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다.
제자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
(10,24-33)
"No disciple is above his teacher,
no slave above his master.
It is enough for the disciple
that he become like his teacher,
for the slave
that he become like his mast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내가 누구를 보낼까?”라는 주님의 소리를 듣고,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아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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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마트에 갔다가 바닥에 엎드려서 울며 떼쓰는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난리입니다. 엄마는 “이 장난감은 너 가지고 있잖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없어. 없단 말이야.”라는 말만 반복해서 할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엄마가 없는 것을 있다고 거짓말하는 것일까요? 없다고 우기는 아이를 향해 누나로 보이는 아이가 “엄마 말이 맞아. 너 이 장난감 분명히 가지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이 누나도 엄마와 입을 맞춰서 거짓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이가 거짓말하는 것일까요?
아이는 보통 모든 것을 자기 관점으로만 본다고 합니다. 이런 자기중심주의가 가득한 사람은 보통 철부지 어린이였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배려하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다 컸네.”
철부지 어린이 같은 어른도 참 많은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원에게 갑질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상대방의 생각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기가 받지 못한 것, 자기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냅니다. 아직 정신적으로 어린이 철부지입니다.
상대 입장을 먼저 생각해보고 느끼는 것, 남이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황금률을 실천하기 전에 일차적으로 갖추는 우리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위선으로 가득 차서 겉으로 보이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주님의 진리를 큰 소리로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온 힘을 쏟는 위선의 삶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를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세상은 나의 육신에 큰 상처를 줄 수는 있지만, 내 영혼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제 “다 컸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다 컸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 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판자이신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면 영적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성장하는 우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안다고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시선에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시선, 하느님의 평가에 온 힘을 기울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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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데서 말하고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hZyU7jyjt1o
-조재형신부-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라는 제목으로 김평만 신부님의 연재가 지난 6월 26일 30회를 끝으로 마감되었습니다. 연재의 마지막에 신부님께서 했던 말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하느님의 집인 우리영혼은 자신의 사명을 거부하고 하느님 아닌 것들을 우상숭배 함으로써 황폐해졌다. 그리고 인간 공동체는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방이 받아 마땅한 것을 그에게 되돌려주지 않음으로써 상생의 집이 되어주는 사명을 등한히 하였다. 또한 우리는 모두 생명체의 집이며 우주에서 보석처럼 찬란히 빛나는 지구를 훼손하여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렇게 무너져가는 집들을 재건하기 위해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경륜을 펼치시며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다. 그리고 교회는 가톨릭사회교리를 통해서 사회 공동체를 치유하고 무너져 가는 지구를 재건할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종은 누가 그것을 울리기 전까지는 종이 아니다. 또한 노래는 누가 그걸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들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고 구현해 나가는 것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때이다.”
무너져가는 집은 우리들 각자의 영혼이며, 우리가 사는 공동체이며, 우리가 잠시 머물다가는 지구입니다. 우리들이 섬기는 우상은 ‘재물, 권력, 명예’입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학원에도 가고,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유학도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 희생, 나눔’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려는 자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우리가 겸손, 희생, 나눔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리, 죄인, 가난한 이, 불쌍한 이, 감옥에 갇힌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한 이, 불쌍한 이, 외로운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시만 자연은 받은 대로 돌려준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상처내고, 훼손하고, 오염시키면 자연은 반드시 되돌려 줄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함께 한다면 자연은 우리에게 삶의 보금자리를 내어 줄 것입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번 주 본기도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내가 마당을 쓸면 지구의 한 모퉁이가 깨끗해집니다. 내가 꽃 한 송이 심으면 지구의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집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면 지구가 온통 아름답고 밝아집니다. 그렇습니다. 남이 아니라 지금 내가 무너져가는 집을 지키고 보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죽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나이가 좀 더 들면 두려움꺼리가 조금씩 줄어들겠지, 희망해왔습니다. 그러나 웬걸, 정작 나이를 먹어갈수록, 여전히 다양한 측면의 두려움이 남아있고, 인생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두려움인 노년기와 죽음에 대한 강도 높은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이 솔직한 현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 건네시는 위로의 말씀이 참으로 달콤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오 복음 10장 31절)
제 개인적으로도 그토록 오랜 세월 죽음에 대해서 연구하고 가르쳤지만,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꽤나 두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게 최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신 분이 계십니다. 제가 존경하는 우리 시대 탁월한 대 영성가 헨리 나웬 신부님이십니다.
신부님께서는 자신이 꿈꾸고 희망했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하고 종합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친밀함의 대상으로서의 죽음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는 죽음
-세심하게 준비하는 죽음
-반가운 친구 같은 죽음
-상실이 아니라 성취로서의 죽음
-가장 인간다운 행위로서의 죽음
헨리 나웬 신부님께서는 독특한 표현을 동원해 죽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데, 참으로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나를 붙잡아주실 존재, 아버지에게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 일생 전체를 아버지께 송두리째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내 손을 아버지 손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시시각각 죽음을 향한 순례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헨리 나웬 신부님은 이렇게 격려해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곧 당신이 죽음을 향해서 점프할 때, 저 건너편에는 하느님께서 이미 당신이 도착할 그 자리에 딱 지키고 서 계실 것입니다.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손과 팔을 펼치기만 하십시오. 반드시 그분께서 당신을 꼭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믿으십시오.”
헨리 나웬 신부님께서는 덧붙여서 불후의 명문장 하나를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죽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내 죽음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가장 큰 증거요 사랑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비록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지만, 영혼은 한 마리 예쁜 나비처럼 그 비루하고 추했던 육신을 벗어버리고 하느님을 향해 훨훨 날아갑니다.
우리도 조만간 다가올 죽음을 멋지게 잘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조만간, 100% 우리에게 손님처럼 찾아올 그날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헨리 나웬 신부님의 말씀처럼 우리 각자의 죽음이 남아있는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자의 죽음이 주님의 확고한 현존과 하느님 나라가 반드시 있음을 확증하는 아름다운 사건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해보면 좋겠습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창세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태 10,28)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이 말씀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
(집회 2,15)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
(집회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 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10,31)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참된 두려움」
-반영억신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심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합니다. 사도행전9장을 보면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효가 늘어갔습니다. 진정한 두려움은 주님을 차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창세15,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도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이사41,10). “내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한 백성아,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악담에 낙심하지 마라”(이사5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마태10,31)고 하셨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시며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분명 ‘아니오’ 하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적인 힘도 천상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수많은 참새보다 더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드러나게도 부르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때로는 어떤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 때에 그분의 뜻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응답은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뒤 틀릴 때, 그때야말로 결단의 순간이고 신앙이 증거 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사랑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8,38). 주님께서는 우리의 힘이시니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잘 왔다. 그간 내 뜻대로 살았으니 이제 편히 쉬어라.’ 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아니면 ‘너는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좀 더 단련을 받아야 하겠는 걸?’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주변 사람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세례명을 받은 선택받은 신앙인의 품위를 지켜 주님과 하느님 아버지 앞에 당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 28)
-한상우신부-
두려움을
치유하는
존귀함이
하느님의 참된
사랑이다.
두려움은
소중함을
이길 수 없다.
복음의 이야기는
존귀함과
소중함의
이야기이다.
존귀함은
소중함을
다시
끌어안는다.
참다운 삶을
회복하는 힘은
소중함에서 온다.
부족함을
채워주는
소중함이다.
소중한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 관계이다.
소중함은
존중으로
이어진다.
존중은
삶의 의미를
다시
만나게한다.
모든 생명은
소중함을
따라간다.
기도도
소중함이고
기다림도
소중함이다.
행복을
깨우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소중한 사랑이다.
구원의 문을
여시는
소중한 사람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두려움을
봉헌한다.
두려워하지 않기에
소중한 사랑의
관계는 구원으로
완성된다.
오늘도
소중함을 배우는
소중한 날이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4주 토요일-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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