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7월 15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2. 7. 15. 06:27

 2022 7 15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보나벤투라 성인은 1217년 무렵 이탈리아 중부 지방의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가 된 그는 파리에서 공부한 뒤 파리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완성하였으며, 철학과 신학 분야에서도 권위 있는 저서를 많이 남기고 1274년 무렵 선종하였다. 148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그를 시성하였고, 1588년 식스토 5세 교황은 중세의 뛰어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존경받던 보나벤투라 주교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마태오 12,1-8)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병이 들어 죽게 된 히즈키야 임금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으셨다며 주님의 표징을 보여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는다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친 짓이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제가 한 말이 아니라,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말입니다. 이 글을 보는 순간, 제 머리를 꽝 때리는 충격을 입은 것만 같았습니다. 미친 짓을 계속 반복하고 있음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노는 것만 반복하면서, 전혀 다른 시험에 합격할 수 없습니다. 가족에게 아픔과 상처 주는 것을 반복하면서, 전혀 다른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죄를 반복하면서, 전혀 다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합당한 행동을 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두 미친 짓이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바라는 결과를 위해 해야 할 합당한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누구는 ‘세상이 미쳤다’라면서 자기가 아닌 다른 이의 잘못만을 꼬집어 이야기하지만, 정작 나 자신이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미친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주님의 반대편에 서 있었습니다. 율법 준수를 들어 사람들을 구속하는 일을 반복하면서도 이를 통해 자기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을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비볐다는 것만으로도 고발했습니다. 실제로 안식에 걷는 행위도 금지되는 등, 일상생활에서 금지 사항이 39개나 되었습니다. 여기에 사소한 데까지 까다로운 규정이 덧붙여지면서 사람들이 꼼짝도 못 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면서 계속해서 이런 율법 준수를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도 율법 자체가 절대적이 아니라 율법은 어디까지나 실증법으로서 자연법이나 신법의 요청이 있으면 관면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 일행이 했던 일을 말씀하십니다.

율법이 하느님의 법이라면 그것은 사람을 잘 살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을 율법으로 얽어매서 괴롭히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밝히십니다. 잘못된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참 하느님이신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인해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이 세상 안에서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그 사랑의 삶을 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을 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적이란 없다고 믿고 사는 것과, 또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고 사는 것이다. 나는 후자의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아인슈타인).

 안식일은 무조건 쉬는 날이 아닌 '이것'을 내려놓는 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7UdnwZzS4vM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논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이삭을 뜯어먹다가 바리사이들의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안식일은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주인이 당신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행복마다 주인이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행복하지 않다면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심했을 때 잠자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무서운 것이 나올까 봐 두려웠던 것은 아니고 자고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이 공포를 해결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깨어있을 때의 행복이었습니다. 행복하게 놀고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힘이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그 행복을 맛보게 해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어도 되니까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살다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태중의 아기처럼 즐기다가 새로운 세상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죽음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하다면 저세상에서 만나게 될 부모가 나를 사랑함을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의 주인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재미있게 놀았더라도 부모가 나의 생존을 보장해주고 있지 않았다면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당장 먹고살 것이 걱정인데 무슨 놀이가 행복하겠습니까? 따라서 모든 행복의 바탕에는 생존을 책임지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놀이가 생존이 됩니다. 놀이가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생존이 보장되어야 삶이 놀이가 됩니다. 예수님은 생존을 보장하시는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주일에 성전에 오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바리사이들처럼 지킬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안식일의 주인이 하느님임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하느님이면 마치 태아처럼 태중에서 걱정 없이 편안합니다. 

  

    유튜브에서 어떤 노숙자가 자기 개 두 마리에게 자기 전 재산을 다 털어 케이크를 사고 생일잔치를 해 주며 이것밖에 해 줄 수 없는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걱정해야 하는 것은 주인입니다. 성당에 와서도 걱정하고 있다면 그 성당의 주인이 하느님이 아니고 나인 것입니다. 이럴 때 바리사이처럼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먹고 마시라고 하십니다. 

  

    생존이 보장되면 삶이 놀이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나의 모든 삶은 죽지 않기 위한 노력이 되고 이 경쟁의 삶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생존을 책임지시는 분이십니다. 

  

    어느 날 가난한 스님이 부자 스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오늘 길을 떠나려 합니다. 남해의 어느 큰 절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입니다. 그동안 몸 건강히 계십시오.”

가난한 스님이 떠난다는 말에 부자 스님이 매우 놀라며 말했습니다. 

    “아니, 여기서 남해까지가 얼마나 먼 거리라고 그렇게 함부로 떠난단 말이오. 나 역시 남해로 가려고 진즉부터 준비하고 있었는데,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아 이러고 있는데…. 그런데 자네는 나 모르는 사이에 언제 그렇게 많은 준비를 하였단 말인가?”

  

그러자 가난한 스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뭐 준비랄 것이 있겠소. 물병 하나 바랑 하나면 되지.”

가난한 스님이 달랑 내민 물병과 바랑을 보며 부자 스님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뭐라고? 이것으로 그 먼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오?”

가난한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더니 물병은 허리에 차고, 바랑은 등에 짊어진 채 문밖으로 나섰습니다. 터덜터덜 멀리 사라져가는 가난한 스님의 등 뒤에서 부자 스님이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무사히 도착이나 할지 원, 쯧쯧…. 나는 준비를 철저히 해서 떠나야지.”

  

    그다음 해가 되자 가난한 스님이 돌아왔습니다. 얼굴은 해쓱해지고 옷은 누더기가 되었지만, 스님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가난한 스님을 에워쌌습니다. 가난한 스님은 고생하면서 겪은 이야기와 남해의 큰 절과 자신이 만난 부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부자 스님은 그때까지도 남해로 떠날 생각을 못 하고 조금 더 돈을 모을 생각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어떻게 안식일을 지낼 수 있었을까요?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와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일 먹을 양식이 없는데도 하루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이들은 내년까지 먹을 것이 있는데도 쉬지 못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준비해서 하려면 평생 못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안식일의 주인으로 모시면 당장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밀이삭을 뜯어먹는 것은 놀이입니다. 누구에게는 생존일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주인과 함께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놀이가 됩니다. 삶이 놀이가 될 때 안식일의 주인을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새로 태어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는 “테슬라 파산!”이란 문구를 들고 초췌하게 눈물을 흘리는 사진을 SNS에 올렸습니다. 테슬라에 다니는 직원들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세계 최고 부자인 일론 머스크는 지금 안식일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걱정을 내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이 놀이가 됩니다. 

  

    염려와 걱정은 주인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염려하고 있다면 나는 주님을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걱정을 성당에 놓고 와야 합니다. 걱정한다는 말은 내가 주님이란 뜻입니다. 

    성전은 주님의 집이고 나는 그 집의 종입니다. 종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걱정을 버리는 자리입니다. 항상 성전에서 살면 인생이 즐거움이 됩니다. 안식일은 무조건 쉬는 날이 아니라 걱정을 내려놓는 날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6yyTwAX-FWY

 -조재형신부-

 

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고 이야기합니다그 중에 대표적인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미워하는 사람과의 만남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갈망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는 행동입니다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마지막 이별을 하고 있습니다전쟁으로질병으로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지난 팬데믹 때입니다저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장례 미사에 갈 수 없었습니다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원망과 미움을 안고 살아가는 부부들이 있습니다믿었던 친구에게 배반당했지만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세상의 많은 갈등과 분쟁전쟁과 폭력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갈망에서 시작합니다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하지만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 할 것은 예하고아니오할 것은 아니요.”라고 하여라.

 

부처님은 이런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하였습니다그래서 이런 집착을 버리면 마음에 평정이 온다고 하였습니다집착을 버리면 그물을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우리도 고통이라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그런 마음의 평정에 다다르면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그리고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바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바른 길을 걷는 것이 수행입니다자신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바른 길을 걷는 사람도 있고타인의 깨달음을 위해서 바른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캄캄한 밤에 소경이 등불을 드는 것은 소경의 안전을 위해서만이 아닙니다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등불을 드는 것입니다캄캄한 바닷가에서 홀로 빛을 비추는 등대는 캄캄한 밤에 배들이 안전하게 항구에 도착할 수 있도록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예언자들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파수꾼이 양들을 지키기 위해서 밤을 새우는 것처럼목자가 사나운 이리 때에서 양들을 지키는 것처럼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로 안내하였습니다바른 길은 바르게 말하고바르게 생각하고바르게 행동하고바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고통에 대한 다른 생각을 이야기합니다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참된 행복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현실에서 고통을 받고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하느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교회가 말하는 고통은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말하는 무한반복의 고통은 아닙니다채워지지 않는 갈망 때문에 찾아오는 고통이 아닙니다잘못된 선택 때문에 찾아오는 고통도 아닙니다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져야 하는 고통도 아닙니다해산하는 여인이 고통을 받지만 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그런 고통입니다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아버지의 고통입니다그렇게 흘리는 땀과 눈물은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는 고통입니다인류의 앞길을 밝혀온 예술건축음악철학문학은 바로 이런 고통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의 영광이 될 수 있었습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안식일에 대해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꼭 지켜야 하는 계명으로 생각했습니다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행을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바르게 말하고바르게 보고바르게 행동하고바르게 판단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현실의 삶에서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그런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이룰 수 없는 꿈과 같았습니다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정신과 뜻을 말씀하셨습니다안식일의 정신은 안식일에 쉴 수 없는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안식일의 정신은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안식일의 정신은 안식일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닙니다안식일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용기를 주는 것입니다그래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들었습니다법과 원칙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합니다법과 원칙은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그것만 잘 지켜져도 우리 사회는 발전하고모든 이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모든 법과 원칙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십니다나에게는 엄격하지만 상대방에게는 관대한 법 적용을 말씀하십니다.

 오, 참 좋은 행운이여!

-양승국신부-

 

 

보나벤투라 성인의 전기를 읽다보니 그분의 유년기와 제 유년기가 꽤나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서너살되던 무렵,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치명적인 돌림병이 있었는데...걸렸다하면 죽음이었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덜컥 그 병에 걸렸는데...어머니는 저를 한번 살려보겠다고 빚을 내서 당시 명동 가톨릭회관 자리에 있던 성모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주치의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을 붙들고 제발 좀 살려달라고 눈물로 하소연 하셨답니다.

그것도 모자라 밤낮없이 성모병원 성당 제대 앞에 엎드려 제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서, 제 사전 동의도 없이 이런 서약을 하셨답니다.

'살려만 주시면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보나벤투라 성인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더군요.

보나벤투라의 원래 이름은 죠반니 피단자(Giovanni Fidanza)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린 시절 치명적인 병을 앓게 되었답니다. 부모는 아들의 치유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부모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근처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아이를 들쳐입고 냅다 내달렸습니다.

신심이 돈독했던 어머니는 프란치스코 앞에서 이런 약속을 드렸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제 아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만일 낫게 되면 반드시 아들을 프란치스코에 입회시키겠습니다.”

어머니의 서약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크게 기뻐하면서 이렇게 외쳤답니다.

“Oh! Buona Ventura!”(오! 참 좋은 행운이여!)

그러자 아이의 병은 즉시 씻은 듯이 낫게 되었답니다. 그 뒤로 부모는 아이의 이름을 바꾸었답니다. 보나벤투라로. 약속대로 그는 17세가 되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합니다. 그리고 1257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수도회 총장으로 선출됩니다.

보나벤투라의 겸손은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대 신학자이자, 겸손한 수도자로서의 보나벤투라의 탁월성은 남녀노소 막론하고 누구나 다 알아차렸습니다. 평소 그를 존경하고 흠모했던 한 할머니가 하루는 보나벤투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렇게 큰 지혜를 지니고 있음을 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니, 신부님께서 돌아가시게 되면 틀림없이 천국에 들어가시게 되고, 주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게 되실 것입니다.”

할머님의 말씀에 몸둘 바 몰라 하던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응수하셨답니다.

“저보다 자매님께서 더 주님 가까이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투라를 찾아와 물었답니다.

“형제가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유익했던 책은 어떤 책입니까?”

보나벤투라는 지체없이 십자가 하나를 꺼내들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제가 제일 많이 배웠고, 또 배우고 있는 책은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

 

「서로를 자비롭게 대해야 한다」

 -반영억신부-

 

가끔은 많은 것을 아는 척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안을 주면 다음부터는 좀 겸손해질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를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터인데 잊고 삽니다. “나 자신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만들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주무르길 기대하나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은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자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 하시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고 안식일의 주체이십니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자비이고 우리가 서로에게 자비로운 존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은 서로에게 철두철미하고, 사나워지지만 신앙인은 서로를 자비롭게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밀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을 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철저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법의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 오히려 올가미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중요시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을 우선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대하고 소위 힘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엄격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의 이웃에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자기 집의 가스 불을 꺼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가스 불! 자기가 끄면 되지 그런 부탁을 하러 오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식일이 되기 전 불을 켰는데 끄기도 전에 안식일이 온 것입니다. 불을 지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다 가기까지 켜 놓을 수도 없고……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부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겉모양에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법조문을 지키기에 앞서 법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기를 바라십니다. 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나요? 사람에게 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날짜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알맹이보다는 껍데기에 충실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오늘 우리는 알맹이를 빌미 삼아 규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여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기보다는 내 취미와 즐기는 일을 더 우선 하고 기도와 미사는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제 안식일의 과거에 묶이지 않고 주님의 날에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거룩함이 넘쳐나게 되고 이웃도 우리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도 폼 잡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용서, 그리고 가지치기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을 찾으면서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그것은 성사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체성사, 고해성사 말입니다. 쉽지 않은 이것,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이 하신 것을 행하는 것을 뜻하고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은 ‘무덤에 묻어버릴 때’, 예를 들어서 그들에 대해서 나쁘게 말할 때, 뒤에 이야기할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런 거짓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이에게 있을 수 있는 이 더러운 짓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일 때 우리는 죽음의 가지들이 되고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이 하셨던 것과 같은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 다른 사람을 돕는 것,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것,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성령의 기쁨을 간직하는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오스티아 평화의 모후 성당, 2015, 5 3).

『배가 고파서』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1-2)”

 

앞의 8장에,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러 다니는 동안, 맞아들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서 머무르시고, 없으면 들판에서 노숙을 하셨을 것입니다.

또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생활을 하셨을 텐데,

아마도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도 당연히 예수님과 함께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라는 말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달픈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자신들의 행동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무심코 행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리사이들의 비난은 “안식일을 안 지키는 죄인들의 무리” 라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함께 단죄한 말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들의 말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9).”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변호하신 것은,

바리사이들의 비난이 그만큼 심각한 수준의 모욕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노여움’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자비 없음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태도에 대해서 노여워하셨을 것입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마태 12,3-5)”

 

여기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이라는 말씀은,

당신 제자들의 행동이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임을 인정하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죄가 되는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어겼지만 죄가 안 된다.” 라는 말이 모순처럼 보이긴 한데, 모순은 아니고,

이 말은, 죄를 지었다고 판단하지 않는, 또는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

예외 상황이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심심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면,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다윗의 이야기는 사무엘 상권 21장에 나옵니다.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은 다윗도, 그의 일행도,

빵을 다윗에게 준 사제도 모두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아무도, 바리사이들도 다윗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다윗이 왕이라서 비난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배가 고팠다는 사정은 같은데, 다윗이 한 일은 비난하지 않고,

일반 서민이 한 일만 비난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불공평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제들의 경우를 언급하신 것은,

안식일 규정이라는 것이 누구든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규정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제들은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를 준비하려면

안식일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합니다.

민수기 28장-29장을 보면,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는 날에 관한 규정들과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들에 관한 규정들이 나오는데,

‘생업으로’ 하는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규정만 있습니다.

사제들이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하는 일은 생업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제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는 규정을

면제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6-8).”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라는 말씀은, 안식일 규정에 대해서

예외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제들보다 당신이 더 높다는 선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안식일 규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라는 선언입니다.

이 두 선언은 당신이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 말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발언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에는, “내 제자들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한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내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데도 내가 내버려둔 것은,

그것이 죄가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라는 말씀은,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킨다고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율법만 보지 말고 사람을 보아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무자비한 율법주의에 빠지면 안 되지만,

걸핏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꾸만 계명들과 규정들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방종’도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정성’입니다.

율법주의를 반대한다는 핑계로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정성이 없는 것이고, 정성이 없으면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 8)

-한상우신부-

너를 변화시키는
안식일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안식일이다.

참된 휴식을
배우는 은총의
시간이다.

휴식은 채우는
것이 아닌
비우는 것이다.

뒤섞여
있는 것을
비우는 것도
삶의 일부이다.

안식이 필요한
우리자신을 다시
만나는 회복의
날이다.

참된 휴식으로
지쳐있는 우리를
이끌 수 있는 분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뿐이시다.

주님 안에
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온 힘으로
버티는 삶이
아니라
휴식과 봉헌으로
주님께
맡겨드리는
삶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안식일이
필요하다.

삶의 맛은
휴식의 맛이다.

건강한 삶을
배우는 시간이다.

삶과 삶
관계와 관계를
이어주시는
안식일의 주인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새 사람
새로워진 삶
새로운 관계
새 시작의 창조
이 모두에는
가장 필요한
참된 안식이 있다.

새로 태어날 수
있는 휴식이
필요하다.

주님과
우리자신을
새롭게 만나는
사람의
기쁜 날이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5주 금요일-놓치지 말아야 할 것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