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1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무렵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동굴에서 3년 동안 고행과 기도의 은수 생활을 하였다. 그의 성덕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베네딕토는 마침내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서방에서 처음으로 수도회 규칙서에 공동생활의 규정을 제정하였다. 이 규칙서는 수도 생활의 표준 규범서로 삼을 정도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베네딕토 아빠스는 547년 무렵 몬테카시노에서 선종하였다고 전해진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그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태 10, 34~11,1)
"Whoever love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love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does not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after me is no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에게, 주님의 눈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라고 하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신학교 교수 신부가 신학교에 막 들어온 신학생들에게 강의할 때였습니다. 커다란 칠판을 가리키면서, “이 칠판이 하느님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뒤, 신부님께서는 칠판에 점 하나를 찍은 뒤에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이해하는 정도입니다.”
유한하고 부족한 존재인 우리가 과연 얼마나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칠판 위의 점만큼은 과연 이해하고 있을까요? 이 정도 만한 이해만 있어도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마태 17,20)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정도의 믿음도 없어서 불평불만의 연속과 하느님 뜻에서 멀어지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그분 사랑을 이해할 수 있어야 지금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칠판 위의 점만큼이라도 하느님께 대한 이해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내 삶의 첫 번째 자리에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처음 주님의 말씀을 접하는 사람에게 충격적일 것입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 성당에 왔는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뒤에 이어 오는 말씀도 충격적입니다. 부자간, 모녀간, 고부간에 갈라지면서 서로 원수가 된다니요.
이는 무조건 원수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우선순위에 두면서 갈라질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 그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하심과 정반대의 악의 세력은 어떻게 하려고 할까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도록 온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세력이 사랑하는 내 가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평화가 아닌 분열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분열될 수 있음을 말씀하시며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38)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이사 1,16)
주님께 합당한 자녀가 될 수 있는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진정성의 표지, '시원한 물 한 잔'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rXGNyiwMt8Q
-조재형신부-
지구의 역사는 45억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지구의 지층에서 시간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퇴적을 통해서 지층이 아래로 쌓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각활동으로 융기하는 지층이 있습니다. 지금은 높은 산이지만 그곳이 예전에는 바다였던 곳도 있습니다. 황량하고 메마른 사막도 예전에는 푸른 숲이었던 곳도 있습니다. 이렇게 지구는 지층과 화석이라는 흔적을 통해서 지구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 몸에도 살아오면서 여기저기 삶의 흔적이 있습니다. 저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어렸을 때 결핵이 제 몸에 머물다 갔다고 합니다. 비자문제로 건강검진을 받으면 그 지나간 흔적 때문에 가슴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눈썹에는 연탄재 싸움을 하다 맞아 수술한 흔적이 있습니다. 무릎에는 보온병을 열다가 물이 흘러 화상 입은 흔적이 있습니다. 오른쪽 발목에는 골절로 수술한 흔적이 있습니다. 이런 흔적들을 담고서 여기까지 와 준 제 몸이 고맙고,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도 ‘영성’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시작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중에도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기도’할 것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기도하고 찬양하던 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박해의 광풍이 몰아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습니다. 박해의 광풍이 잦아들면서 교회는 제도와 성전을 세우면서 외적인 모습이 발전했습니다. 사막으로, 광야로 들어간 은수자들은 제도와 성전으로 채울 수 없는 영성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원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일하며 기도하라.’는 베네딕토 성인의 가르침은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였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한 것입니다. 권력에 취해서 교회의 권위가 무너져갈 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영성으로 무너져가는 교회를 다시 일으켰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과 나눔의 영성은 예수님께서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몸과 피를 내어 주셨던 모범을 따라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어올 때 이냐시오 성인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 있다.’는 영성으로 교회를 지켰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한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지식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채우면서 얻어지는 것이고, 지혜는 나누고 비움으로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우고, 쌓으면서 얻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비우고, 나누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밀알 하나로 남지만 떨어져 썩으면 수많은 밀알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매일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참된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밭을 제대로 일굴 수 없듯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다른 곳을 바라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과 교회에 쌓아야 할 ‘흔적’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우는 것입니다.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들 보살피는 것입니다.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쌓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파괴를 거슬러 건설을!
-양승국신부-
하느님께서는 곤경에 처한 당신의 백성들을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다양한 방법으로 위로와 격려, 도움과 사랑을 베푸시는데, 그중에 한 방법이 성인성녀들의 파견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베네딕토 아빠스 성인도 당시 시대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자 은총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던 시대의 고통과 슬픔, 문제점에 대해서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가슴 아파하며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끝에 자신의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살아가던 당시(AD 480-547) 유럽 세계는 민족 대이동의 시기였습니다. 잘 나가던 로마 제국은 힘을 잃고 쇠락해졌습니다. 이민족들은 끊임없이 이동해가면서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농부들이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헛수고였습니다. 침략과 전쟁, 파괴와 살육이 계속되던 불안정한 시대였습니다.
이런 전쟁과 파괴의 시대 앞에 베네딕토 성인은 ‘정주 수도회’ 건설로 응답합니다. 그는 ‘파괴를 거슬러 건설’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든든한 반석 위에 하느님의 집을 건설하는 건축가로서의 소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운 좋게도 베네딕토회 소속 이태리 신학생을 알게 되어 얼마간 베네딕토 성인께서 머무셨던 수비아코 수도원,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잘 나가던 시절 수백명의 수도자들이 생활하던 대 수도원이었습니다. 지금은 관광명소로 널리 알려졌고, 몇 안 되는 수도자들께서 힘겹게 이끌어 가시는 모습이 역력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이곳저곳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 높은 곳에, 그렇게 견고하고 엄청난 대수도원을 건설할 수 있었는지. 아마도 외부의 침략과 약탈로부터 동료 수도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높디높은 산꼭대기에 수도원을 건설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베네딕토 성인께서는 꼭 외형적 수도원 건설만을 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무엇에 앞서 전쟁과 파괴에 맞서 평화의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폐허가 된 건물을 일으켜 세우는데도 관심이 컸었지만 상처입고 피폐해진 사람을 건설(일으켜 세우는데)하는데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한 인간이 이 땅 위에 똑바로 서는 것, 건강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 이웃들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통해 사랑의 수도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한평생 노력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자신에게 철저한 사람이다 보니 동료 수도자들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적용했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커지게 마련이지요.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웃들의 약점에 고정되었고 점차 마음의 평정을 잃어갔습니다.
지나치게 깐깐한 장상 베네딕토로 인해 수하 수도자들의 원성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서로 심각한 상처를 입히고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넘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신의 허약함을 잘 알게 된 베네딕토의 실망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의 완고함과 무기력함, 나태함 앞에 크게 실망했지만, 거기서 끝내지 않았습니다.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할 고요한 방 하나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흔들리지도 않는 장소, 더이상 파괴되지도 않는 장소였습니다. 거기만 들어가면 하느님과 나 둘만 마주 보는 아름다운 장소를 만든 것입니다.
베네딕토는 드디어 건축물 중에 가장 아름답고 든든한 건축물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만의 개인용 내면의 성체, 내면의 감실, 내면의 지성소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 결과 베네딕토는 이웃들의 결점과 실수, 죄와 문제들 앞에서도 더 이상 좌지우지하지 않게 되었고, 그제야 흔들리는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영적 스승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영근신부-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찌하여 칼을 주실까?
그것은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칼은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입니다.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는 칼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혁명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특별히 '참행복선언'인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에서 말씀하셨습니다.(2013.11.15)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또한 볼리비아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본주의의 물신풍조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성 바실리우스의 말을 빌려 돈을 악마의 배설물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파라과이 방문길에서는 ‘돈에 대한 탐욕의 체계화가 단지 나쁜 것을 넘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교묘한 독재’라고 질타하시면서 '인간 얼굴을 한 경제모델 세워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교종의 연설을 두고 미국 가톨릭대의 스티븐 쉬넥 가톨릭연구소장은 "교종의 발언은 통상적인 신학이 아니라 산꼭대기에서 외치는 함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혁명을 위한 칼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칼은 이사악에게 내리친 순명과 결단의 칼이었고, 할례의 칼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칼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칼은 영혼이 꿰찔리는 고통을 주었고(루카 2,35), 성령의 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7).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
(히브 4,12)
이처럼 '칼'이란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결단이요, 그 결단의 원인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와 이 세상에 말씀의 칼을 꽂으소서!
저와 세상을 수술하소서!
병든 이 세상과 이 몸에는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할 수 있는 예리한 칼이 필요하오니, 오늘 저희 심장에 당신의 칼을 꽂으시어 저희를 살리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주님!
제 목에 칼을 견주소서.
당신 영의 칼로 저의 자애심을 내리치소서!
제 심장에 당신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그 어느 것도 당신보다 더 사랑하지 말게 하소서!
말과 혀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 34)
-한상우신부-
진짜 칼은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
칼을 부정하는
것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잘라내야 할
악습을 잘라내는
단순한 사실에서
칼은 시작된다.
우유부단한
우리들에게
칼을 주셨다.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삶의 중심을
바로잡아 준다.
십자가의 칼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진짜 신앙은
하느님
중심적이다.
따르기 위해서는
자를 수
있어야 한다.
일상의
매순간이
식별의 칼날과
함께 주님을
향한다.
평화를 지키는
십자가의 칼이다.
밭을 갈아엎는
쟁기도
소중한 것을
알게하는
칼도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삶임을
가르쳐준다.
조화와 균형
겸손과 중용
절제와 성숙의
칼이 필요한
우리들이다.
칼끝이 향하는
방향이 실은
새로워져야 할
우리자신의 삶이다.
새로워진 삶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이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십자가의
새 길이다.
무딘 신앙으로는
아무 것도
잘라낼 수 없다.
주님께서는
절박하고
각별한 칼을
우리에게 주셨다.
반성과 결심의
칼은 우리의
목마름을
일깨워주며
우리의 안일함과
우리의 이기와
우리의 무지를
꾸짖고 있다.
평화는 칼과
함께 공존한다.
우리자신의
변화를 촉구한다.
식별의 칼이며
우선순위의
칼끝이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5주 월요일-인정은 칼로 베라!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0) | 2022.07.13 |
---|---|
2022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0) | 2022.07.12 |
2022년 7월 10일 연중 제15주일 (0) | 2022.07.10 |
2022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0) | 2022.07.09 |
2022년 7월 8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0) | 2022.07.08 |