씀을 받아먹는 일이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하고, 더 급한 일입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말씀에는, “너는 나쁜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데,

좋은 몫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뜻은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좋은 몫’은 신앙생활의 목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바빠서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음식만(일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일을 중단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듣는다면,

오히려 그 일을 더욱 쉽고 빠르게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 42)

-한상우신부-

생명의 질서를
온 몸으로
체험하는
농민들의 삶이다.

땅과 농민은
분리될 수
없듯이

절박한
우리들 삶과
하느님은
나누어 질 수
없다.

분주함 속에서
분주함을
내려놓고
먼저 주님을
만나야 할
소중한 주일이다.

우리의
분주함이
주님께
의탁하는
맡겨드림의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

분주함 속에
스며있는
염려와 걱정이다.

우리의 삶 속에
숨어있는
염려와 걱정이다.

염려와
걱정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듣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제자리를
잡는다.

주님과의
만남이
가장 좋은
우리들의
몫이다.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삶의
자리로 오셨다.

함께하는
기쁨이다.

참된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다.

참된 사랑이란
굳어있는
우리의
분주함을
주님의
절박함으로
맡겨드리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좋은 몫이
필요하다.

가장 좋으신
주님께서는
분주한 일보다
먼저 당신을
만나길 간절히
바라신다.

빼앗을 수 없는
간절함의 관계이다.

간절함으로
자라나는
관계의 신비이다.

일과 마음을
주님께 봉헌한다.

먼저 해야 할 일이
마음을 나누는
것임을 이제야
깨닫는
주일 아침이다.

가장 좋은 몫을
되찾는 마음의
날이다. 

말씀 나누기 - 연중 제16주일-마리아와 마르타를 합친 사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