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2. 7. 12. 06:55

2022 7 12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날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 11, 20-24)

 

"Woe to you, Chorazin! Woe to you, Bethsaida!
.For if the mighty deeds done in your midst
had been done in Tyre and Sidon,
they would long ago have repented in sackcloth and ashes.
But I tell you, it will be more tolerable
for Tyre and Sidon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에게, 유다 임금 아하즈를 만나 아람 임금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고을을 꾸짖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믿음도 부족했고 기도도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신학교에 들어와서도 기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루하고 너무 길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도가 너무 즐겁습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를 묵상해보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족한 ‘나’임에도 당신의 일꾼으로 삼아 이끌어 주신 그분의 사랑, 저의 능력을 당신의 은총으로 채워 주시는 사랑, 신부로 사제서품도 받고 전혀 상상도 못 했던 방법과 장소에서 저를 쓰시는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니 기도가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미사, 기도, 묵상, 성경 읽기 등을 계속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말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우선되지 않아서, 즉 맨 뒤로 밀려나 기도를 못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다른 일이 있으면 짜투리 시간이라도 만들어서 만나거나 그것도 안 되면 전화 통화라도 합니다. 기도라는 하느님과의 대화도 짜투리 시간을 이용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T.S.엘리엇은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잊고서 그분께 기도하기는 어렵다.”

괜히 일 핑계를 대지 말고, 하느님 사랑에 집중해보십시오.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질책하는 장면이 두 가지 경우에 나타납니다. 하나는 위선을 일삼는 종교 지도자를 향한 질책이었고, 따른 하나가 주님의 은혜를 많이 입고도 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을 향한 질책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두 번째의 경우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세 도시는 상업적으로 가장 발달한 곳이었고, 동시에 많은 사람이 있어서 종교 교육이 가장 성행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만과 자기도취로 주님의 가르침을 외면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기적을 보고도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기를 간절하게 원하셨지만, 그들은 끝내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것에 관한 관심이 하느님 사랑보다 더 컸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일 때문에 사랑에 집중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기보다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남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보다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는 것을 언제나 생각한다. 고통과 괴로움에 지지 않고 끝까지 달렸을 때 그것은 승리로 연결되었다(아베베 비킬라).

 치유가 안 돼도 기도해주면 위로가 남는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2l-qPsMk5JE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기적을 많이 행하셨지만 믿지 않는 도시들을 꾸중하십니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3-24)

    하지만 요즘에 우리가 믿지 않는 신자들에게 이런 꾸중을 할 수 있는 처지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기적을 일으킬 힘이 없다고 이미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유튜브에서 박혁이라고 하는 어떤 개신교 청년이 콜롬비아에 가서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불량 청소년 세 명에게 설교하고 복음을 전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콜롬비아는 가톨릭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돈을 요구하는 청소년들에게 갑자기 예수님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 없이는 무엇을 가져도 만족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일한 기쁨은 그리스도라 말합니다. 특별한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청소년 세 명은 그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를 함께하자고 하니까 손을 잡고 기도합니다. 기도의 내용은 “저희 죄들을 용서해 주소서!”였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으나 그들은 무언가에 눌린 듯 기도를 따라 합니다. 

 

    처음에 저는 그의 믿음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더 놀랐던 것은 그다음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여기 아픈 사람 있니?”

‘치유의 기도와 안수’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기도를 받은 이들에게 또 묻습니다. 

    “움직여봐!”

그는 말합니다. 

    “새로워진 거 같습니다.”

사람들은 손뼉을 칩니다. 예전 같으면 “쇼하고 있네!”라고 했을 텐데 부끄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모여든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안수할 수 없자 각자가 아픈 곳에 손을 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치유의 기도를 합니다. 비웃는 사람들도 없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그의 말을 따라서 함께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친 그는 말합니다. 

    “움직여보세요. 당신의 통증은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본 것은 그가 하는 치유의 행동을 따라서 한 이들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들었지만, 그의 말만을 들은 이들은 그냥 지나쳐 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설교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아주 단순하고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자신에게 성령의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믿는 이들은 그와 함께 예수님께 자신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길거리에서 손을 올리고 하였습니다. 

  

    이 어린 선교사가 쇼하는 것인지 착각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예수님께서 길거리에서 전도하시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놀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당신 기적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무라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신자들을 나무랄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겸손하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올 리가 없어!’

치유해 주겠다고 하지 않고 병원에서 치료 잘 받고 오라고 강복해줍니다. 나 자신이 치유의 힘이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는 치유의 능력을 주시고 나쁜 영들에 대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사제는 성령의 힘으로 죄를 사하고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합니다. 그런 기적에 비하면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은 새 발의 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믿으면서 치유의 능력을 주셨음은 믿지 못합니다. 개신교가 치유의 능력은 믿으면서 죄 용서의 권한은 주지 않으셨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몸이 좀 안 좋아 양호실에 누워있었습니다. 단순한 감기·몸살 정도였습니다.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개신교 학교를 나왔습니다. 양호실에 누워있는데 종교를 가르치던 선교사님이 갑자기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저의 머리에 손을 대더니 낫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조금 기도를 드리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았니?”

저는 속으로 웃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았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분은 다시 안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나았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 모르겠지만 자꾸 물어보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나중에는 이렇게 얼버무렸습니다. 

    “아, 예…. 나은 거 같아요….”

그런데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선교사님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마에 짚었던 그 따듯한 손길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쉽게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왜 나한테 안수 달라고 해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믿고 기도해주면 그 사람에게 적어도 사제를 통해 주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따듯한 위로는 남습니다. 

    아프면서도 사제에게 치유를 청하지 않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가톨릭에 와서 고해성사만 보면 죄가 용서받는데, 본인 스스로 용서받겠다고 하는 개신교 신자들과 같습니다. 서로 부족한 면을 보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완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치유의 능력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제들도 무조건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믿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신자들도 아프면 무조건 사제에게 청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이제 우리는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무랄 수도 없는 상황이 됩니다. 겸손해지려고 받은 능력을 믿지 않고 포기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교훈, 카파르나움에 내린 경고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NzWPK58-9es

 -조재형신부-

 

좋은 생각 6월호에서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아버지와 아들이 낚시를 갔습니다그날 아버지는 맛있고값이 비싼 고기를 잡았습니다옆에서 낚시를 하던 젊은이가 아버지에게 한 마리만 팔 수 있는지 부탁하였습니다아버지는 돈을 받지 않고 크고 맛있는 고기를 그냥 주었습니다아들이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돈을 주고 사겠다고 하는데 돈을 받지 그러셨어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렇게 돈을 받기 시작하면 낚시는 취미가 되지 않는단다젊은 날 그렇게 돈을 받고 물고기를 준 적이 있단다그러자 다음 낚시를 할 때 값이 나가지 않는 물고기는 잡아도 즐겁지가 않았단다그 뒤로는 절대로 돈을 받지 않았단다그래서 지금까지 낚시가 취미가 되었단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던 아들도 생각하니 아버지의 이야기가 맞았습니다취미로 시작한 사진이었습니다사진을 출품하고 약간의 돈을 받으면서 작품이 될 것 같은 사진만 찍었습니다그러니 자연히 사진 찍기가 소홀해 졌고지금은 거의 사진을 찍지 않게 되었습니다취미는 취미로 여길 때 취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거래를 합니다공정한 거래는 사회를 발전시키는 축이 됩니다우리는 살면서 욕심을 가지게 됩니다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욕심은 삶의 동기를 부여합니다성공명예권력은 욕심을 먹으면서 자라기 때문입니다거래와 욕심은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입니다우리는 부당한 거래를 보곤 합니다추악한 욕심을 보게 됩니다빌라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대사제와 거래를 하였고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유다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았습니다지금도 부당한 거래와 추악한 욕심은 우리 사회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습니다집 앞에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상추호박고추깻잎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화단에는 코스모스도 심었습니다바람에 춤을 추는 코스모스를 보면서 사람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면 그것으로 기쁨입니다직원들과 함께 싱싱한 야채를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감사할 일입니다먹고 남아 이웃과 나눌 수 있으면 그것도 행복입니다그렇습니다사랑은 거래가 아닙니다사랑은 그저 주는 것입니다사랑은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사랑에 욕심이 있다면 끝까지 주는 것입니다우리는 부당한 거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추악한 욕심을 멈추어야 합니다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부당한 거래와 추악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세상에 대한상실에 대한고통에 대한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이사야 예언자는 강대국들의 위협 앞에 두려워하지 말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오히려 이러한 때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확실히 가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졌던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납니다알이 깨어지는 아픔이 없이 병아리는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어느 시대에나 힘들고 어려운 일은 있었습니다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절망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고장애물을 넘어서는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갖는 것도 우리의 선택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비록 진흙탕에 빠질지라도옷이 더러워질지라도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교회라는 울타리에 안주한다면섬기려 하기 보다는 섬김을 받으려고 한다면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회개

-양승국신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와 경고가 꽤나 날카롭습니다.

강력한 경고성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래! 어서 빨리 회개해야지, 이제 그만 하느님께로 돌아서야지, 하고 다짐해보지만, 워낙 타성에 깊이 빠진 탓에 결심만 거듭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저 역시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생토록 발버둥쳐봤지만 그토록 어려웠던 것이 회개였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단맛 쓴맛 다보고,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체험을 겪고 난 지금에야, 손톱만큼 미세하게나마 회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부족하나마 하루하루 회개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와 철저히 다른 그를  적군이나 웬수로 생각했었는데, 사실 그와 나는 주님 안에 한 형제임을 자각하는 깨달음이야말로 참된 회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때로 뒷골목 시궁창 냄새처럼 퀴퀴하고 꾸질꾸질하며 보잘것 없는 내 인생이 실패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 비참한 내 인생길 안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해계시니, 내 인생은 더없이 존귀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일이야말로 회개 중의 회개가 아닐까요?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께서 대체 어디 계시며, 어떻게 내게 이러실수 있냐며 울부짖었는데, 사실 그분께서는 내 등뒤에, 내 마음 안에, 나와 나란히 걸어오셨음을 인식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회개입니다.

극심한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  상처 투성이뿐인 이웃들, 그래서 모나고 뾰족뾰족한 이웃들, 언제나 요구사항이 많은 이들은 부담 그 자체이기에 회피하고 싶은 존재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그들은 내 성장과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천사요,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예수님임을 알아차리는 일이 곧 회개입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도시들을 꾸짖으시는 장면입니다.

곧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이 경고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 11,20)

 

사실 이들 도시들이 꾸짖음을 받은 이유는 복음을 적극적으로 방해했거나 윤리적으로 심각한 죄악을 지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인 죄악으로 본다면, 바알 숭배에 빠져 여러 차례 예언자들에게 책망을 받았던 페니키아의 티로와 시돈이, 그리고 부패와 타락의 전형이었던 소돔이 더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래아의 이 도시들에게 엄중한 심판의 경고가 내려진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와 기적들을 대부분 그들 지역에서 행하셨건만,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특은을 받고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들으면서 저에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두려움입니다.

저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혹은 공동체로부터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았건만, 아직 하느님과 형제들을 그만큼 사랑하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루카 12,41-48)의 마지막 구절이 저 마음을 압박해 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7-48)

 

저 역시 그들처럼 영적 무지로 가려져 있고, 완고함으로 굳어져 있음을 봅니다.

지금도 저와 함께 계시는 그분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자꾸자꾸 체험시켜주건만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파라오처럼 완고하고 변덕스런 제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경고하시는 것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애타는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곧 멸망으로 빠져드는 그들에 대한 동정과 애도의 한탄이요 경고였습니다.

 

마치 뒷날,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셨듯이 말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마태 23,37)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애타는 호소를 듣습니다.

우리를 회개로 부르시는, 애간장 태우시는 마음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의 이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 11,20)

주님!

당신의 꾸짖음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사랑을 받고 또 받으면서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함은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에 눈이 가려 마음이 비뚤어지고 변덕스런 까닭입니다.

당신이 많은 사랑을 요구하심은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음임을 알게 하소서.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으듯 품으신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아멘.

「은총은 풍부하다」

 -반영억신부-

 

심판 날이 다가온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대가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였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는 이에게는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때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판의 날이 두렵습니다. 살아온 지난날이 허물로 누벼놓은 날이요, 마음이 흔들 비쭉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서에 보면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에제18,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아니 지금, 이순간에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칫 잘 살아왔다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될 때 그 인생이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코라진, 벳싸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열심히 활동하신 지역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필립보는 벳사이다 출신입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 활동의 근거지요,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은총을 거부하였고 결단의 시간을 낭비하였기에 불행합니다. 반면에 티로와 시돈, 소돔은 이방인 도시로써 교만과 사치스러운 부의 표본이 된 곳으로 퇴폐와 음란, 악의 도시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더 큰 구원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기적이 그곳에 있었더라면 그들은 분명 회개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은총이 아무리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인연을 내세우고 예수님을 자주 모셨다고 해도 그것이 곧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은 삶의 변화를 가져올 때 완성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코헬12,14).고 하셨으니 마음을 다잡아 오늘을 충실히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불 속에 던지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니만큼 알곡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먼저 자신을 잘 살핀다면 심판은 기쁨이요, 곧 하늘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두려워 마십시오. 자신을 갖고 심판을 맞이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으니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기를 다짐하며 이 날을 봉헌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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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에 악에 대해서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침묵 중에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말씀하시면서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씀은 사랑이요 자비이고 용서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은 심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구원됩니다. 만일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저는 단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그분에 의한 단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내리는 단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13년 3월 29일 콜로세오 십자가의 길에서 행한 연설).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송영진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0-22)”

 

이 말씀은 특정 고을들의 멸망을 예고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고, 멸망을 당하지 않으려면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1) 여기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지만,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살고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자만하고 있는 신앙인들을 가리킵니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입니다.

 

2) 예수님께서 ‘고을들’이라고 표현하시긴 했지만,

개인을 무시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소돔을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셨으면서도 아브라함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그곳에 의인이 열 명 있다면,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파멸시키지 않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 18,32).

<실제 뜻은 ‘의인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입니다.

소돔은 의인이 한 명도 없어서 멸망했습니다.

그 멸망에서 살아남은 롯과 두 딸은 소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악인이 회개해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에제 33,11).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심판과 처벌을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요한 3,17).

따라서 어떤 민족이나 도시에 악인이 한 명 있다면, 그 악인 한 명 때문에

민족이나 도시 전체가 멸망당하지는 않는데, 반대로 모두가 악인인데

의인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의인 덕분에

민족이나 도시 전체가 심판과 처벌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3)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지금 신앙인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되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이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4) 그렇다고 해서, “차라리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르고 사는 것이

나중에 심판 때에 더 유리하겠다.” 라고 불평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은 분명히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은총’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아니면 자만심에 빠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은총을 받을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5) 복음을 전해들을 기회도 없었고,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 기회도 없었던 사람들 가운데에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착한 사람들(의인들)’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든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가 있었는데도 거부하고 외면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법을 몰라서 본의 아니게 범죄자가 된 경우에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 상식이 하느님의 심판 때에도 통할까?

십계명에서 말하는 불효,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이 죄라는 것을

모를 수 있을까?

그런 죄는 십계명을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나 미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나는 하느님을 모르고,

안 믿는다. 그러니 하느님의 심판은 나하고 상관이 없다.” 라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최후의 심판’은 우주 전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3-24).”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을 따로 언급하신 것은,

특별히 ‘교만한 자들’을 꾸짖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선민사상과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교만이,

이스라엘이 빗나가게 된 주원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교만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종교라고 해서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21-22).”

교만은 회개의 반대쪽에 있습니다.

사실 참된 회개는 겸손한 사람이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거나 ‘거짓 회개’를 합니다.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라는 말씀은,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무릅쓰는 것

 -김찬선신부-

 

오늘 하느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하시는 예언의 마지막 말씀은 이러합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그런데 무엇을 믿지 않으면 서 있지 못하리라는 것입니까?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어떤 예언을 하신 것입니까?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고

이제 예순다섯 해만 있으면 무너지리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지금 예루살렘을 위협하는 아람 연합군이 아무리 강해 보이고

그래서 그들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망할 것 같이 보여도

이들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불과하여

예순다섯 해만 지나면 무너지니 마음이 약해져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강해 보이는 원수들이 예순다섯 해만 지나면 무너질 거라는 말을 믿으면

마음이 약해지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래서 예루살렘이 무너지지 않을 테지만

관건은 그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것입니다.

 

사실 예순다섯 해가 지나면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무너질 거라는 말을 믿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받은 것이 삼십칠 년인데

독립운동을 하다 나중에 변절자가 된 많은 분이 그 지배가

심십칠 년이면 끝나는 줄 알았다면 아무도 변절치 않았을 겁니다.

 

이때 변절하지 않은 분들, 예를 들어, 김구 선생이나 안창호 선생 같은 분들이

변절한 분들에게 일본은 오래 가지 않아 망할 것이라고 그러니 계속 버티자고

설득해도 그말은 멀리 느껴지고 당장 앞에 있는 일본은 크게 느껴졌을 겁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그럴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멀리 느껴지고 현실은 오래 갈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약하거나 없는 사람에게는

참고 견디면 극복의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주님 말씀하셔도

그 날이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올 것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다는 것은 많은 고통을 무릅쓰고 믿는 것이요,

오랜 기간을 무릅쓰고 믿는 것이며

그래서 믿음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무릅쓸 것이 많습니다.

반대를 무릅써야 합니다.

손해를 무릅써야 합니다.

고통을 무릅써야 합니다.

배신을 무릅써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도 무릅써야 합니다.

실망을 무릅써야 합니다.

심지어 절망도 무릅써야 합니다.

 

이런 것을 무릅쓰지 않고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없음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